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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동의 서
양장
고현심
황금알 2025.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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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알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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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부 파동波動의 거울

시간의 가장 처음 - 파동의 서 1·12
검은 화면 - 파동의 서 2·13
귤빛 병상 - 파동의 서 3·15
침묵의 무게 - 파동의 서 4·17
가슴에 핀 검은 꽃 - 파동의 서 5·18
초음파의 사유 - 파동의 서 6·19
손과 눈빛 1. 2 - 파동의 서 7·20
작은 호흡 - 파동의 서 8·23
영상의 한계 - 파동의 서 9·24
마음의 창문 - 파동의 서 10·25
장기臟器들의 노래 - 파동의 서 11·26
생명의 합창 - 파동의 서 12·28
척추에 숨은 도요새 하나 - 파동의 서 13·30
파동의 거울 - 파동의 서 14·32
유한有限의 서명 - 파동의 서 15·33

2부 또다른 시간

거울 앞에서 - 파동의 서 16·36
어느 환자의 고백 - 파동의 서 17·37
거울 - 파동의 서 18·39
시간의 문턱 - 파동의 서 19·40
경계 너머 - 파동의 서 20·41
낙엽 애상 - 파동의 서 21·42
침향沈香 - 파동의 서 22·43
나무 - 파동의 서 23·45
경계 위에서 - 파동의 서 24·47
함께 건너기 - 파동의 서 25·48
또 다른 시간 - 파동의 서 26·49
다시 시작 - 파동의 서 27·51
초음파의 고백 - 파동의 서 28·52

3부 마음 머무르는 자리

어머니의 여름·54
하루를 여는 문·56
어머니가 그리운 날·57
노래를 찾는 사람들 - 카노푸스 사람들의 이야기·58
바다의 노래 - 파도에 전하는 드림사운드 소리·60
생자生子 이생진 1·62
퐁낭의 속삭임·64
언젠가는·66
노루발·68
연극·69
그런가 보다·70
낙엽과 색소폰과 중년·72
미술관 그늘 호랑거미 - 이왈종 미술관 살이·74
식탁의 시간들·75
어쩌다 살아가는 이유·76
꿈꾸는 위족·78

4부 섬의 노래

서귀포 문섬·80
천지연 - 물의 맹세·82
자구리 1·84
바람의 풍경·85
삼소굴 풍경·86
가을비는 내리는데·88
바람도 때론 앓는다·89
동백 향유香油·90
용눈이·91
세모에 피는 장미·92
차에서의 사색·93
포구의 그림자·94
햇살 품은 봄·96
출항·98
바람은 잠들지 않는다·100
숲의 고요 1·101

해설| 강영은-누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는가-파동波動의 시학, 돌봄의 윤리·102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11월 28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128*210*20mm
ISBN13
9791168151338

책 속으로

아직 이름 없는 원이
심장을 연습하며
세상의 문을 두드린다

나는 엿듣는다
검은 화면에서 울려오는 소리

태초에 태어나지 않은 아가의 첫 시가
흔들리는 파동마다
비밀처럼 기록되고 있다

나는 엿듣는다-
시간의 가장 처음에서
은밀하게 타진해오는 생명의 언어를
--- 「시간의 가장 처음- 파동의 서 1」 중에서


빛을 가린 방
한 사람이 조용히 누워 있다
얇은 숨결
차가운 젤이 피부 위로 번진다

탐촉자가 천천히 지나가자
검은 화면 위
잔물결 같은 파동이 번진다

간, 췌장, 비장, 신장 -
고요한 세계가 서서히 드러난다

나는 그곳에서
말 없는 언어를 읽는다
숫자도 흑백의 영상도 아닌
살아 있는 고요

간, 췌장, 비장, 신장 -
고요한 세계를 더듬을수록
나는 한 존재의 고독과 마주한다

그 고독은
삶이 스스로를 지켜낸 흔적이었다
--- 「검은 화면- 파동의 서 2」 중에서


가을이 깊어간다
귤 향이 문득 방안을 감싼다

햇빛에 그을린 얼굴 위로
귤빛이 천천히 번진다

통증은 익어가는 귤처럼
느리게 또 깊게
진통제 한 알로 버티던 계절
가지 끝이 조용히 흔들린다

수확이 끝나고서야
그는 병원으로 왔다
간에 주먹만 한 덩어리
눈이 노랗게 물 들어간다

초음파실 어둠 속
나는 그의 간을 따라
빛과 그늘의 경계를 더듬는다
나는 귤을 까듯이 마음을 벗기다
눈물 한 알 떨어뜨렸다

내 친구 같은 그
입술이 붓는다
말 한 조각,
아직 따지 못한 귤처럼 남아있다
--- 「귤빛 병상 - 파동의 서 3」 중에서


그 사람은 침묵한다

눈빛은 바닥없는 어둠에 잠기고,
얇은 숨결은 부서지듯 이어지며
방 안 가득 고독을 흩뿌린다

그 순간
나는 기계 앞에 선 의사가 아니라
그의 고독을 손끝으로 더듬는 사람이 된다

영상에 담기는 것은
몸의 그림자일 뿐

그 뒤편에 겹겹이 쌓인 절망과 기다림
희망과 두려움이 동시에
나를 향해 묵묵히 흘러온다

나는 안다
이 침묵은 단지 한 몸의 기록이 아니라
존재가 남겨놓은 단단한 옹이임을
--- 「침묵의 무게- 파동의 서 4」 중에서


“저기, 내 가슴에
검은 구멍이 보이네요”

톱니를 두른 작은 혹 하나
겹겹이 쌓아 올린 추억의 가슴 후비며
스멀스멀
검은 연기 피워 올린다

다 늙어 보지도 못한 불공평한 시간
발끝에 검은 그림자 길게 드리우고
아직도 푸른빛 가득한 가슴에
똬리를 튼다

구멍 뚫린 가슴 꽃잎처럼 시들어질까
물 끝 석양 같은 낙엽 되어 사라질까

오늘도
검게 구멍 뚫린 가슴
푸른빛으로
채색하고 또 채색한다
--- 「가슴에 핀 검은 꽃- 파동의 서 5」 중에서


초음파의 흑백 영상은 단지 그림자가 아니다
그 속에는 삶이 스스로 남겨놓은
시간의 기록이 있다
어둠은 깊은 곳에서 자라고
빛은 틈새마다 스며든다
몸은 그 사이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나는 파동의 떨림 속에서
한 존재의 경계를 본다
그 경계는 사라짐의 문턱이 아니라
다시 살아남으려는 몸의
미세한 몸짓

몸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병을 찾는 일이 아니다
존재가 견뎌낸
시간의 결 속에 남겨진
하나의 흔적과 마주서는 일이다
--- 「초음파의 사유- 파동의 서 6」 중에서


1.
빛을 가린 방
그는 고요히 누워 있었다

내 시선이 화면을 더듬을 때
그의 눈빛은 먼 곳을 응시하며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초음파 탐촉자가 지나가는 순간
살짝 떨리는 손등 위로
파란 혈관이 가늘게 솟아 있었다

그 미세한 맥박은
흑백의 영상 속 잔향처럼
오래도록 조용히 엿들었다

그 눈빛 속에서
두려움과 기다림을,
그 손끝에서
삶을 붙드는 작은 힘을 느꼈다

2.
눈빛은 언제나
말보다 앞서 존재의 깊이를 드러낸다

그 한 줄기 응시는
빛을 향한 갈망이자
자신의 끝을 마주하는 침묵

손은 몸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끝내 포기하지 않는 힘을 품는다
가늘고 약한 떨림조차
삶을 붙들려는 마지막 증언

눈빛은 미래를 묻고
손은 현재를 붙든다

손과 눈빛
그 두 겹의 힘으로
존재는 세상을 붙든다

--- 「손과 눈빛 1. 2 - 파동의 서 7」 중에서

출판사 리뷰

30여 년 동안 영상의학과 전문의로 살아오며
나는 초음파의 심연 속에서 수많은 생의 진동을 들었다.
눈에는 빛으로, 귀에는 파동으로, 마음에는 침묵으로 스며드는 그 순간들은
한 생의 시작이자 끝을 예감하는 고요한 울림이었다.

그 장면들을 과학의 언어로 읽어 왔지만, 그 너머에는
언어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목소리가 있었다.
희망과 두려움, 기쁨과 슬픔이 한 화면 속에서 번지며 교차할 때,
나는 그 떨림 속에서 시의 기원을 느꼈다.

의학이 몸의 언어를 읽는 일이라면,
시는 마음의 언어를 듣는 일이라 생각한다.
오랫동안 몸의 내부를 들여다보며 깨달은 것은,
그 안에는 언제나 말로 닿을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제 그곳에서 피어난 파동의 잔향을
시의 언어로 전하고자 한다.

긴 시간 곁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함께해준 가족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당신들의 따뜻한 존재가 있었기에
나는 오늘의 시를 쓸 수 있었다.
이 시집의 파동들이 독자의 마음에도 고요히 스며들어,
각자의 내면 깊은 곳에서 또 다른 울림으로 번져가길 바란다.

2025년 가을
서귀포에서 고현심


누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는가
- 파동波動의 시학, 돌봄의 윤리

강영은(시인)


이 해설은 고현심의 첫 시집 『파동의 서』를 파동의 시학과 돌봄의 윤리라는 두 축으로 읽는다. 제주에서 태어나 현재 의사로 일하는 시인은 2016년 등단 이후 초음파 진단실의 검은 화면 앞에서 매일 마주한 미세한 떨림과 침묵을 언어로 번역해 왔다.

이 시집에서 ‘파동’은 (1) 몸의 내부를 비추는 기술적 현상, (2) 타자의 고통에 다가가는 청취의 태도, (3) 세계를 재배열하는 이미지의 규칙으로 삼중화된다. 초음파실의 검은 화면에서 출발해 섬의 바람과 물결의 결로 이어지는 이 파동의 시학은 시인이자 의사로서의 삶을 집약한 시의 원리이자 돌봄의 윤리로 귀결된다.

구성은 1부 「파동의 거울」, 2부 「또 다른 시간」, 3부 「마음 머무르는 자리」, 4부 「섬의 노래」로 이어진다. 진단의 방에서 출발한 파동은 ‘끝은 곧 시작’이라는 시간을 통과해 기억과 살림으로 번역되고, 마침내 섬의 장소성과 공동의 호흡으로 확장된다.

본 해설은 주요 시편을 따라 ‘파동’이 기술에서 관계로, 청취에서 돌봄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추적한다. 각 부의 관문이 되는 작품을 중심으로 그 전환의 장면들을 짚어, 초음파의 떨림과 섬의 바람·물결이 맞닿는 지점에서 독해의 발판을 놓고자 한다.

1. 파동의 시학-진단의 방

1부는 진단의 방에서 시작하지만, 곧 보는 기술을 듣는 태도로 전환하는 선언부다. 초음파의 검은 화면에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윤곽과 수치가 아니라, 잔물결 같은 파동과 그 뒤에 남는 침묵의 밀도다. 시인은 판독이 아니라 청취를, 결과가 아니라 관계를 선택한다. 화면이 드러내는 것은 사물의 경계edge이지만, 시가 더듬는 것은 삶의 결grain이다. 요컨대 1부의 질문은 단순하다. “무엇을 보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들을 것인가?”이다. 시집의 문을 여는 「시간의 가장 처음」을 보도록 하자.

아직 이름 없는 원이
심장을 연습하며
세상의 문을 두드린다

나는 엿듣는다
검은 화면에서 울려오는 소리

태초에 태어나지 않은 아가의 첫 시가
흔들리는 파동마다
비밀처럼 기록되고 있다

나는 엿듣는다-
시간의 가장 처음에서
은밀하게 타진해오는 생명의 언어를
- 「시간의 가장 처음-파동의 서 1」 전문

「시간의 가장 처음」은 ‘태명’ 이전의 생, 곧 존재의 원형을 청취의 행위로 잡아낸다. ‘아직 이름 없는 원圓’과 ‘심장을 연습’하는 장면은 탄생의 파원波源을 시각·청각의 겹 이미지로 제시하고, 반복되는 “나는 엿듣는다”는 의학적 판독을 청취의 윤리로 전환하는 선언이 된다. ‘검은 화면’은 초음파 장치이자 태초의 어둠을 환기하는 기원 공간으로, 그 속에서 “울려오는 소리/ 흔들리는 파동/ 아가의 첫 시”가 비밀스레 기록된다. 여기서 ‘기록’은 의무기록, 초음파 프린트, 기억, 유전자까지 공명하며, 말 이전의 리듬을 문자로 번역하려는 시의 과업을 드러낸다. 화자는 개입을 최소화한 경청의 번역자로 자리하며, 이 첫 시는 시집 전체의 미학-보는 기술보다 듣는 태도-을 미리 서약한다. 이어지는 「검은 화면」은 기술의 앞에서 침묵과 고요의 두께를 한 겹 더 밀어붙인다.

1부의 마지막 시 「파동의 거울」은 이 시집이 세운 돌봄의 윤리를 문장으로 확정한다.

파동은 한 몸을 비추지만
그 빛은 언제나 한계를 넘어선다
환자의 침묵은
나의 시선을 붙들고
나의 응시는
그의 어둠을 더듬는다

우리는 서로를 비추며
한 인간의 울음을 넘어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소리에 닿는다
영상은 한계에 머물지만
그 한계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 된다

그 거울 앞에서
나는 깨닫는다
파동은 단지 검사 결과가 아니라
삶과 삶이 서로를 비추며 남긴
깊은 상처임을
- 「파동의 거울-파동의 서 14」 전문

이 시에서 “파동은 한 몸을 비추지만/ 그 빛은 언제나 한계를 넘어선다”는 구절은, 영상이 개인의 신체를 겨냥하더라도 그 빛이 결국 나-너의 사이를 건너며 관계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환자의 침묵이 화자의 시선을 붙들자, 응시는 판독의 권력에서 어둠을 더듬는 동행으로 전환되고, “우리는 서로를 비추며… 생명의 소리에 닿는다”는 진술은 진단이 수치로 닫히지 않고 상호비춤의 자리로 열림을 알린다.

“영상은 한계에 머물지만/ 그 한계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 된다”는 인식은 기술의 제한을 결함이 아니라 머묾과 겸허의 출발점으로 바꾼다. 끝의 “파동은… 검사 결과가 아니라/ 삶과 삶이 서로를 비추며 남긴/ 깊은 상처”에서 ‘상처’는 실패가 아니라 서로의 삶이 남긴 기록(각인)이다. 요컨대 이 시가 가리키는 돌봄은 보기보다 듣기, 판독보다 공명, 해답보다 함께 머무는 태도에 가깝다. 이로써 1부는 ‘보는 기술’에서 ‘듣고-더듬고-번역하는’ 윤리로 방향을 틀고, 2부의 주제인 거울과 응시의 상호성을 예비한다.

이상에서 보듯 1부는 ‘보는 시학’이 아니라 ‘듣고, 더듬고, 번역하는 시학’의 선언이다. ‘보지 못하는 것, 다 듣지 못하는 것’을 안다는 데서 비로소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깨달음이, 1부의 마지막 문장-“파동은 단지 검사 결과가 아니라/ 삶과 삶이 서로를 비추며 남긴/ 깊은 상처임을”-처럼 오래 잔향을 남긴다. 파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고현심의 시를 통해 조금 느리게, 그러나 더 가까이, 서로의 살아 있는 리듬을 듣는다.

마음이 머무르는 자리-기억의 파동

3부에서 파동은 임상의 기계음이 아니라 생활의 숨결로 들린다. 의사의 손과 환자의 침묵 사이에서 진동하던 빛은, 이제 부엌의 등불과 마루의 결, 오래된 베개의 눌림과 같은 사적 사물의 촉감으로 번역된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모성의 기억이 있다. 한 사람의 생애를 붙들어 준 손, 계절마다 색을 달리하던 옷감, 장마의 빗방울에 번져 나가던 파문, 그 모든 것이, 초음파의 파형처럼 우리의 내면에 퇴적된 리듬으로 되살아난다.

“인생의 등짐 지고 환갑의 시간을 건너오니/ 퐁낭의 뿌리 같은 몸이/ 나지막이 속삭인다./ “이제는 인정하렴, 쉬면서 가도 된다” - 「퐁낭의 속삭임」 부분

“한 번 길을 찾은 바늘은 능숙하게 제 길을 간다// 30년 세월 세상풍파 헤치며 지친 걸음 걸어오느라/ 상처받고 헤어진 마음, 노루발 밑에 내려놓는다” - 「노루발」 부분

“가을바람에 뒹구는 낙엽 사이로/ 서걱서걱 속삭이는 바람 소리/ 굵직하고 애잔한 색소폰 소리마냥 귓가를 스친다/ 바람과 낙엽과 가을의 소리”
- 「낙엽과 색소폰과 중년」 부분

“우리는 오늘도 노래한다/ 노-래-한-다// 자구리 해안가에서/ 진성옛터에서/ 천지연 물안개 사이에서// 바닷바람과/ 부서지는 파도 소리/ 그 소리를 반주 삼아
- 「노래를 찾는 사람들-카노푸스 사람들의 이야기」 부분

「퐁낭의 속삭임」에서 “이제는 인정하렴, 쉬면서 가도 된다”는 말은 병명 대신 건네는 돌봄의 허가이고, 「노루발」의 “한 번 길을 찾은 바늘은 능숙하게 제 길을 간다”는 구절은 흩어진 마음을 한 땀 한 땀 봉합하는 손의 리듬을 은유한다. 「낙엽과 색소폰과 중년」에서 가을바람과 색소폰의 숨이 겹쳐질 때, 의사의 청진의 듣기는 연주자의 나눔의 듣기로 변주된다. 실제로 고현심 시인은 드림사운드에서 활약하는 색소폰 연주가이기도 하다, 이어 「바다의 노래-파도에 전하는 드림사운드 소리」에서 “세월이 스며든 숨결”이 금빛 관을 타고 별빛에 닿는 순간, 사적인 상흔은 공동의 음색으로 승화한다. 자구리 해안과 천지연 물안개 사이로 울려 퍼지는 파동은 병실에서 해안으로, 개인의 울음에서 공동의 합창으로 공간을 건넌다.

이처럼 3부는 몸의 내부에서 시작된 파동을 생활의 촉감과 모성의 기억으로 번역해, 돌봄을 ‘치료’의 기술이 아니라 ‘살림’의 역사로 환원한다. 유년의 냄새, 사물의 질감, 느린 손놀림이 한데 포개지며, 상처는 비밀스런 통증이 아니라 살아남음의 습관으로 바뀐다. 그리고 이 조용한 진동은 곧 문밖으로 번진다. 즉, 기억의 방에서 배운 호흡은 4부로 건너가 섬의 지형과 바다의 박동을 만나며 장소의 합창으로 확장된다. 이제 파동은 한 몸의 기록을 넘어 한 섬의 노래가 된다.

섬의 노래-장소의 파동과 공동의 합창

거울 앞에서 배운 응시의 상호성과 기억의 리듬은 4부에 이르러 장소의 호흡으로 바뀐다. 초음파의 파형이 파도로, 진료실의 낮은 조도가 서귀포의 밤하늘과 물안개로 환치되며, 한 몸의 울음은 공동의 노래로 변주된다. 여기서 ‘파동’은 더는 개인의 내면에 머물지 않는다. 암층과 바람결, 포구의 손놀림과 맞물려, 또 다른 시간의 깊이로 확장된다. 4부는 이 책의 바깥을 담당하지만, 사실상 가장 깊은 심층의 장이다. 우리는 자연의 리듬 속에서 인간의 리듬을 다시 배우고, 개인의 서사가 공동의 합창으로 건너가는 순간을 목격한다.

한라의 숨이 식은 자리 불의 파편 하나, 파도는 너를 깎고 바다는 너를 지우려 했지만 너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무릎 아래 산호의 물빛 정원, 작디작은 생명들이 우주를 유영하듯 춤추고 후박나무 잎새는 검푸른 숨결로 별을 불러 내린다

사람들은 모기섬이라 부르지만 나는 너를 기억한다 백록담에서 내려온 흰 사슴 한 마리, 네가 뛰어내린 그 자리엔 계절이 다른 얼굴로 숨을 쉰다

봄이면 모자반이 갈색 바다 숲을 이루고 여름이면 연산호가 바다 정원에서 물꽃을 피운다

가을엔 갈치배 조어등이 네 윤곽을 더욱 선명하게 하고 겨울이면 백록이 너의 이마에 눈송이처럼 내려앉는다

침묵으로 바다를 지키는 너, 서귀포 풍경 속, 푸른 파도 위에 솟은 서귀포의 수호섬, 오늘도 그렇게 서 있다
- 「서귀포 문섬」 전문

“한라의 숨이 식은 자리 불의 파편”으로 시작하는 이 시는 섬의 기원-지질학을 호출하며 스케일을 넓힌다. 바다는 너를 지우려 하지만 섬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지속의 형상으로 남고, 무릎 아래 “산호의 물빛 정원”과 “후박나무 잎새”는 미시적 생명의 무도회를 펼친다. 대중적 별칭 ‘모기섬’과 시인이 불러내는 전설의 백록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장소는 편의의 호명에서 벗어나 기억의 고유명으로 복권된다. 4부는 이렇게 지층(심층)과 표면(생활)을 한 화면에 포개며 열린다.

세모에 몰아친 광풍과 대설
하얗게 눈 입은 한라산 끝자락
어머니의 품 같은 서귀포 항구로 피항했던 배들

구름 속으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햇살과
갈매기들의 배웅을 받으며
파도를 가르고 만선을 향해 다시 출항한다

긴 뱃고동 소리는 없어도
출항하는 어부들의 희망찬 손끝에
무거운 그물은 다시 가벼워지고
새해 첫날의 기운은
출항하는 엔진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 넣는다

망망대해 모진 풍파
뭍에서의 하루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
그물 걷어 올리는 거친 어부의 손이 우리에게도 있어
수고와 땀으로 이루어지는 하루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여정
꼬닥꼬닥 걸어 나가리

인생의 만선을 위해
- 「출항」 전문

‘세모’라는 시간의 문턱에서 ‘만선’이라는 희망의 지평으로 나아가는 이 시는, 광풍과 대설을 견딘 뒤 “어머니의 품 같은 서귀포 항구”에 피항했던 배들이 다시 바다로 나서는 복귀의 윤리를 그린다. “긴 뱃고동 소리는 없어도”라는 구절이 핵심이다. 의례적 신호 대신 “어부들의 희망찬 손끝”이 무거운 그물을 가볍게 만드는 장면에서, 공동의 노동이 곧 엔진의 동력으로 전환된다. 파동波動의 시학은 여기서 엔진의 진동, 노동의 박자로 체화된다. “망망대해 모진 풍파/ 뭍에서의 하루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는 진술은 바다의 서사가 곧 생의 보편임을 확인한다. 파도와 시장市井, 그물과 생업, 배와 일상의 몸이 동형을 이룬다. 따라서 “그물 걷어 올리는 거친 어부의 손이 우리에게도 있어”라는 문장은 풍경 서술을 넘어 자기 지시가 된다. 바다를 견디는 방식이 우리 각자의 하루를 견디는 방식이라는 자각. 말미의 ‘꼬닥꼬닥’은 이 시의 키워드다. 서두르지 않되 포기하지 않는 작고 단단한 보폭이 축적되어 ‘만선’이라는 충만에 이르는 과정, 곧 이 시집의 윤리를 한 단어로 요약한다.

이렇게 4부는 “한 몸의 기록”을 “한 섬의 기록”으로 확장하며, 개인의 울음이 공동의 노래로 변주되는 노동의 합창을 들려준다. 불의 파편(지질)-물의 맹세(관계)-별의 좌표(항해)-바람의 문법(기억)-노동의 리듬(생활)으로 이어지는 사슬 속에서, 파동은 기술의 출력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속시키는 호흡임이 드러난다. 이 결은 2부의 명제 “끝은 곧 시작”을 조수潮水의 문법으로 체감하게 하고, 3부의 물음 “누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는가”에 섬이라는 응답을 돌려준다.

나가는 말

『파동의 서』의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알게 된다. 진단의 방에서 들리던 그 파동이 결국 바다의 노래로 이어져 우리 모두의 시간을 밀어 올린다는 것을. 이 울림을 채록採錄하는 고현심의 문장은 절제된 흑백의 대비를 선호한다. 초음파 영상의 언어와 정확히 상응하는 선택이다. 그는 흑/ 백, 빛/ 그늘, 보임/ 가림 사이의 틈을 서둘러 봉합하지 않고 ‘작은 호흡’과 ‘고요한 세계’의 느린 리듬에 말을 맞춘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명명命名보다 기술記述을 택하는 태도다. 병명과 질환을 앞세우기보다 손과 눈빛, 젤의 냉기, 화면의 물결 같은 주변 감각을 전면에 두어, 독자를 ‘의학의 시’가 아니라 ‘존재의 시’로 이끈다. 이 시집이 해체하는 것은 전능한 영상의 신화이고, 세우는 것은 겸허한 청취의 윤리다. 파동은 결과표가 아니라 관계의 사건이며, 거울 앞의 응시는 일방의 권력이 아니라 상호주관성의 훈련이다. 그러므로 『파동의 서』는 기술技術의 기록이 아니라 관계의 기록이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말의 속도를 늦추는 자만이 거울이 되어 준다. 파동은 한 몸을 비추되 그 빛은 언제나 우리 사이를 건너 개인의 울음을 공동의 노래로 바꾼다. 문섬의 암층과 천지연의 물소리, 자구리의 별빛과 포구의 손놀림, 바람과 출항의 이미지가 한 권의 리듬으로 묶이며, “끝은 곧 시작”이라는 시간의 진술을 삶의 기술로 바꾼다. 따라서 『파동의 서』는 의학적 증언록이 아니라, 인간의 유한성을 마주하며 서로의 거울이 되어 가는 과정을 기록한 생명의 윤리학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의 파동을 나누며 “같은 강을 건너는 존재”이고, 검은 화면 앞에서 “남겨진 울림을 듣”는 자들이라고. 덧붙여, 첫 시집을 세상에 띄우는 고현심 시인께 격려를 보낸다. 진단의 방에서 시작된 ‘듣기’가 바다의 노래로 건너와 한 권의 파동이 되었듯, 이 잔물결이 더 많은 독자의 호흡과 만나 오래 머무는 합창이 되기를. ‘꼬닥꼬닥’ 걸어온 단단한 보폭이 앞으로도 꺼져가던 불씨들을 다시 노래하기를.

추천평

의사이자 시인인 고현심의 첫 시집 『파동의 서』는 초음파의 파동 속에 숨은 생명의 진동을 시로 옮긴 깊은 성찰의 기록이다. 병실의 어둠과 흑백의 영상 속에서 그는 인간 존재의 고통과 회복, 생과 사의 경계를 응시하며 ‘살아 있음은 하루하루의 기적’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초음파는 그에게 단순한 진단이 아니라 영혼의 언어이며, 몸속의 파동은 서로를 향한 공명으로 확장된다. 그러니까 대상에 대한 고통과 소멸을 응시하는 태도는 동일시되는데 시인의 내면에서 육화한다. 이러한 파동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지면서, 생명과 소멸이 공명으로 연대하고 대상과 합일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소멸해 가는 대상과 감응하는 곡비哭婢로서의 순연한 응시는, “먼지처럼 흩날”(「언젠가는」)리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언젠가는/ 햇살 속에 환히 빛”날 것을 희망한다. 그러나 “그 바램은 이슬처럼 증발되고/ 그 시간은 끝내 오지 않았다”라고 진술하면서도, “세월의 길목에 불을 밝”히듯, 다시 생의 불씨를 지핀다. 그 불빛은 오히려 무한한 생의 노래를 예비하는 시편들의 전개는 어머니의 기억, 제주의 바람과 바다까지 이어지고 있다. 의학과 시, 냉정함과 따뜻함이 교차하는 공간에서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자, 모든 존재가 서로를 향해 울리는 생명의 노래다. - 김영탁 (시인,『문학청춘』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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