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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제1장 프롤로그·실비아 플라스 제2장 자살의 역사적 배경 제3장 자살, 그 폐쇄된 세계 제4장 자살과 문학 제5장 에필로그·해방 원주(原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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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에 유난히도 마음 좋고 별로 격식을 차리지 않는 물리 선생님이 있었는데, 우스개 소리하는 투로 끊임없이 자살 얘기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그마한 체구에다 넓적하고 불그스름한 얼굴과 곱슬곱슬한 회색 머리칼로 뒤덮인 큼직한 머리통, 그리고 언제나 떠나지 않는 근심이 떠도는 미소를 가진 남자였다. 대부분의 동료 교사들과는 달리, 그는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자기 학과에서 수석을 차지했었다고 했다. 어느 날 한 수업 끝에 그가 넌지시, 누구든 목을 베어 죽으려는 사람은 언제나 세심하게 먼저 자기 머리를 자루 안에 넣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혼란이 남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 말에 아이들이 모두 웃었다. 이윽고 1시를 알리는 벨이 울리고 남자아이들은 모두 점심을 먹으러 떼 지어 나갔다. 물리 선생님은 자전거를 타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 자루에 머리를 넣고 그대로 자기 목을 베었다. 큰 혼란은 없었다. 나는 그때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 p.9~10 재앙이란 그것이 마침내 닥쳐 왔을 때에는 결코 예상했던 것만큼 극심하지 않은 법이다. 그녀도 그와 같은 안도감을 갖고 글을 쓸 수 있었으며, 심지어 앞으로 다가올 공포에 미리 선수 치기 위해서인 양 쓰는 속도도 빨라졌다. 그녀는 어느 면에서는 이 공포야말로 자신이 살아오면서 내내 기다린 것이며, 지금처럼 그것이 당도한 상황에는 그것을 스스로 이용해야만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파괴의 열정 또한 창조의 열정이다.” 미하일 바쿠닌은 말했다. 그건 실비아에게도 들어맞는 말이었다. 그녀는 분노와 고통의 감각을 일종의 축제로 바꾸어 놓았다. --- p.59 예술가의 창조 행위가 반드시 그를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볼 수는 없다. 즉 예술가가 자신의 환상을 표현한다고 해서 그 환상으로부터 자동적으로 해방되는 건 아니다. 창조라는 행위에 내재한 어떤 기이한 논리에 따르면, ‘형식을 빌려 표현하기’라는 방법론은 예술가가 저 심연에서 끌어올린 소재들에서 벗어나기는커녕 거기에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도와주는 장치일 수 있다. --- p.80 자살은 어쩌면 실패로 점철된 생애의 역사에 내리는 하나의 파산 선고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그 한 가지 결단으로 종결됨으로써 그 결단의 궁극성을 통하여 적어도 완전한 실패로부터는 벗어나게 되는 생애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종류의 최소한의 자유가, 자신이 고른 방식으로 자신이 선택한 시간에 죽을 수 있는 자유가, 원한 적 없었던 저 모든 숙명들로 인한 난파로부터 그 생을 구원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 때문에 전체주의 국가들이 그들의 반체제 인사들이 자살했을 때 ‘당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리라. --- p.157 사회란 고통스럽게나마 그리고 매우 느리게나마 개선돼 나가는 존재다. 다시 말해 사회는 본질적으로 인간성과는 무관하게 계속 성장한다. 스턴절 교수는 다음과 같이 문제의 핵심을 찌른다. “진화의 어떤 단계에서 인간은 짐승이나 동료 인간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음에 틀림없다. 그 이후로는 인간의 생이 전혀 다른 것이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 결국, 내가 보기엔, 제아무리 세련되고 그럴듯한 사회학적 이론들조차도 다음의 간단한 통찰로 인해 합선을 일으키고 만다. 자살이란 섹스와 마찬가지로 완벽한 사회조차 절대로 지울 수 없을 하나의 인간적 특성에 해당한다는 통찰 말이다. --- p.169 만델스탐은 다시 체포되어 시베리아 근처의 어느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죽었다. 그러나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자살하자는 아내의 의견에 반대했다. 그의 아내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자살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요. 종말이란 어디서나 똑같은 법인 데다가, 여기서는 그것 스스로가 서둘러 우리에게 오고 있지 않소.’ 죽음이란 그래서 그만큼 삶보다도 더 현실적이었고, 그만큼 더 간결해 보였어요. (...) 이 세상의 어떤 끔찍한 공포에 부딪혔을 때, 혹은 전혀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제들이 특히 강한 압력이 되어 우리를 짓누를 때, 그런 때는 항상 생의 본질이랄까, 그런 일반적인 문제는 뒤로 물러나 버리더군요. 세속의 현실적인 공포가 일상의 삶 속에 그처럼 뼈저리게 느껴지는 판국에 어떻게 자연의 위력이니 존재의 영원한 법칙이니 하는 것에 외경심만 품고 있겠어요? 이상한 결론일 수 있지만, 세속의 그러한 공포는 한편으로는 우리의 삶에 어떤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것 같아요.” --- p.225 |
이 책은 어떻게 40년 넘게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
자살을 다룬 책 가운데 꾸준히 읽히는 책을 만나기 어려운 건 무엇보다 사회과학 이론이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이다. 시대에 뒤처진 이론을 다루는 책은 수명을 다했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유행으로 따지면 가장 낡은 유행이라 할 수 있는 프로이트 심리학을 중점적으로 언급하는 이 책이 수십 년 동안 사랑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앨버레즈가 사회학과 심리학을 언급하면서 특정 이론을 겸손하게 소개하는 (즉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단계를 넘어섰기 때문일 것이다. 앨버레즈가 프로이트를 중점적으로 언급하는 건 그가 가장 옳아 보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프로이트가 이론적인 좌절을 많이 겪은 심리학자였기 때문이다. 번화한 빈에서 축성된 프로이트의 현실관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점점 무너졌고, 그는 그렇게 붕괴한 세계에 걸맞은 이론을 다시 설계해야 했다. 앨버레즈는 이러한 태도에 주목했다. 프로이트 이후의 심리학자들이 대개 자신의 이론을 신뢰하고 그것을 공고히 하려 했던 반면, 프로이트는 자신이 이룬 이론적 성취를 확신하지 않음(혹은 실패함)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사회-이론 안에 집어넣는 행위가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자살과 창작이라는 공동 운명체 이처럼 앨버레즈는 자살을 사회적 압력에 종속된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피해자로서의 자살자라는 개념은 그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문학 비평가이자 작가였던 앨버레즈가 몸담고 있던 예술계에서는 에너지가 넘치는 인물일수록 자살을 기도할 확률이 높았고, 그 사실은 자살이 때에 따라서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선택이기도 하다는 점을 암시했던 것이다. 즉 앨버레즈가 보기에 자살은 인간의 내적 에너지가 일으키는 여러 불꽃 가운데 하나였다. 실제 동료이자 친구였던 실비아 플라스의 자살을 되짚던 그는 마지막 자살 시도를 하던 당시의 플라스가 실제로는 죽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과감한 주장을 펼친다. 그때 플라스는 가상의 죽음을 겪어 냄으로써 스스로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리려 했다는 것이다. 앨버레즈에 따르면, 몇 가지의 불운이 아니었다면 플라스는 죽지 않았을 터였다. 실제로 죽으려 했을 때는 신기한 확률로 죽음을 피했고, 실제로 죽지 않으려 했을 때는 마찬가지의 낮은 확률로 죽음에 당도해 버린 아이러니. 플라스의 삶은 이처럼 아이러니한 운명(혹은 이 책의 원제인 ‘흉포한 신Savage God’)을 상대로 한 인간의 삶과 예술이 하나의 공동 운명체처럼 뒤얽혀 대항하는 모습을 그려 낸다. 이때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창작이나 마찬가지로 자신의 내면을 표출하는 행위가 되며, 따라서 자살은 세계에 대항하는 수단 가운데 하나로 격상된다. 『자살의 연구』는 이러한 논지를 펼쳐 가면서 마치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와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을 합친 듯한 뜨거움을 선보인다. 중요한 것은 세계에 맞선 인간의 태도, 그리고 그 태도를 행동으로 옮기는 에너지다. 그가 어떤 패를 꺼낼 것인지는 이후의 문제다. 자신의 생명을 걸어 세계와 맞선다는 것 이렇듯 앨버레즈는 사회학과 심리학, 창작론을 독창적으로 뒤섞어 자신만의 관점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맞선 예술가들을 소개한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자살과 연결되어 있지만, 앨버레즈는 그 모든 자살이 현실에 패배한 결과가 아님을 상기시킨다. 살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죽음과 같은 삶을 거부하고자 죽을 것인가? 특히 스스로 절멸을 향해 가는 현대 문명과 마주한 인간-각자의-삶은 그 문명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결국, 자살이라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자는 식의 공익적이고 착한 내용은 이 책에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가지고 세계와 어느 정도까지 맞붙을 수 있는가를 고찰하는 이 책은 고독한 독자들의 잔불처럼 잦아든 마음을 다시금 달구어 줄 뿐이다. 그리고 이 불길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무척 반갑고 소중한 열기를 전해 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