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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1부 벼루를 깎다 흐린 날의 花鳥圖 떠도는 산수화 棺 그 옛날의 봄은 공터의 벚나무들 계산법 천도복숭아 어떤 독서 등나무 아래서 가족 어떤 피 모자 저수지에 빠진 의자 살구나무와 저수지 가시 대못 동생들 제2부 껍질의 길 사나운 동네 驛長의 가을 초가집 박물관 노을, 붙들렸다 가는 노을! 寒蘭 사거리의 토란잎 화장실의 동백나무 면회 노을 앞에서 늦가을의 나비 失職 柳下白馬圖를 보다 그 가을의 나흘 동안 진눈깨비 제3부 묘지와 축대 交友錄 눈사람傳 탑 배꼽에 관하여 들판의 家電들 동백잎 약간의 꽃 매듭 속의 강 치매 노인의 사생활 차밭의 무덤 뼈의 외출 미루나무 초겨울 변두리에서 포도나무 집 제4부무대 여행 파리 봄밤 오후의 別辭 칼날 밥상 행진곡 말뚝을 위하여 행로 도마 붉은 담요 꽃과 거지 오동나무 한 채 엉겅퀴와 뱀과 풀과 나 겨울 저녁 해설|만상의 交友錄·이장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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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자연, 성과 속,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섬세한 어법과 관찰력,
언어라는 옷을 벗고 사랑의 마음이 되고 싶은 서정적인 시편들 고통과 상처, 슬픔과 환멸의 이미지로 세계의 불안함, 위반과 탈주의 욕망을 드러내었던 유종인 시인의 두번째 시집 『교우록(交友錄)』이 문학과지성사에서 발행되었다. 첫번째 시집이 이질적인 세계들이 교차하고 혼재하는 틈새에서 솟아나온 광기의 언어들을 포착한 것이었다면 이번 시집은 교차할 수 없는 인간 사회와 자연을 ‘서정의 문법’으로 함께 끌어안는 변화의 양상을 보여준다. 시인이자 이 시집의 해설을 맡은 이장욱은 이 시집을 ‘이상한 산수화’로 명명하였다. 시인은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을 의식하기보다, 산과 물이 인간의 마을에 스며들어 흘러가는 기묘한 풍경을 그린다. 이 시집의 산과 물과 꽃과 나무들은 도시 변두리를 떠돌아다니며 인간의 곁에서 피고 진다.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생명을 잃지 않고, 우리 곁에서 한량없이 부유한다. 아마도 도시의 뒷골목을 신산스럽게 떠돌아다니는 산과 물과 꽃의 풍경이야말로, 이 시집을 요약할 수 있는 하나의 이미지일 것이다. 낡은 고물상 트럭 짐칸에 산수화 액자 하나 실려 있네 곰팡이가 기러기떼 나는 가을 하늘까지 피어 있네 궁금한 듯 봄 햇살이 들여다보네 고봉밥처럼 꾹꾹 눌러 담긴 산들이 있고 산자락에 자루 부러진 숟갈처럼 초가 몇 채가 꽂혀 있네 주저앉히면 草墳으로 쓸 만한 묏자리라네 낫처럼 굽은 노인네가 지팡이 하나를 기둥 삼자 그 안에서 두꺼비 한 마리 비를 피하네 강가로 드는 거룻배 향해 삽살개가 물 묻은 저녁 빛으로 괜히 짖어대고 봄 햇살이 유리 속 단풍과 만나 말없이 속삭이네 열흘 붉은 꽃, 단풍만이 산 빛을 오래 지켜주네 지폐 몇 장 오가지 않는 곳이라 독을 품고는 들어갈 수가 없네 이발소 그림으로도 떼어져 창고의 어둠 속에 나뒹굴 옛날 하나가 봄날의 햇살을 가을빛으로 온통 포식하고 있네 ―「떠도는 산수화」 전문 자연은 생명과 더불어 풍요롭고 너그러우며, 인간의 살림은 언제나 어이없이 강퍅함이 시집 곳곳에서도 드러나지만 자연과 도시를 주제로 한 수많은 시편들처럼, 이 시집은 도시의 각박함과 자연에 대한 향수라는 손쉬운 이분법을 택하지 않았다. 자연은 물신화되어 드러나지 않으며 또한 무책임한 자연에의 향수도 남발하지 않는다. 다만 시인은 모든 사물과 자연에 자신의 마음을 줄 뿐이다. 시인의 마음에 포착된 사물과 풍경들은 마치 이미 오래전부터 시를 내장하고 있었던 듯 자연스럽게 다시 살아난다. 털실이 옷으로 짜이는 것을 허공이 길을 터줬기 때문이라고 말할 때(「매듭 속의 강」), 둘러앉아 고등어를 먹고는 고등어를 몸속에 감춰버렸다고 말할 때(「여행」), 그리고 그 사라진 고등어의 냄새가 탁발하듯 야심한 실내를 돌아다닐 때, 이 서정의 감각은 부드럽게 감탄을 자아낸다. 전편에 걸친 이러한 섬세한 어법과 관찰력은 이 시집을 떠받치고 있는 서정의 감각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가끔은 그렇지, 꽃무늬도 희미한 천장을 보고 누워도 문득 하늘의 시퍼런 심장이 들여다보이는, 돌연 어딘가로 휩쓸려간 기억의 머리 끄덩이를 누군가 죽은 개처럼 끌고 돌아올 것만 같은, 환멸이 문득 낯설고 늙은 여자로 돌아와 성긴, 쇠한 머리카락과 퀭한 눈빛으로 먼 異敎徒의 말들 횡설수설해대는, 돌아갈 때는 그녀의 손에 오래된 은화 몇 닢을 잘 말린 그늘로 펴서 쥐어줘야만 할 것 같은, 시퍼런 하늘의 심장에 돌연 血栓처럼 떠다니는 새떼들도 그렇고 뭔가 가슴에 뭉클하는 것들로 검은 구름의 심장 판막이 까맣게 죽듯 우련 검붉은 그늘의 두근거림이 도드라지듯 시간은 가만히 맥을 짚어줘야 할 듯, 변두리, 여기저기 피어오르는 불길의 저 초조한 입성들. 검은 구름의 심장 판막에서 피톨처럼 떨어지는 검붉은 낙엽과 생철 대문을 후려치며 떨어지는 낯선 집의 문패들. 건드리지 못할 것들이 스쳐가는 소리, 아득한 곳에서 둥지 트는 그리움의 눈알들. 고요를 둘러싸는 저 아우성의 투명한 이웃들. 엿 같은 미련들과 그 외출과 고요한 섹스와 겨울로 메말라가는 골짜기 희디흰 이마의 돌들과. ―「초겨울 변두리에서」 전문 첫 시집의 뜨거운 어조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속 깊은 미소와 같은 섬세함뿐만 아니라 흐릿한 웃음을 자아내는 유머들도 시집 곳곳에서 삶과 만상을 넉넉하게 이어주고 있다. 광기, 혹은 어떤 격렬함이 지나간 자리에서 시인은 여전히 생애를 지배하는 죽음의 그림자를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밀어내지 않는다.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이 분별되지 않음을 깨달은 시인은 모든 풍경들에 이들을 고요히 가두어놓는다. 그리하여 성과 속의 경계도 이 시집에서는 흔적 없이 지워지고 만다. 비극을 말하되 비관에 빠지지 않고, 허무를 말하되 허망하지 않다. 성스러움을 뒤집으면서도 그 영광을 박탈하지 않고, 자연의 비의를 말하면서 인간의 문명을 거기에 대립시키지 않는 뛰어난 균형 감각은, “가장 큰 사랑”은 “不安”이라는 역설을 알아버린 시인이 획득한 새로운 ‘서정의 문법’이라고 할 만하다. 눈이 내렸다 어둠 속에서 말 못할 것들이 흩날렸다 내리는 눈은 친구가 아니라서 바닥에 쌓이거나 행인의 발길에 밟힐 것이다 내리는 눈 속에서 눈을 치우는 사람들이 문밖에 나와 있다 호랑이 한 마리 나타나 울부짖으면 내린 눈들이 화들짝 놀라 하늘 속으로 눈 내리러 다시 올라갈 것만 같았다 친구는, 내려오는 친구는 저렇게 하얗고 속절없이 많아도 다 내가 더럽혀야 할 눈이었다 내리지 않는 눈이 가장 순수한, 착한 눈이었다 친구는 죽은 친구가, 아직 만나지 않은 친구가 제일 좋은 친구다 이미 치워진 눈과 치워진 눈 위에 밤을 세워 내리는 눈과 이미 눈 녹은 물로 내 신발을 적시는 눈과 눈을 뭉치며 달아나는 친구의 뒤통수에 정확히 박히는 눈과 말없이 뒤란 그늘 속으로 숨어드는 눈과 함께 친구는, 죽은 친구가 제일 착한 친구였다 ─「교우록」 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