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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알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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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부

브로드웨이에선 문워크로 걸어요 ― MJ. The Musical·12
국경선에선 낭만이 없어·14
열망과 허망 사이·15
거울의 방·16
대륙의 끝에 서서·18
바이칼호로 가는 기차가 길다·20
반얀트리는 균열이 역사다·22
밴쿠버 하늘에서 북극성을 보다가·23
낯선 거리로 간다·24
빙점 근처에 머물다·26
어찌 그 영혼을 채우겠느냐·28
시인의 공원에 이끼가 푸르다·30
오로라가 춤추던 밤·32
우아한 휴식·34
붉은 꽃으로 핀다·36
미열을 껴안고·38
여행은 또 다른 탐구·40
옥신네 뒤뜰엔 반딧불이 날고·42

2부

첫 해돋이·44
뱅크시처럼 그려 봐·46
디지털 노마드·47
어디를 뚫어야 하나·48
인터랙티브 아트Interactive Art·50
남산에 떠오르는 달·52
으아리꽃 포즈로·54
석화 피었다·55
아린·56
빚이 된 시·57
그 거리 어딘가·58
거듭나는 선물·60
발아기·61
말띠 여자 바람났네·62
강가의 나무·64

3부

안개와 여백의 강·66
우표의 감각·68
연인들의 기도·69
열대야 탱고·70
풍납토성에 가는 이유라면·72
저녁을 스케치하는 호수·74
숲·75
갈대 너를 보며·76
꿈의 색깔·78
운조루에 빛이 머물고·79
어쩌면 행복한 점심·80
십일월의 시인에게·81
오렌지색으로 단장한 벽돌집·82
눈썹 사이로 송년이 온다·84

4부

마지막 공사·86
화석을 드로잉하다·87
상현달 아래서·88
겨울 숲을 빌릴게요·90
토르소와의 거리·92
다락방의 수채화·93
같은 시간 다른 장면·94
남한산성 암문을 통과하는 시간·96
염색체 이상이 아니지요·97
어떤 무덤·98
서쪽 언덕으로 가는 길·100
미로의 통로 앞에서·101
다섯 손가락·102
들어온 길과 나가는 길·104
기도는 타이밍·105
그리운 날의 끝이 있을까·106

해설 | 유성호_모든 존재자들을 따뜻하게 감싸안는 시인의 품·108

저자 소개 1

전주에서 태어나 1998년 『포스트모던』 한국문학예술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했습니다. 시집으로 『시간의 무늬』 『흰 공작새 무희가 되다』를 펴내고, 공저로 『쉼표에 잠수하다』 등 동인지 다수와 7인 공저 『이 땅에 사는 뜻은』 수필집을 출간했습니다. 전주문화방송 아나운서로 방송계에 종사했으며, 백화점 문화센터 <방송아카데미> 강사, 재능시낭송협회 초대 부회장을 역임했습니다. 제8회 김기림문학상을 수상하였고, 현재 한국시인협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강남시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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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8월 18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128*210*20mm
ISBN13
9791168151451

책 속으로

1부


브로드웨이에선 문워크로 걸어요
― MJ. The Musical*

폐기처분된 줄 알았던 달의 정서가 새로운 스텝으로 스며들어요

스르르 스르르
무대의 진동이 객석의 심장으로 걸어와요

그리움의 강을 거슬러 본향으로 돌아간 한 사람

달의 중력을 다시 써서 찬란한 저항으로 업데이트한 거죠

검은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끝없이 저항을 노래해요

그가 처음 추었던 정열적인 스텝이 익살스럽게 걸어와요

앞으로 걸으려는 스텝이 스르르 스르르 뒤쪽으로 흘러요

브로드웨이가 달빛에 흔들리는 밤

호텔 방까지 문워크로 가볍게 미끄러져 왔어요


*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공연된 마이클 잭슨의 생애를 그린 뮤지컬.


국경선에선 낭만이 없어

국경과 국경의 접경에서 마주친 시선이 능청스럽기도 합니다
의심투성이인 세상에서
의문을 품지 않고 통과시키는 일은 없겠지요
어떤 관계도 여러 굴곡을 넘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사람에 대한 의심뿐 아니라
나라와 나라 사이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법대로의 신뢰를 통과해야 하니까요

의심의 눈초리로 던지는 질문에
덧붙이려 한 대답은 무엇이었는지
복잡한 눈빛으로 마주 보며
믿음을 주려는 목소리로 답하는데
차 안을 샅샅이 둘러보고서야 여권을 돌려주더군요

사소한 거짓이랄 것도 없는 국경에선
많은 말이 필요 없을 때가 있지요
그 순간엔
힘과 간격만이 팽팽하게 버티고 있다니까요


열망과 허망 사이

얼마나 가고 싶던 곳인가

열망에 열망을 더하여 드디어 마테호른에 오르게 된 날, 맑은 풍경 속 빙하가 녹아 흐르는 물소리도 멜로디로 들린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스위스가 자랑하는 산악열차에 오른다 두 번의 정거장을 거쳐 마지막 관망대까지 왔다 순간,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눈보라가 위대한 걸작품을 지워 버린다 눈앞에서 사라진 마테호른의 설산 봉우리

열망이 허망이란 사이클로 회전한 시점에서, 회색의 낯빛으로 바뀌는 서로의 표정을 살피다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맑은 슬픔을 남기고 싶진 않아 부스스 몸을 털어 본다

운수 좋은 날

아무런 기척도 없는 만년설의 아픈 전설 한 줌 가슴에 묻을 따름이다


거울의 방

거울의 방으로 들어가 원형 속에 가득 찬 너무 많은 나를 본다

아무리 거울의 방이라지만
당황스러워 웃어야 할지 말지
나 같지 않은 표정에
스스로 의문을 던지는 건 왜?

기억을 숨긴 눈길이 순간 묻는다
잠깐이라도 흔들리는 건 뭐야
은밀함이 분명한데 잃어버린 과거가 스친다
잠시 인연의 끈 같은 순간이 겹쳐오는 건 또 뭐야
먼 나라에서 이렇게 불심 검문이라도 받는 거야

투명한 거울 속에서
방사형의 원을 그리며 끝없이 반사되는 나
은밀함이란 무엇이며
버리지 못한 기억은 무엇이란 말인가
거울의 공간이 내게 던지는
두려움인가
유혹인가


* ‘거울의 방(Mirror Room)’은 일본의 예술가 야요이 쿠사마의 Infinity Mirror Rooms 시리즈로 ‘더 브로드(The Broad, LA)’에서 감상했습니다.


대륙의 끝에 서서

벽 너머의 세상이 두려워 주저하던 망설임 끝에
서쪽으로 부는 바람에 쏠리다
여기는
포르투갈 까보 다 로까(Cabo da Roca)

땅으로 기어가듯 작아진 꽃잎들
어서 오라는 표지를 달고 나풀거리네
벼랑 아래 대서양 물빛은 어찌 그리도 푸른지
높아진 십자가
돌기둥과 하늘 사이로
나는 새야
흰 구름 한 자락 끌어와 대지의 꿈을 색칠하니

영화의 한 컷처럼 주인공이 되어보는 하루
아리아의 열창을 배경음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게 어때
사하라사막에서 올라오는 열풍에 녹아버려도 상관없어

여기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십자 기념탑 아래서
시작과 끝의 경계를 더듬거리다 보면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 듯 말 듯


* 포르투갈의 서사시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의 표현이다.


바이칼호로 가는 기차가 길다

물과 몸이 하나 되고픈 열망이 호수보다 커졌다

국경을 넘어 달리는 시베리아횡단철도 위에서
뇌 속 기억의 물이 범람한다
풀뿌리 속 진액을 빨아 안은
몸 깊은 곳의 시름이 뉴런 사이를 덜커덩덜커덩 오간다

회복이 두려운 신경 가닥들은 아직 저기압 상황

멀고 먼 철길 위에서 압류할 수 있는 건
속일 수 없는 여권과 기차표뿐인데
저만큼 묻어두자

웨이브 속도로 밤새 달리고 달려 아침을 달리는 여긴 어디쯤일까

물비늘을 스치며 허물 벗는 이곳이 안가라강이라고
바뀌어 가는 풍경은 사라짐과 새로움의 반복 현상 같아

환상적인 자작나무 숲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건
어쩌면 천만다행
세로토닌은 상승하고
때맞춰 윤슬이 퍼지는 여기가 바로 바이칼호라 하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모든 존재자들을 따뜻하게 감싸안는 시인의 품
― 김계영의 시세계

유 성 호(문학평론가·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1. 순수 원형을 회복하고 새로운 존재론을 지향하는 언어
김계영 시인의 시편들은 깊고 섬세한 근원 탐구의 속성을 견지하면서, 수많은 시공간을 에돌아 궁극적으로 자신으로 귀환하려는 회귀적 의지를 한결같이 함축하고 있다. 이때 필연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시인 스스로 정성스럽게 추구해온 삶의 의미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김계영 시인은 순수 원형을 회복하고 새로운 존재론을 지향하는 언어를 통해 오랫동안 마음에 새겨온 삶의 근원적 문양紋樣을 굴착해간다. 그 안에는 몸과 마음에 오랫동안 묻어두었을 간절한 소망도 담기게 되고, 머물다가 사라져간 아득한 순간들도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시인은 스스로를 낮추는 겸양의 마음을 통해 자신의 실존을 역설적으로 들려준다. 자연스럽게 시인의 상상력은 삶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절제된 균형감을 택하게 되는데, 이러한 언어야말로 그로 하여금 각별한 인생론적 지혜로 나아가게끔 해준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시는 사사로운 고백적 언어를 넘어 다양하기 그지없는 타자들을 향해 나아가는 확장적 언어예술로 넓어져간다. 말하자면 그의 시가 포괄하는 의미망은 시인의 내면에서 정연하게 정리되거나 정답으로 귀일하지 않고 끝없는 파생적 원심력을 가지면서 번져가게 된다. 개인적 기억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작품들 역시 이러한 에너지를 통해 한없이 파문을 그리면서 나아가고 있다. 이제 그 아름다운 미학적 세계 속으로 한 걸음씩 들어가 보도록 하자.

2. ‘삶’을 향한 역설적 지혜와 ‘시’에 대한 본원적 사랑
먼저 김계영의 시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구체적인 모티프는 ‘여행’에서 찾을 수 있다. 어찌 보면 ‘순례’에 가까운 그의 여행은, 미지의 길 위로 자신을 내몲으로써 일상에 길들여진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시공간에서 새로운 사물과 역사와 풍경을 만나보는 것은 그에게 무엇이 결핍되어 있고 무엇이 과잉되어 있는지를 성찰하게 해주는 실천적 행위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 닿지 않은 순수 원형을 만나는 상상적 제의祭儀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은 근대적 효율성에 의해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지만 그 사라짐의 눈부심으로 하여 역설적으로 빛나는 흔적들을 찾아나서는 탐험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욕망과 여행지에서 만난 사물들이 이루는 비대칭적 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가득 선사해 준다. 다음 작품을 한번 읽어보자.

폐기처분된 줄 알았던 달의 정서가 새로운 스텝으로 스며들어요

스르르 스르르
무대의 진동이 객석의 심장으로 걸어와요

그리움의 강을 거슬러 본향으로 돌아간 한 사람

달의 중력을 다시 써서 찬란한 저항으로 업데이트한 거죠

검은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끝없이 저항을 노래해요

그가 처음 추었던 정열적인 스텝이 익살스럽게 걸어와요

앞으로 걸으려는 스텝이 스르르 스르르 뒤쪽으로 흘러요

브로드웨이가 달빛에 흔들리는 밤

호텔 방까지 문워크로 가볍게 미끄러져 왔어요
― 「브로드웨이에선 문워크로 걸어요 - MJ. The Musical」 전문

시인은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공연된 뮤지컬을 자신의 시적 무대로 소환한다. 유명가수 마이클 잭슨의 생애를 그린 이 뮤지컬은 시인으로 하여금 마이클의 ‘문워크Moonwalk’를 떠올리게끔 해주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가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뒤로 가는 춤 동작인 ‘문워크’는 중력이 없는 달에서의 걸음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그런 이름이 붙었다. 대중음악의 새로운 시대를 알린 명곡에 훌륭한 댄스 스텝을 결합하여 ‘문워크’는 팝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춤이 되었다. 그 춤을 떠올리면서 시인은 이제 폐기처분된 줄 알았던 “달의 정서”가 “새로운 스텝”으로 스며드는 순간을 느낀다. “무대의 진동”이 “객석의 심장”으로 걸어오는 순간, “그리움의 강을 거슬러 본향으로 돌아간 한 사람”을 환기한 것이다. “달의 중력을 다시 써서 찬란한 저항으로 업데이트한” 이 아득한 행위예술을 두고 시인은 “검은 모자를 눌러쓴 남자”의 끝없는 저항과 “그가 처음 추었던 정열적인 스텝”을 기억해 낸다. 그렇게 브로드웨이가 달빛에 흔들리는 밤에 호텔 방까지 ‘문워크’로 가볍게 미끄러져 도착한 시인의 예술적 공감력이 활력과 온기를 동반하면서 펼쳐진 것이다. 이처럼 먼 이역에서 향유하고 기억해 낸 춤과 노래는 시인에게 “입체적인 미학에 눈길이”(「어디를 뚫어야 하나」) 머물게끔 해주었고, “물 위를 거닐고 있는 긴 그리움”(「강가의 나무」)을 낯설게 선사한 것이다. 융융하고 가없는 예술적 여행의 정점이 여기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가슴팍으로 휘감기는 지중해의 맑음이 수려한 땅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를 지나는 길은
어둠을 빠져나온 황금빛 거리다

누대에 걸친 바닷길을 돌아
새로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던 날
길 양쪽으로 도열한 사람들이 환호하는 모습에
우리의 과거가 겹쳐
새로운 전환점을 모색하는 그곳의 눈치도 살펴보았죠
아프리카 낯선 대륙에서
세상을 보는 눈의 거리가 멀고 넓어졌어요

모퉁이 낡은 벽에는
떠나온 사람들의 그림자가 기대어 있고
푸른 문을 열면 오래된 카페의 의자에
작별 인사가 한글로 남아 있었죠

누군가는 배를 기다리고
누군가는 사랑을 기다린다는 항구에서
이미 떠난 사람을 끝내 떠나보내지 못한 누군가가 있었다니
오래전 뜯지 않은 편지가 생각나
접힌 그리움에 카사블랑카의 밤은 깊어갔어요

낯선 거리에서는
더 이상 머물 수 없음이 슬픔인 것을 그때 알았어요
― 「낯선 거리로 간다」 전문

이번에도 시인은 “낯선 거리”를 택한다. 가슴으로 휘감기는 지중해를 찾아 맑고 수려한 땅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를 지난 것이다. “어둠을 빠져나온 황금빛 거리”와 “누대에 걸친 바닷길”과 “새로 뚫린 고속도로”를 차례로 만나면서 시인은 “아프리카 낯선 대륙에서/세상을 보는 눈의 거리가 멀고 넓어” 졌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눈의 거리가 멀고 넓어지는 것 자체가 여행이 선사하는 진수가 아닐 것인가. 모퉁이 낡은 벽에 떠나온 사람들의 그림자가 남고, 오래된 카페 의자에 한글로 쓰인 작별 인사가 남은 곳에서, 시인은 지금 자신의 가슴에 “접힌 그리움”을 떠올린다. 자연스럽게 시인은 이 “낯선 거리”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는 슬픔을 품어 안는다. “누군가는 배를 기다리고/누군가는 사랑을 기다린다는 항구”에서는 슬픔도 그리움도 한시적인 것이다. 이처럼 김계영 시인은 브로드웨이 무대나 카사블랑카의 카페에서 “거울의 방으로 들어가 원형 속에 가득 찬 너무 많은 나”(「거울의 방」)를 만난다. “겹과 겹으로 뻗은 뿌리의 열정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반얀트리는 균열이 역사다」) 있는 낯설고도 새로운 순간을 기록하고 또 마음에 새긴다. 이때 시인이 찾아 나서는 여행의 장소들은 양도할 수 없는 아우라Aura가 살아있는 예술적 기억의 거소居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시인은 삶의 주변부, 정신의 극점, 생활의 현장, 신성의 극지極地, 상상적 시공간 등을 온몸으로 답파踏破하면서 자신의 마음속 빛이 회복되는 순간을 탈환하고 또 남겨간다. 그러한 실례를 담아낸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우리도 그러한 경험을 간접적으로 하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이 순수 원형을 찾아가는 그만의 문학적 탐험 과정일 터이다.

이제 우리 시대는 개인의 결단이나 선택과는 관계없이 자본 시장의 광범위한 영향에서 한 치도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인문학의 입법 기능은 현저하게 감쇄되었고 효율적 산술 방식만이 시대의 움직일 수 없는 에토스ethos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삶의 성찰과 역설적 희망의 시간을 구축해 가는 시 안의 여행과 그 기록은 우리 시대의 대안적 실천이 한동안 되어줄 것이다. 자기 발견과 치유의 속성을 견지함으로써 이러한 시의 존재론을 입증해 간 김계영 시의 성취는 삶을 향한 역설적 지혜를 깨달아가고 시에 대한 본원적 사랑을 확인해 가는 예술적 도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더불어 그의 시는 지층에 묻혀 있는 기억을 순간적으로 복원하여 근원적 그리움의 권역을 어루만짐으로써, 내면이나 세계 어느 하나에 기울어 가는 편향을 넘어서면서 사물과 내면이 부딪치는 현장이 바로 서정시의 원천이라는 자각을 수행해 간다. 그 점에서 그의 시는 행선지의 원근과 관계없이 삶의 보편적 이법理法으로 승화해 가는 전형적인 경로를 걷는 서정시인 셈이다.

3. 자연과 인간, 우주와 지상 사이의 소통과 친화
다음으로 김계영 시인은 ‘해’와 ‘달’을 비롯한 천체 사물을 통해 시집 전체가 하나의 우주적 화음을 이루게끔 배려하면서, 그것들이 ‘시’라는 마당에서 빛을 뿌리게끔 구도構圖를 완성해 나간다. ‘해’와 ‘달’로 대표되는 상상적 우화들을 통해 천체로 대변되는 자연의 상상력을 펼쳐나간다. 이때 자연은 원형성, 보편성, 직접성 등으로 인해 시인의 한결같은 선호를 받는데, 물론 그 안에는 우리가 근원적으로 회복해야 할 가치가 들어 있다. 시인은 그 가운데 천체로 시선을 돌려 특별히 그것들이 펼쳐내는 삶의 만화경萬華鏡을 일관된 적공으로 보여준다. 천체와의 불화나 균열보다는 소통과 친화의 과정을 밟으면서 어떤 이상적인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을 스스럼없이 내보인다. 천체가 빛을 뿌리는 미학적 순간을 개성적으로 펼쳐낸 것이다.

시작은 몽환의 색상으로 보였어

젖은 눈이 순간 빨강으로 휩싸이고 말았지

뜨거운 기다림 끝에 터져 나오는 절정!

환희의 신음 소리들

수평선 저 푸른 몸의 숨구멍이 다 열렸어

제 몸이 먼저 물들고 마는 바다처럼 그의 전부도 붉어졌지

멀고 먼 우주에까지 가닿은 시공의 절정!

풍성한 물의 실핏줄 자유롭게 퍼져 나가고

부리가 붉어진 새의 입맞춤이 그에게서 내게 전해오네

온몸으로 퍼지는 몽환은 어느새 새가 나는 방향에서 하나가 될 즈음

메타버스의 문을 여는 첫새벽

고도의 음파를 토해내는 사랑의 아바타, 특강 형식이다
― 「첫 해돋이」 전문

‘첫 해돋이’라는 제목 자체가 삶의 새로운 희망을 암시하는 상징적 신호가 되기에 족하다. 일출의 “시작은 몽환의 색상”으로 보였지만 “젖은 눈이 순간 빨강으로” 휩싸이면서 태양은 “뜨거운 기다림 끝에 터져 나오는 절정”답게 시인의 온몸을 흔들고 있다. “환희의 신음 소리들”이 수평선 푸른 몸의 숨구멍을 열어젖히고 바다와 태양을 붉게 물들인다. 그러니 “멀고 먼 우주에까지 가닿은 시공의 절정!”이라는 감탄이 터져 나오는 게 아니겠는가. 이렇게 일출 순간을 가쁜 호흡과 역동적 프로세스로 일구어낸 작품도 퍽 드물지 않을까 한다. 시인은 자신의 심미안으로 바라본 “물의 실핏줄”과 “온몸으로 퍼지는 몽환”을 통해 지금이 마치 “메타버스의 문을 여는 첫새벽”인 것처럼 느낀다. 부리가 붉어진 새의 입맞춤처럼 전해진 그 “고도의 음파”가 첫 해돋이를 “사랑의 아바타, 특강 형식”으로 인지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렇게 김계영에게 신성한 것은 묘사의 구체성과 만나 ‘시적인 것’을 이루어간다. 그는 다양한 자연의 모습 속에 숨겨진 신성한 것들에 귀 기울이면서, 지상에서의 삶을 견디고 치유하는 상상적 경험을 치러간다. 그것은 태양의 황홀에 전율하면서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세계이고, 삶의 의미가 모호해진 시대에 찾아 나선 시원始原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세계는 “흰 구름 한 자락 끌어와 대지의 꿈을 색칠”(「대륙의 끝에 서서」)하는 시인의 내면세계이자 “세상 어느 바람도 푸른 마디를 꺾지”(「거듭나는 선물」) 못할 것임을 예감하는 시인의 다짐을 유추하게끔 해주는 성장 리듬이기도 할 것이다.

(중략)

4.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탐색과 사랑의 힘
나아가 김계영 시인은 사물에 대한 지극한 관조와 그것의 감각적 재현 그리고 그것을 인생론적 정점으로 유추해 내는 상상력의 연쇄 과정을 풍요롭게 보여준다. 더구나 스스로의 마음은 비워냄으로써 그는 자신만의 서정적 극점을 이루어간다. 따라서 그의 시를 읽는 것은 그 비워진 터에 독자 자신의 기억을 풀어 넣어 행간에 숨겨진 서사를 은밀하게 재구성하는 과정을 수반하게 된다. 그만큼 김계영의 시는 의미를 설명하는 쪽이 아니라 암시하는 쪽에 있고, 세계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가지는 시간의 마디들을 개방적으로 배열해 가는 방향을 취한다. 그러한 독자적 원리를 깔고 있는 김계영의 시편들은 삶의 가파름을 견디고 넘어서는 결기와 의지를 스스로에게 허락하고 있다. 정성스럽게 그러한 원리에 귀 기울이는 시인의 모습을 통해 우리도 사물의 단순한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현실의 폐허를 견디게끔 위무慰撫하는 그의 속 깊은 시편들을 만나게 된다. 그 안에는 나이 들어가면서 느끼는 인생론적 지혜도 출렁이고, 일종의 공공적 기억을 불러오는 윤리적 언어도 제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이때 시인은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탐색과 그것을 사랑의 힘으로 완성해 가는 과정을 환하게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쉰 살이 넘도록
세상을 안으로만 끌고 가는 여자의 향기는 어떤 색일까
찾아온 남자는
색칠을 하다 하다 감정이 눈뜬 줄기로 남았대

상상의 공간에서
보여주는 공간으로 옮긴 식물성의 자취를 본다

비밀 창고를 들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며
당혹감에 놀라기도 하면서
얼마나 그리고 덧칠해야
서로의 진짜배기 그림이 될지 모르겠다며 수줍어하다
남과 여
꽉 찬 그림 앞에 앉는다

굵은 점 하나를 찍는 그들은
다시 시작점이다
― 「연인들의 기도」 전문

여기서 기도의 주인공인 ‘연인들’은 “쉰 살이 넘도록/세상을 안으로만 끌고 가는” 여자와 그녀의 향기를 찾아와서는 “색칠을 하다하다 감정이 눈뜬 줄기”로 남아버린 남자이다. 이 중년 이후의 남녀는 “비밀 창고를 들킨 것은 아닌지”를 고백하면서 “얼마나 그리고 덧칠해야/서로의 진짜배기 그림이 될지”를 수줍어한다. 그렇게 수줍은 고백을 통해 “꽉 찬 그림 앞에 앉는” 순간, 그들은 “굵은 점 하나”를 찍으면서 “다시 시작점”을 맞는다. 이 시작점이야말로 “어떠한 떨림에도/흔들리지 않는 소중하고도 귀한 것”(「아린」)과 “가끔은 미완성이 아름다울 때가 있다고/마음을 다독이는 것”(「빛이 된 시」)이 얽힌 사랑의 기도로 한없이 번져간다. 이러한 예술적 감각에 감싸인 연인들의 기도야말로 ‘시인 김계영’이 써가는 서정시의 은유이자,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인생론적 결단과 선택과 지혜가 농축된 의지이기도 할 터이다.

(중략)

5. 사라지지 않을 그대 이름, 시인
지금까지 우리가 천천히 읽어왔듯이, 김계영 시인은 자신의 오랜 기억에 남은 시간과 함께 삶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사유를 수행해 간다. 그는 시간과 시간 사이의 마디를 관조하면서 뭇 사물이 어울려 공존하는 지혜를 차근차근 얻어간다. 우리가 잘 알듯이, 인간 지성이 고양되면서 인간은 우주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지만, 가장 근원적인 사유와 감각은 우주로부터 얻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엄연한 진실이다. 그 점에서 김계영 시인은 이 시대에 가장 긴요하고 귀한 역설의 사유 방식을 보여준 것이다. 그 안에서는 근원적 가치들이 결핍과 불모의 기억을 수습하면서 화석처럼 남은 기억을 심미화해 준다. 이로써 여러 존재자들의 구체적 실존을 노래하면서도 지상의 모든 생명들을 따뜻하게 감싸안는 시인의 품이 완성된 것이다. 이처럼 김계영 시인은 순수 원형을 회복하고 새로운 존재론을 지향하는 언어를 통해 삶을 향한 역설적 지혜와 시에 대한 본원적 사랑을 노래해 간다. 자연과 인간, 우주와 지상 사이의 소통과 친화를 경유하여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탐색과 사랑의 힘을 아름답게 보여준 것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모든 사물은 세월의 풍화를 겪으면서 차츰 소멸되어 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소멸의 실재들이 또 다른 생성을 준비하는 불가피한 방식이라는 것을 또한 잘 알고 있다. 아니 소멸의 심층에 오히려 생성의 기운이 충실히 움트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 한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완전하게 고립된 단독자單獨者가 아니라 서로의 몸에 각인되는 상호 결속의 존재자임을 강렬하게 알려주지 않는가. 김계영 시인은 이러한 생성과 소멸의 연결 구조를 환하게 드러내면서, 사물들이 내면의 적정한 은유적 형상을 구축해 가고 있음을 증언한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존재 전환을 꾀하면서 현실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비록 순간적이지만 그렇게 새로이 펼쳐진 시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은, 상상적 확장을 통해 다양한 사물이나 풍경들로 그 권역을 넓혔다가 다시 스스로를 향한 회귀적 과정을 밟아간다. 이러한 사물과 삶의 유추적 연관성을 선명하게 노래한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우리는 다양하고 심원한 그의 미학을 훤칠하게 만나보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구심과 원심의 결합을 통해 성취된 균형 감각의 산물이기도 하고, 깊은 음역과 넓은 상상력의 변형적 결실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사라지지 않을 그대 이름/시인”(「십일월의 시인에게」) 김계영은 오롯한 예술적 성과를 담아낸 이번 시집을 넘어 앞으로도 새로운 존재론적 심연을 한없이 펼쳐갈 것이다. 김계영 시인의 시집 상재를 마음 깊이 축하드리면서, 더욱 심원한 미학의 세계를 개척해 가기를 또한 소망해본다.

*시인의 말

어떤 신호가 내 곁을 스쳐 가도
금방 진실을 말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시란 것도 때로는 그렇지만
쓰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와 시어를 낚아챘을 때 기쁘다

진실이란 말이 허무한 속임수로 들리더라도
숨을 찾아서
소망을 걸어보면서
오롯이 시 한 편을 쓰는 이유다

소중한 가족이 지켜봐 줘 늘 감사하다

2026년 깊은 여름
초월당에서 김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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