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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불의 맛
나잇값·12 초, 분, 시·13 비몽사몽·14 자리 내어주기·15 재기再起 ― 절망은 없다·16 천사·17 일출과 일몰·18 가족정원·19 불의 맛·20 기회·21 수평과 공평·22 과제 2.0·23 새로운 꿈·24 인터폰 소리·25 진행형·26 다산의 습성·27 2부 수평과 공평 잘, 가셨을까·30 대보름·31 오래된 버릇·32 수목장·33 뼈를 뽑다·34 그놈을 잡아서·35 허공의 연기·36 기어코·38 간격에 대한 집착·39 풀밭 위의 기도·40 밥 생각·41 눈시울 떨림증·42 오래 걸리는 계산·43 한계·44 소리에 젖다·45 흰죽, 미음 생각 ― 매미 3·46 3부 뼈가 굳다 인칭의 거주지·48 치료와 치유·50 뼈가 굳다·51 푸른 눈·52 허물의 꿈·54 석고데생·55 수작酬酌·56 짝지가 없다·58 귀향·59 나의 시 농장·60 시급한 생계비·62 등 뒤의 시선·63 나무 악보·64 설화舌禍 축제·66 비과세 딱지·68 씨감자의 눈·69 4부 절필은 없다 유비무환·72 동명이인·73 00님 혜존·74 무효 기간·76 절필은 없다·77 비우면 보여·78 만년설 만년수·79 수평에 쉬다·80 야간 라이더·82 아득한 저 너머·83 명사名詞의 세월·85 일상의 고요·86 주름잡다·87 우리 아빠에게 이를 거야·88 시선 너머·89 반사이익·90 5부 텃밭 원고지 내부의 적들·92 시비詩碑 시비是非·94 그림자와의 거리·95 하나만으로·96 꿈의 꿈·97 이슬·98 등신等神들·99 ‘아니’가 아니라·100 뼈가 있는 말·102 사람을 찾아서·103 소리를 좇다가·104 물 한 잔의 춤·106 텃밭 원고지·107 은행나무와 효경孝經·108 유사와 상이·109 솥뚜껑·110 해설 | 황정산_사유의 힘으로 빚어낸 긍정의 언어·111 |
趙勝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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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불의 맛
3백 년 넘은 올리브 나무를 깎아 만든 목검이 진열대 위에 누워있다 스페인에서 살다가 죽었다가 한국에까지 와서 살아있다 말을 걸어도 아무런 대답도 안 하므로 네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안다 내가 백 살 정도는 되어서 네 흉내를 내며 입을 다물면 내 귀도 열리어 말이 부질없어 침묵했다는 그 소리가 들릴 것이다 나잇값을 치르고 난 뒤쯤에는 ---「나잇값」중에서 체코의 프라하 어느 광장에는 시침만 있는 시계와 분침만 있는 시계 그 위에는 시침 분침이 함께 있는 시계탑이 있다 분침만 있어도 사는 사람 시침만 있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사람 시침 분침이 함께 있어야 익숙한 사람 탑 아래에 그림자는 움직이는 사람들 그 누구의 발목이라도 꼭 붙잡고 다닌다 두면 가고야 마는 놓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그림자를 가만 눕혀 둘 수는 없다 ---「초, 분, 시」중에서 지각 사유 통사정하여 감독관에게 겨우 받은 시험지 수험번호도 기억 안 나고 시험 답안지에는 글자가 한 자도 쓰이지 않고 마감 시간 종소리 울린다 이 정도의 절망이면,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발악하며 간절히 빌었더니 정말 꿈이었다 내게는 아직도 실현되는 꿈이 있다 ---「비몽사몽」중에서 한 해 뒤 태어난 아우에게 가장자리를 내어주고 아우와 그 아우의 아우들이 세상 향해 먼저 나가도록 나이테들은 순서를 반드시 지키고 있다 실손으로 먼저 만지며 나아가라고 고구마, 호박, 오이들도 어린 순들이 넝쿨에서 벗어나며 뻗어 나감을 믿고 지켜본다 앞선 자가 꼭 먼저 나서지 않도록 뿌리가 어린 것들에게 새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새길 위에는 건강한 태양이 늘 기다림을 뿌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리 내어주기」중에서 소금쟁이 놀다 간 자리에서 칼날 스케이트로 산보를 한다 족적 하나 못 남겼지만 아무도 바닥에는 닿지 않았다 물은 조용히 길을 내어주고 있었다 ---「재기再起 ― 절망은 없다」중에서 안아달라고 팔 벌리는 아기 모두 안아주겠노라고 두 팔 벌리는 그분 작으나 크나 닮았다 ---「천사」중에서 해는 죽어도 해로 태어나고 별은 죽어도 별로 태어남을 하루씩만 살아도 알겠네 자고나도 나는 여전히 나 날마다 같은 체험이니 내일 늦게 일어나도 알겠네 지구 위에서 보는 일출과 일몰 어디까지 가면 나를 함께 볼 수 있을까 까마득한 궁금증 알 듯도 하네 ---「일출과 일몰」중에서 맨땅에서 자라는 막내 채송화 작은누나 봉선화는 가슴에 분홍 물을 채우고 큰누나 장미 넝쿨 담장을 넘어간다 이웃사촌 여치가 날아와 놀다 가고 무당거미 집 한 채 은빛 그물 펼쳤다 아버지는 느릅나무 그늘 조용히 누워있고 오늘도 등불 켜 든 해바라기 엄마 이곳저곳 비춰 주네 ---「가족정원」중에서 속까지 까맣게 태워 낸 불맛을 뜨겁게 내린 커피 잔 속에서 얼음조각을 만나 벌인 타협, 흑갈색 고집이 차가운 투명과 악수하며 만났지만 점차 커피는 연갈색으로 얼음은 빙하의 꿈을 버리며 시간의 얼굴을 씻고 있었어 아메리카노, 아이스의 불맛은 시원하지 찻잔의 바깥에는 시간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진땀이 차갑게 송송 슬고 있었어 ---「불의 맛」중에서 창틀에서 다시 들리는 비둘기 소리 추위를 이기고 왔다는 말이다 득음한 듯 읊는 깊은 오도송에 말을 해 본 적도 어디 다녀온 적도 없이 밖이 그리운 호접란은 분홍 꽃 내걸었다 겨울 지나고 가장 좋은 기회에 새와 꽃이 주고받는 인사인 줄 알고 알은체 끼어들어 창문을 여니 깃털 몇 뿌리며 비둘기 날아갔다 호접란은 그대로 고요하다 봄날이 길어서 서먹한 이들에게도 기회는 또 있겠다 ---「기회」 중에서 승강기에 25층, B1 층 위치 표시등이 켜진 새벽 늦은 귀가와 이른 출타를 한 사람들이 있음을 추측하며 곤충도감 개미집 단면도에서 본 것과 대칭형 구조의 아파트를 비교해 본다. 지하에서 지면으로 나온 개미와 지상에서 지면으로 나온 사람들 서로의 만남이 쉽지 않은 겨울이지만 누구나 수평에 등을 댄 채 잠들거나 깨고 그 익숙함으로 세상은 평등하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 아니 좋은가, 햇살이 평평하게 찾아오는 지상의 시간에 층마다 등을 펴고 쉴 수 있는 공간 수직의 이동에서 멈추어 볼 만한 수평이 있으니 아니 그러한가, 생사 불문하고 수평은 등 뒤를 쫓아다니고 누군가의 등이 되려는 등나무가 제 등 비틀어가며 가는 그 너머 또 수평이 있으니 ---「수평에 쉬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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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힘으로 빚어낸 긍정의 언어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조승래 시인의 시들을 읽으면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깊이’와 ‘넉넉함’이다. 그의 시들은 우리를 무한한 사유의 공간으로 안내하여 안온한 긍정의 세계에 안착하도록 인도한다. 요설로 난삽해진 언어와 신경증인 예민한 감각만으로 우리의 눈과 마음을 피곤하게 하는 최근 시들을 읽다 조승래의 시들을 읽는 순간 사유의 깊이에서 오는 평안한 안정감이 이 모든 피로를 씻어준다. 그는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눈을 더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일상에서 출발하여 인간 존재와 시간, 언어, 관계의 본질에까지 도달하는 그의 시편들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요한 사유의 강을 건너게 한다. 그렇다고 그의 시가 추상적이거나 사변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조승래 시인은 일상의 순간을 포착하여 그 안에 내재하는 진실을 들여다보는 예리한 눈을 가지고 있다. 이 깊은 시선과 오랜 삶의 연륜은 겉으로 보이는 피상적 세계를 삶의 내면을 바라보는 사유의 세계로 확장한다. 한 마디로 조승래 시인은 사물에 대한 구체적 감각 경험을 깊은 철학적 깨달음으로 심화시킬 줄 아는 시인이다. 그의 눈과 입을 통하면 모든 일상의 사물은 시적 언어로 변화되고 그것은 사유의 재료가 되어 삶의 경구로 재탄생한다. 이 글은 ‘사유의 깊이’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조승래 시인의 시편들이 일상을 철학으로, 감각을 존재론으로 전환하는지를 탐색하고자 한다. 2. 사유의 힘과 감각의 언어 조승래 시인은 사물의 내면을 바라보는 특별한 눈을 가졌다. 이 눈으로 바라보는 사물은 일상을 벗어나 사유의 세계로 들어가 다른 존재가 된다. ‘목검’, ‘영양 보조 식품’, ‘커피’, ‘텃밭’과 같은 일상적 소재는 시인의 손과 입을 거치며 사유의 언어로 재탄생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를 살펴보자. 3백 년 넘은 올리브나무를 깎아 만든 목검이 진열대 위에 누워 있다 스페인에서 살다가 죽어서는 한국에까지 와서 살아 있다 말을 걸어도 아무런 대답도 안 하므로 네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안다 내가 백 살 정도는 되어서 네 흉내를 내며 입을 다물면 내 귀도 열리어 말이 부질없어 침묵했다는 그 소리가 들릴 것이다 나잇값을 치르고 난 뒤쯤에는 - 「나잇값」 전문 시인은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한 목검을 통해, 침묵이 지혜로 승화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올리브나무 목검은 침묵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낸다. 목검의 기품있는 외양에 서려 있는 그것의 강도와 무게감은 구태여 그 목검을 휘둘러 보지 않아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말없이 놓여 있는 오래된 목검은 한 존재의 사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가진 생의 깊이를 드러낸다. 이 침묵을 아는 것이 “나잇값”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말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대개 사용된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하여 자신의 주장을 사람들에게 강변하기 위해 말을 하며 살아왔다. 이렇게 말하는 동안 우리는 자신의 귀를 닫는다. 하지만 입을 닫고 말을 멈추는 순간 우리의 귀는 열리게 된다. 그리고 그 귀가 열릴 때 우리가 얼마나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고 살았는지 깨닫게 된다. 말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지우는 것임에 반해, 침묵은 존재를 존재로 살아 있게 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말을 걸어도 아무런 대답도 안 하므로/ 네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안다”라는 두 행이 바로 이런 생각에 도달하게 하는 빛나는 구절이다. 속까지 까맣게 태워 낸 불맛을 뜨겁게 내린 커피 잔 속에서 얼음조각을 만나 벌인 타협, 흑갈색 고집이 차가운 투명과 악수하며 만났지만 점차 커피는 연갈색으로 얼음은 빙하의 꿈을 버리며 시간의 얼굴을 씻고 있었어 아메리카노, 아이스의 불맛은 시원하지 찻잔의 바깥에는 시간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진땀이 차갑게 송송 슬고 있었어 - 「불의 맛」 전문 커피에서 불맛을 느끼는 시인의 예리한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시인의 예민한 감각은 이미 볶아져 한 잔의 액체로 변하고 더욱이 “얼음조각”이 채워진 아이스 아메리카노 커피 안에 스며있는 불꽃의 맛을 감지해 내고 있다. 시인은 커피의 이 불맛과 얼음이 섞이는 장면을 통해 뜨거움과 차가움의 감각을 체현하게 하고 고집과 타협이라는 인간관계의 중요한 지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 시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그러한 관계의 긴장감을 “진땀이 차갑게 송송 슬고 있”는 커피가 담기 유리잔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묘사하여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긴장 속에서 일상의 삶을 영위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그 긴장은 대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한다. 사업을 하거나 물건을 파는 영업을 하거나 생산이나 유통 라인에 배속돼 작업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관계가 긴장을 만든다. 불맛과 얼음 사이에서 “진땀을 차갑게 송송 슬고” 있는 유리잔처럼 우리도 고집과 타협의 긴장 속에서 진땀 흘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감각적인 언어로 일상 사물을 그려내면서 조화와 타협이라는 삶의 이치를 생각하게 하는 통찰력의 시이다. 조승래 시인의 많은 시들에서 시인의 시선은 내면으로 향해 있다. 시인은 이 내면의 시선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본다. 또 하늘을 오래 보았습니다 파란 허공 아래 구름이 떠다니고 마른 잎 날다가 착륙하는 그 틈새로 잠자리들이 피해 다닙니다 만 개의 카메라로도 다 찍을 수 없는 넓이와 높이의 하늘에 가득 찬 얼굴이 있습니다 저세상으로 가신 어머니의 얼굴입니다 젖은 눈으로 보아야 잘 보이지만 초점이 잘 안 잡혀 손수건으로 눈 비비기를 수십 년, 참 오래된 하늘보기 습관입니다 - 「오래된 버릇」 전문 이 시는 상실과 기억의 층위를 더듬는다. 시인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어머니를 추모한다. 아마도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곳에 계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은 어머니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그리움이 반복되어 일상적인 습관이 되면 그것은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고 추모의 염은 습관 속에서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추구하고 추모하는 행위를 습관적으로 하고 만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 가는 것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대신하고, 일 년에 한 번 제사 지내는 것으로 조상의 은혜를 더는 고마워하지 않는다. 시인은 특별한 의식을 통해 이런 내용 없는 관습적 행위를 벗어나고자 한다. 그것은 하늘 보기이다. 시인이 “초점이 잘 안 잡혀” 희미해진 눈을 손수건으로 비벼서라도 하늘을 분명히 보고자 한다. 이는 이 애도의 의식 속에 깃든 진실한 마음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싶어서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 생생하게 그려진 하늘의 모습을 감각적 언어로 마음속에 단단히 새겨넣는다. 이 시의 1연에서 어머니가 그리워 쳐다본 하늘에 있는 구름과 잠자리의 모습을 구태여 강조하여 보여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3. 긍정의 세계관과 수평의 상상력 조승래 시인의 시들에서 보이는 가장 큰 특징은 삶에 대한 든든한 긍정적 자세이다. 시인은 이 긍정의 언어를 통해 강퍅한 세상을 견디고 타인의 삶을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긍정적 세계관은 그의 시에 등장하는 시간에 대한 관념 속에서 잘 확인된다. 그의 시들에서 시간은 늘 중요한 배경이자 화두이다. 가령 다음 시를 보자. 사방천지 이어진 철로 위 종착역에 가 보면 역은 또 있고 고향역 저만치 두고도 역마살 무거워 갈 수가 없네 내 배역은 아직도 진행형 어느 간이역도 세울 수 없네 - 「진행형」 전문 기차역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비유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시에는 우리네 삶은 계속되는 여정이며, 종착점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인식이 담겨 있다. 시인 역시 고향을 그리워하지만 머물 수 없는 존재로서, ‘역마살’이라는 운명을 타고난 자로 등장한다. 이 시에는 그런 시인의 내면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어느 간이역도 세울 수 없네”라는 한탄은 머물 수 없어 안식할 수 없다는 자조이기도 하지만 아직은 시인이라는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진행형”이라는 제목을 이를 잘 대변해 준다. 아직 끝나지 않는 시간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것으로 무거운 역마살의 삶을 받아들이고 있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 시인은 왜 가지 못하는 것일까? 시인에게는 안주보다는 정처 없는 유랑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비록 머물 곳 없는 피곤한 삶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진행형”으로 살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는 긍정적인 인생관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다음 시는 이 공존의 정신을 수평적 이미지로 다시 확인시키고 있다. 승강기에 25층, B1 층 위치 표시등이 켜진 새벽 늦은 귀가와 이른 출타를 한 사람들이 있음을 추측하며 곤충도감 개미집 단면도에서 본 것과 대칭형 구조의 아파트를 비교해 본다. 지하에서 지면으로 나온 개미와 지상에서 지면으로 나온 사람들 서로의 만남이 쉽지 않은 겨울이지만 누구나 수평에 등을 댄 채 잠들거나 깨고 그 익숙함으로 세상은 평등하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 아니 좋은가, 햇살이 평평하게 찾아오는 지상의 시간에 층마다 등을 펴고 쉴 수 있는 공간 수직의 이동에서 멈추어 볼 만한 수평이 있으니 아니 그러한가, 생사 불문하고 수평은 등 뒤를 쫓아다니고 누군가의 등이 되려는 등나무가 제 등 비틀어가며 가는 그 너머 또 수평이 있으니 - 「수평에 쉬다」 전문 우리는 수직의 상승을 꿈꾸며 산다. 출세하고 권력을 획득해 높은 위치에 올라서고 아파트나 빌딩도 높게 지어야 성공이고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그 높은 수직의 아파트 공간에서 편리하고 부유한 삶을 꿈꾼다. 그래서 경쟁을 하고 남을 누르며 밟아서야 한다. 이 수직적 사고가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우리 모두를 갈등 구조에 몰아넣는다. 하지만 시인은 생각한다. 아파트나 개미집이나 모두 삶의 공간이나 쉼의 공간은 다 수평이라는 것이다. 수평의 공간에서 쉬기 위해 우리는 살고 있고. “등 비틀어가며” 자라도 결국은 수평을 유지하여 누군가의 등이 되는 등나무처럼 살아가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임을 시인은 역설하고 있다. 인생은 수직적으로 움직이지만 종국은 모두 수평에서 쉰다는 인생의 평등함을 받아들이는 긍정적 세계관을 이 시에서 엿볼 수 있다. 결국, 이 수평은 영원한 쉼이라는 죽음마저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이기도 하다. 4. 맺으며 이 시집의 시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된 믿음 위에서 서 있다. 그것은 “사유하는 삶이야말로 살아 있는 삶”이라는 깨달음이다. 시인이 다루는 사물, 감정, 관계, 시간, 언어 모두가 삶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재료이며 또한 화두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 모두를 통해 독자에게 ‘깊이 있는 삶’ 즉 사유하는 삶을 살기를 권유한다. 어쩌면 조승래 시인에게 시를 쓴다는 행위는 곧 ‘삶을 사유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음 시가 이를 잘 말해 준다. 제 몸만큼 제 마음만큼 쓰다가 쉬었다가 다시 이 세상 원고지 위에 긁적이는 그 어느 존재들도 시詩를 다 쓰더라고 굳이 말하는 이는 없었다. 멈추었으면 삶이 아니다. 삶은 멈추지 않는다. - 「절필은 없다」 부분 삶이 계속되는 한 절필은 없다. 시인에게 시는 삶의 이유이고 삶 자체이기도 하다. 자연의 미물도 끊임없이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삶은 멈출 수 없고 글도 멈출 수 없다. 시인은 존재의 흔적을 남기며 계속해서 ‘삶의 시’를 써 가고자 한다. 그 아름다운 여정을 우리는 이 시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생생한 시인의 육성을 마음속으로 듣는다. “쓰지 않으면 삶이 아니다.” 시인의 말 아홉 번째 시집을 내면서 시보다 더 많은 말을 했기에 반성한다. 가까이서 함께 하시는 분들 모두가 여전히 소중하고 고맙다는 말은 하고 싶다. 2025년 봄 조승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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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에 쉬다」는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실존적 통찰을 발견하고 이를 간결한 시적 언어로 풀어낸 조승래 시의 정수를 보여준다. 인간 존재의 구조를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사유한다는 점에서, 이 시는 고정된 근대적 사고와 경쟁 중심의 삶을 벗어난 새로운 삶의 철학을 제시한다. 이 시는 도시성과 자연성, 개인성과 공동체, 삶과 죽음, 수직과 수평을 조화롭게 교차시키며, 시인이 추구하는 ‘고요한 긍정의 시학’을 강하게 드러내는 대표작이라 평가할 수 있다. 나아가 죽음조차 평등한 생의 한 방식으로 받아들이며, 공동체적 삶의 윤리까지 성찰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조승래 시 세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시편들은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에서 출발하여 삶과 존재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통찰을 제시하는 작품집이다. 그의 시는 일상성과 존재론적 질문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독자에게 삶을 더욱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며,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존재의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도록 안내한다. - 김영탁 (시인,『문학청춘』 주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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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래 시인의 시편들은 재밌게 잘 읽힌다. 일상에서 솟구치는 언어와 마음으로 쉽게 쉽게 시를 쓴다. 이리저리 머리 굴려 가며 써 머리 아픈 시가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난 시이기에 독자 가슴에 그대로 직격 해 들어가 둔중한 울림과 깨달음을 준다. 그리하여 우리네 삶과 세상에 가없는 깊이를 돌려주고 있다.
“내 귀도 열리어/말이 부질없어 침묵했다는// 그 소리가 들릴 것이다/ 나잇값을 치르고 난 뒤쯤에는”이라는 구절에 드러나듯 ‘나잇값’, 삶의 경륜에서 시가 우러나고 있다. ‘말’, 언어로는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침묵’,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지경을 일상의 말로 다가서는 시편들이기에 쉽고도 깊이 있는 울림을 주고 있다. - 이경철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