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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_007
작가의 말 _525 |
LEE GI-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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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봉은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올해 만 네 살이 된 수컷 비숑 프리제다. 시봉이라고 부르면 알은척을 안 하고, 꼭 이시봉이라고 성까지 불러야지만 뒤돌아보거나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리다는 종종 이시봉을 ‘노숙견’이라고 불렀다. 물론 이시봉이 없는 자리에서 그랬다. 이시봉이 일 년 넘게 미용실을 가지 않아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도 ‘노숙자’라고 불러야 마땅하다(혹 모르지, 나 없는 곳에선 그렇게 부를지). 나 또한 일 년 반 넘게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심한 곱슬머리라서 크게 불편한 것은 없다. 다만 둘 다 어깨에 비해서 얼굴이 좀 커 보인다는 것, 그래서 이시봉을 품에 안은 채 멀거니 거울을 바라보면(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그런다) 츄파춥스 두 개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때론 양을 안고 있는 예수님처럼 보이기도 하고.
--- pp.10-11 그건 이시봉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시봉은 도로가 무엇인지, 인도가 무엇인지, 규칙이 무엇이고 도로교통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존재가 아닌가? 그러니 저렇게 계속 명랑한 것이 아닌가? 이시봉을 원망한다는 것은 자연을 원망하는 것. --- p.52 “사랑은 예측 불가능한 일을 겪는 거야.” 아빠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강아지를 사랑하는 건 더 그래.” --- p.123 물을 다 마신 강아지들은 짐짓 관심 없는 척 소파 아래 앉아 있던 정채민 대표의 다리 위로 꼬물꼬물 기어올라왔다. 그러곤 갸우뚱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그와 눈을 맞췄다. 손가락만한 작은 꼬리를 연신 팔랑거렸고, 몸을 한껏 웅크렸다가 자꾸 점프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또 자기 앞발을 열심히 핥는가 싶더니,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정채민 대표는 강아지들이 자신의 다리 위에 올라왔을 때부터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이 지금 꼼짝도 못하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한곳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도 알지못한 채 미소 짓고 있었다. --- pp.159-160 개들은 보이지 않는 희망에 들뜨지 않는다. 눈앞에 놓인 희망만 면밀히 관찰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그래서 그 희망이 좌절되었을 때도 서로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의 희망은 대부분 상대와 관계없이, 상대를 신경쓰지 않은 채, 자기 내부의 화학반응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대부분의 희망은 권태에서 온다). 그래서 그 희망이 좌절되었을 땐 상대를 아예 파멸로 몰고 가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면서도 상처받는 쪽은 되레 자기 자신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 p.204 사람은 동물과 처지가 엇비슷해지면 수치심을 느끼는구나. --- p.261 연약하고 보드라운 이시봉의 털이 내 팔뚝과 목에 닿을 때마다, 그 축축한 코가 내 눈을 향할 때마다, 나는 이 생명체가 내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우리 둘 사이의 어쩔 수 없는 관계였다. 나 혼자 저버릴 수 없는 관계. --- p.283 그는 알고 있었다. 혁명이 일어나고 전쟁의 참화가 이어질 때, 강아지들이 어떤 운명에 처해지는지(프랑스혁명 당시 왕가와 귀족 가문에서 키우던 강아지들은 그 주인들에 앞서 대부분 참수당했다). 강아지들은 가장 먼저 바닥으로 떨어지고, 가장 먼저 짓밟힌다. 그게 바로 인간이 개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본질이다. 본질은 늘 뜻하지 않은 사건과 사고 속에서 드러나는 법. 개들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희생되어왔다. --- p.299 왕비는 그렇게 말하다가 문득 고도이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고도이는 붉은색 천으로 온몸을 친친 휘감은 강아지 한 마리를 안은 채 집무실 책상 바로 옆에 서 있었는데, 마치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아이를 바라보는 젊은 아빠처럼 엷은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그 미소가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석양과 함께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모든 것의 종말을 떠올리게 했다. --- p.403 인간은 그런 식으로 오해하고 오독하면서 동물들의 삶에 관여한다. 그것이 인간의 유일한 장점이자, 집사로서의 자격 요건이다. 집사란 직위는 대개 그런 사람들, 자기애가 충만하지만 그걸 잘 모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한 방식이다. --- p.4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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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의 먼지처럼 작고 애잔한 내 강아지가
유럽 왕실에서 기르던 귀족 중의 귀족 혈통이라니…… 너는 어떤 모험 끝에 내게 오게 되었니? 이런 나와 함께 사는 게, 과연 너를 위한 일일까? 이시봉의 보호자 ‘이시습’은 아직 자신만의 삶의 궤도를 확립하지 못하고 방황중인 20대 청년이다. 아버지를 불의의 사고로 떠나보낸 후, 시습의 가족들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상태다. 이시봉을 집에 데려와 “우리집 막내”라 부르며 애지중지했던 아버지의 죽음에 이시봉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이시봉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이시봉을 용서하지 못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기에, 시습은 이시봉을 마음껏 사랑하고 싶을 때도 집안의 눈치를 살핀다.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술에 의존하게 된 시습은 그 와중에도 이시봉을 꼭 끼고 다니며 보살핀다. 비록 이시봉의 몰골이 시습과 닮아가 꼬질꼬질하고 비루해질지언정. 여동생 ‘시현’과 친구들의 걱정과 안타까운 시선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이시봉과 서로 의지하며 작은 생활반경 안에서 재활을 해나가던 시습 앞에, 어느 날 비숑 프리제만 전문으로 다룬다는 브리딩 업체 ‘앙시앙 하우스’가 나타난다. 그곳의 수석 브리더 ‘미셸 김’은 시습에게 놀라운 말을 한다. 조사 결과 이시봉이 과거 유럽 왕실에서 기르던 고귀한 혈통으로, 이제 세상에 몇 마리 남지 않은 ‘비숑의 왕’이라는 것. 미셸 김은 이시봉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적지 않은 돈을 제안하며, 앙시앙 하우스에는 이시봉을 위한 호화로운 시설과 체계적이고 안락한 케어가 보장되어 있다고 시습을 회유한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 여겼지만, 이시봉과 함께 앙시앙 하우스에 방문하고 업체 대표 ‘정채민’의 뜨거운 애정 공세를 지켜보며 시습은 마음이 복잡해진다. 스스로의 삶에 자신이 없는 시습은 자신이 이시봉의 더 나은 삶을 응원하지 못하고 곁에 붙잡아두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이시봉을 향한 자신의 사랑도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진실한 사랑인데, 왜 자꾸만 사랑에 우열이 가려지는 것만 같을까? 이시봉의 혈통에 관한 앙시앙 하우스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아버지가 어린 이시봉을 입양해올 무렵 남긴 행적을 추적하던 시습은 또 한번 놀라운 사실을 마주한다. 아버지의 지인 중에 ‘인간 이시봉’이 있었던 것이다. 시습, 시현과 함께 ‘시’ 자 돌림으로 지어진 줄만 알았던 이시봉의 이름에 대한 비밀이 풀려나오기 시작하며, 소설은 본격적으로 파란만장한 대서사를 향해 나아간다. 상처 입고 방황하는 인간, 순수해서 명랑한 개 스페인과 프랑스, 한국을 잇는 파란만장한 대서사 속에서 서로에게 둘도 없는 반려가 되어가는 두 존재의 이야기 이후 서사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현시점과 가장 가까운 서사는 이시습이 이시봉의 이름에 얽힌 사연을 추적한 끝에 진실과 맞닿는 이야기이다. 시습의 아버지는 과거 공장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희망퇴직한 후, 자신을 대신해 노조 간부가 되어 갖은 고초를 치르게 된 동료 이시봉으로부터 개 농장에 맡겨진 강아지를 담보물 삼아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그것이 이 모든 인연의 단초였음이 밝혀진다. 그 강아지를 동료의 이름으로 부르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지켜냈을 아버지의 마음을 확인하는 이 서사는 부조리한 사회에서 발생하는 비극과 그로 인한 아픔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개별적인 표정들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비숑 프리제 이시봉이 개 농장에 방치되기에 이른 사연은 정채민의 과거 서사와 관련이 있다. 앙시앙 하우스의 정채민 대표는 자신이 이시봉에게 얼마나 진심을 다하고 있는지 피력하기 위해 이시습을 초대해 긴 이야기를 들려준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정채민은 청년 시절 프랑스로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가난한 한국인 예술가 부부 ‘김상우’와 ‘박유정’을 알게 된다. 어느 날 그들 앞에 유럽 왕가의 혈통을 지닌 개 두 마리가 나타난다. 정채민, 김상우, 박유정은 애정을 바쳐 돌본 그 개들을 한국으로 들이기 위해 힘을 모으지만, 결국 사랑과 질투와 돈이 얽힌 갈등 끝에 마음이 엇갈리고 만다. 예술을 선망하던 가난한 이들이 꿈과 불화하고 현실과 타협하게 되는 과정, 숨겨왔던 사랑이 오랜 시간을 통과하며 변질되는 과정이 애틋하고도 격정적인 서사 위에 드러난다. 그렇다면 왕가에서 생활하던 비숑 프리제들은 왜 이리도 초라한 계보를 이어가게 되었는가. 그 까닭은 1808년 스페인에서 발발한 민중 봉기와 관련이 있다고 정채민은 말한다. 시곗바늘이 왕정 시대로 되돌아가고, 더욱 먼 과거로 확장된 서사는 스페인 총리이자 왕비의 정부 역할을 하며 민중의 원성을 산 마누엘 고도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약육강식의 시대, 이시봉의 선조 강아지들은 위계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하사되는 정치적 재산이었고, 연모의 마음을 감춘 채 사랑하는 이를 점잖게 만날 빌미였으며, 한 시대를 대표하던 인간을 무너뜨릴 때 그 인간보다 먼저 짓밟을 제물이었다. 마누엘 고도이가 몰락하며 그가 애지중지하던 개들 또한 비참한 말로를 맞는 이 장엄한 서사는 세속적 욕망을 실현할 수단으로 동물의 생명까지 이용하고 희생시키는 인간의 유구한 잔혹성을 꼬집는다. 지금 기적처럼 곁에 있는 작고 소중한 존재들이 안겨주는 속수무책의 감동 그리고 이 세 갈래 서사가 한데 모이는 지점에서, 상처 입은 채 작은 세계 안에 유폐되어 있던 이시습과 이시봉의 서사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시봉이 미셸 김과 정채민의 손아귀에 넘어가려는 절체절명의 순간, 소설은 이시습은 물론 이 이야기를 읽어온 모두에게 깨달음을 안긴다. 이토록 기나긴 시간과 무수한 사연을 거쳐 다른 누구도 아닌 내 곁에 오게 된 존재를 좀더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고. 우리는 반려동물의 행복을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하려 하지만, 애초에 누군가의 행복을 그 아닌 다른 존재가 가늠할 수는 없다고. 이제 최선을 다해 이시봉을 사랑할 준비가 된 시습은 이시봉을 되찾기 위해 달려나간다. 물론 비숑 프리제 이시봉은 이시습에게 영영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미지의 존재로 남고 말 것이다. 그 개는 인간이 처한 상황과 느끼는 감정은 아랑곳없이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요구할 것이고, 본능을 더욱 충족시켜주는 이가 나타나면 지체 없이 눈길을 돌리고 꼬리를 흔들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아무것도 모르는 명랑함, 모든 것이 정직, 정직 그 자체이기만 한 아이들”이, “사랑도 투쟁으로 바꿔버리는 신기한 재주를” 지닌 인간과 달리 제 짧은 생을 사랑으로만 채우다가 투쟁 없이 숨을 거두는 개 고양이 새 물고기 파충류 양서류 들이 지금 기적처럼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투명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가족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서로에게 이해받지 못한 채로 함께해도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삶의 형태야말로 이기호가 자신을, 타인을, 세계를 소설로 써나간 끝에 도달한 ‘이종異種’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작가의 말 실제로 우리집에서 팔 년째 함께 살고 있는 강아지 이름이 이시봉이다. 이시봉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볼 때마다 이야기 하나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그만 이렇게 길어지고 말았다. 소설은 강아지에 대해 말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장르일지 모른다. 하지만 강아지를 둘러싼 인간의 책임을 묻기엔, 여전히 유효한 장르이다. _이기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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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마음은 정말로 잘 모르겠다. 가끔 알 것 같다고 느끼는, 확신에 가까운 순간이 있긴 하지만 그때마저 그 믿음의 끝자락에는 이건 네 마음이 아니라 내 마음이지, 하는 쓸쓸함이 따라붙는다. 모르는 마음은 쓸쓸한 마음인 걸까? 이기호의 소설에는 개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과 사람 마음 몰라주는 개가 등장한다. 서로의 마음과 상황과 역사를 대부분 모르면서도 그들은 함께 산다. 우리가 누군가와 그러듯이. 그것을 놀라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 사실을 생각하면 매번 무척 놀란다. 이기호의 소설은 잘 모르지만 좋아하는 이와 오래 살아왔고 더 오래 함께 살기로 결심하는 소설, 그러기 위해 무거운 몸과 마음을 일으키는 소설이다.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푹 꺼진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람이 나오는 소설을 읽으며 나도 함께 일어설 듯 숨을 참고 배에 힘을 줘본다. 힘을 주면 힘이 난다. 이기호의 소설은 마음 알 길 없는 이와 함께하려는 모두에게 “꼭 떨어져서 살 필요는 없죠? 그렇죠?”라고 물을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살면서 어느새 오래 함께하게 된 이시봉 같은 개, 이시봉 같은 고양이, 이시봉 같은 사람에게 나는 언제나 그렇게 묻고 싶었다. 소설이 용기를 주자 비로소 용기가 났다. - 김화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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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작가는 또 날 미치게 했다. 사랑을 전제하는 선택은 보통 바보 같지만 그럼에도 아름답다는 그 화술이 나를 또 잘 살고 싶게 만들었다. 이 세상에서 ‘순애’가 멸종한다면 난 무조건 이기호 작가를 찾아갈 것이다. 그 일방적이고 순수하고 맑은 사랑을 또 써내놓으라고 애걸할 것이다. 그렇게 또 나를 웃겨달라고, 아니 울려도 좋다고 복걸할 것이다. 이게 다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든 거라고 징징거릴 것이다.
그리고 전국의 반려인들이여, 이 책을 절대 보지 마시오. 아니 보시오. 아니 보지 마시오. 아니. 몰라 시봉. 그냥 보시오! - 박정민 (배우, 출판사 무제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