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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살기
사과 한 알의 빛으로 진정한 저자 |
Helene Cix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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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란 신비를 건드리는 것이다. 신비를 짓밟아 진실에 반하는 일이 없도록 말의 끝으로 조심스레 만지는 것이다.
--- p.85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서 벗어나 뚜렷해져 가는 사물들이 만들어 내는 진동을 들어야 하는 때가 있다. 무관심에 대항해 싸우고 있는 사물들이 스스로를 들리게 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는 때가 있다. (…) 하나는 다른 하나/타자l’autre 없이 울려 퍼지지 않는다. --- p.21 이 밤 글쓰기가 내게로 왔다. 클라리시, 그 천사의 발걸음이 내 방 안에. 그녀의 천둥 같은 회녹색gris vert 목소리. 다시금 진실의 목소리, 빛의 목소리, 진실의 일격이 내 방 사막 안에 도달했다. 나의 천사는 나와 씨름했다. 내 가난의 천사, 클라리시 그녀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가난의 도취시키는grisant 부름이. 나는 씨름했고, 그녀는 나를 읽었다. 그녀의 글쓰기가 일으키는 불길 속에서, 나는 그녀가 나를 읽게 했다. 그녀는 내 안에서 자신을 읽었다. 그곳은 걸음마를 시작하기도 전, 사물들을 향해 손을 뻗기도 전 내가 살았던 곳, 내 영혼의 바닥층이었다. 기호들이 지나갔다. 내 사막의 모래를 밟으며 여유 있고 균형 잡힌 발걸음으로 지나가는 기호의 부족들이 있었다. 그들은 내 가슴 사이의 모래에 씨앗을 뿌렸고, 수백만의 통과의 흔적들이 폭력 없이, 미소처럼 물러갔다. 나는 세계의 드넓은 사다리 아래 사랑의 천진함처럼 몸을 뻗어 누웠다. 나는 자지 않았다. 잠 위로 몸을 뉘였을 뿐, 나는 깨어 있었다. 나는 헤엄치지 않았다. 삶의 발치에서, 머리는 꿈의 반석 위에 올린 채, 나는 귀를 기울였다. --- pp.34-35 클라리시는 난초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녀가 존재들을 구원하는 방식에는 만 오천 종의 사랑이 있다. --- p.51 삶 이후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할까? 살지 않는 것이? 비非삶을 사는 것이? 역사는 그것이 가능함을 증명해. --- p.65 내가 로시니의 「탄크레디」와 탄크레디를 다룬 여러 작품들에서 흥미를 느꼈던 부분은 어떤 신비가 충분히 발전되지 않은 채로 주어진다는 점이었다. 여성인 만큼이나 남성이고 남성인 만큼이나 여성인 한 인물의 실존이라는 신비는 증거와 함께 제시되지 않으므로, 그저 울면서 들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글쓰기에서보다 음악에서 더 쉽게 표현되는 신비다. 왜냐하면 문법적으로 정확한 문장을 구성하고 알맞은 성별을 부여하도록 강요받는 텍스트와 달리, 음악은 언어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텍스트로 픽션을 쓰는 사람은 해명의 책임을 진다. 그러나 음악과 언어의 혼종인 시에서는 신비롭고 멈추지 않는 삶의 무언가가 발생할 수 있다. 문법이 전복되는 곳, 성 구분의 법칙에서 벗어나 혀/언어가 자유로워지는 곳, 시의 춤, 시의 안쪽, 시의 춤 안쪽, 그 운동하는 미소微少 세계, 프랑스어와는 전혀 다르게 말하는 시 안에서, 산문이 아닌 언어인 시는 단지 말하지 않고 언어와 함께 유희하며, 이는 노래로 표현되는 충동이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말하는 시는 언어 속에서 다른 언어, 꿈 언어를 발명하는 시들을 의미한다. 그러한 시는 랭보, 첼란, 만델슈탐, 츠베타예바의 들뜬 침묵에서 솟아 나와 자신을 매어 둔 밧줄을 끊어 내고…… 네모난 틀을 깨트린다…… --- pp.106-107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글에서는 앎에 관한 모든 교훈이 우리에게로 스며들어 오지만, 그것은 사는 법에 관한 앎이지 아는 법에 관한 앎은 아니다. 사는 법에 관한 첫 번째 앎은 알지 않는 법을 아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단순히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지 않는 법을 아는 것, 앎 속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 것,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많거나 더 적게 아는 것, 이해하지 않는 법을 아는 것, 결코 이편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을 말이다. 이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해 속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가 무엇인가 알게 될 때마다, 그것은 넘어서는 발걸음이 된다. --- p.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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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낯선 곳으로 바꾸는
주술 같은 글들이 퍼져 간다 엘렌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라는 개념을 창안한 뒤 줄곧 그 길에 따른 글쓰기를 추구해 왔다. 거칠게 요약하면 그것은 머리가 아니라 심장에서 출발하는 글쓰기로, 논리를 비롯해 우리 인간을 둘러싼 구조와 체계를 무너뜨리거나 그 너머로 날아가 낯설고 강렬한 직관들과 직접 연결되겠다는 결의로 다져져 있다. 이러한 글쓰기는 인간이 서로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언어를 그 이해 바깥으로 끌고 나오며, 그러한 과정을 함께하는 독자들 역시 미지의 세계로 끌고 간다. 이러한 낯섦이 주는 즐거움은 주로 시 언어의 특기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식수가 글쓰기에 관해 강의한 내용을 엮은 이전작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은 시에 익숙한 독자들은 물론, 생경한 에너지를 내뿜는 ‘기묘한 산문들’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도 많은 찬사를 받은 바 있다. 특히 그 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작품들은 최근 국내에 꾸준히 소개되면서 확고한 독자층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그 작품들 속에 담긴 종잡을 수 없는 에너지가 한국에서도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독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연대한 리스펙토르에게 바쳐진 찬양 『리스펙토르의 시간』은 식수가 오직 리스펙토르만을 다룬 세 편의 글을 모은 책이다. 그중 첫 번째 글 「오렌지 살기」는 극작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식수가 문학적 비유를 통해 작성한 리스펙토르 작가론이다. 여기서 식수는 리스펙토르의 스타일을 오마주하면서(혹은 원래 자신이 갖고 있던 ‘여성성’을 리스펙토르라는 촉매를 통해 극대화하면서) 시적인 비유로 논지를 전개하고, 이를 통해 여성적 글쓰기란 이해가 아니라 ‘직감’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강조한다. 실제로 이 글에는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기, 언어의 사회적 압력에 맞서기 등 다양한 논지가 들어 있지만, 이 모든 비평적 소재는 리스펙토르를 향한 식수의 시적 찬탄 속에 녹아 있다. 이 찬탄하는 문장들은 가톨릭(리스펙토르) 및 유대교(식수)의 정전인 성경을 떠올리게 하며, 이를 통해 독자는 식수가 자신의 뿌리를 어떤 식으로 (여성적으로) 전유했는지 확인하는 즐거움도 얻을 수 있다. 「오렌지 살기」의 에필로그이면서 이어질 글의 프롤로그로 작동하는 「사과 한 알의 빛으로」를 지나면, 이 책에서 가장 예리하면서도 뜨거운 내용을 담은 마지막 글 「진정한 저자」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식수는 「오렌지 살기」에서와는 달리 리스펙토르의 글을 직접 분해하고 비평한다. 특히 리스펙토르의 유작인 『별의 시간』 속에 형성된 여러 겹의 층위를 섬세하게 파고들면서 각각의 층을 하나씩 알려 준다. 식수는 『별의 시간』의 실제 저자인 리스펙토르와 그가 창조한 작품 속 저자 호드리구, 그리고 호드리구가 창조한 소설 주인공 마카베아 사이에 펼쳐진 복잡한 연결 고리를 분석하면서 ‘내’가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세계 속 다른 존재 혹은 지점과 연계된 존재임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여성적 글쓰기가 본질적으로 연대와 공존에 기반한 세계관을 갖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설파한다. ‘여성적 글쓰기’를 창안한 엘렌 식수 스스로 그 글쓰기의 전범이 되다 이렇게 이 짧은 책 속에서 식수는 스스로 여러 차례 모습을 바꾼다. 그는 리스펙토르를 받들어 찬미하는 자였다가 리스펙토르를 닮은 무엇이 되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권력에 희생당하는 소수자들과 같은 행성에 살고 있는 현대 지식인임을 계속해 자각하고, 비평 훈련을 받은 학자로서 소설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발견한 비의에 감화되어 다시금 종교적 열망에 휩싸이고, 그렇게 여러 차례 변환을 거듭하다가 심지어는 ‘우리’로 변하기도 한다. 이 책 속에서 식수는 자발적으로 계속 형태를 바꾸며 말씀을 전하는 매개체 혹은 전달자가 되며, 이는 성경에서 성령이 맡았던 역할과 닮았다. 어떤 텍스트에 얼마나 깊이 감화되어야 그 자신을 ‘말씀을 전하는 자’의 근본적 형태, 즉 성령과도 같은 형태로 변환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성령적 변신은 이 세상의 지배자들이 쓰지 않는(혹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언어-말씀을 통해 소수자들과 교통하기를 추구하는 여성적 글쓰기의 본분과는 얼마나 닮아 있을까? 『리스펙토르의 시간』은 자신이 주창해 온 글쓰기의 전범으로 직접 변신한 ‘글쓴이’가 세상에 전하는 열렬한 복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