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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서론
ㆍ무사이 여신들 ㆍ헤라 ㆍ아프로디테 ㆍ아르테미스 ㆍ데메테르 ㆍ헤스티아 ㆍ아테나 ㆍ복수의 여신들 ㆍ감사의 글 ㆍ옮긴이의 말 ㆍ주 ㆍ도판 출처 |
Natalie Hay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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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인간이 인간의 모습대로 신을 창조하는 것이라면, 왜 고대 그리스인들은 더 좋은 신을 만들지 않았을까?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때에 따라 다르지만, 핵심은 그리스 신이 변덕스럽고 파괴적인 까닭은 변덕스럽고 파괴적인 자연 세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과학혁명 이전 시대에는 더욱 그랬다. 한 줄기 번개나 지진이 순식간에 집과 식구들을 앗아가고 가뭄이나 역병이 작물과 가축을 휩쓸어 버릴 수 있는 때라면 신이 자비롭다고 믿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다 보면 때로는 신이 우리를 벌하려 한다고, 사람들이나 땅에 복수를 가하려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남자가, 오직 남자만이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과 여신의 이미지를 만들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게 어떤 차이를 만들까? 예술사를 대략만 훑어보아도 (남자가 보기에) 매력적인 벌거벗은 여성 육체가 잔뜩 등장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창작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묘사된 인물의 본질이 달라지는 걸까, 아니면 외형만 달라지는 걸까? 그리고 내가 가장 흥미를 갖는 부분이기도 한데, 남성 인물과 여성 인물이 만들어지는 방식에도 차이가 생길까? 리조는 흰색 보디슈트에 금색 항아리 손잡이 모양의 웅장한 머리 장식을 했다. 리조는 여신일 뿐 아니라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카디 비도 그에 못지않게 장려한 머리 장식을 했다. 이오니아식 주두(기둥의 꼭대기 부분) 모양이고 번쩍이는 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혐오자들이 카디 비에게 가슴이 가짜라고 말하고 싶다면 그러라고 하라. 카디 비는 건축물이고, 그자들의 인정이 필요하지 않다. 만약 누군가 고전학자들은 엘리트주의자이고 백인에 남성이고 케케묵은 사람들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 뮤직비디오를 보라고 할 것이다. --- 「서론」 중에서 무사이 여신들은 어디에나 있고 모든 것을 안다. 어떤 시인도 광대한 시간과 공간,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아우르는 이 사건들을 전부 목격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무사이가 내막을 알려주지 않으면 시인은 아무 이야기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호메로스에게 필요한 것은 (헤시오도스에게도 그렇듯이) 재능, 매력, 설득력, 그리고 말과 노래의 힘만으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능력이다. 이 여신들에게는 그런 힘이 있고, 원한다면 그 힘을 나누어줄 것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시인들이 언제나 무사이에게 간곡히 매달려 온 것도 그럴 만한 일이다. 그러니 무사이를 다른 신화 속 존재와 비교해서 묘사한다면 파괴적이지 않고 건설적으로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무사이의 존재 덕에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된다. 무사이가 노래와 춤과 음악의 재능을 지니고 있으니 우리도 창작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아주 공손하게 요청하면 그런 것을 지닐 수 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만한 점은 무사이가 (주로 예술을 관장하긴 하나) 과학 활동에도 관여한다는 점이다. 천문학자로서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면 우라니아에게 호소해야 한다. 무사이는 예술가뿐 아니라 과학자들에게도 영감을 주려고 마음을 먹었으니까. 우리는 학문의 두 영역을 실용성 대 아름다움으로 나누고 그 둘을 서로 대립시키는 담론에 익숙하지만 무사이는 이런 구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과학적 추구가 아름다우면 안 될 이유가 있나? 또 춤이나 노래에 법의학적 정확성을 적용하고 싶을 수도 있지 않나? 오직 과학만이 유용하고 오직 예술만이 정신을 고양한다는 구분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현대적 맥락에서 뮤즈는 사회적으로 종속적인 위치이며 뮤즈의 역할은 주로 남성인 예술가들이 이들을 어떻게 보고 들었는가에 따라 보이고 들린다. 이들은 육체이고 이름이며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칭송받는다. 그렇지만 사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무사이와 맺었던 관계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창조성에 영감을 받아 생겨나는 창조성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 「무사이 여신들」 중에서 우리는 헤라를 성질 나쁜 아내이자 인정사정없는 적으로 바라보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취약할 때 자신을 돌봐주었던 테튀스를 떠올리는 헤라는 어리고 약한 존재로 비친다. 폭력적인 아버지, 수동적인 어머니, 다정한 양어머니, 상대적으로 존재감 없는 양아버지. 이런 여성이 결국 결혼으로 자신을 학대 관계에 빠뜨리게 되는 것은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니 위僞아폴로도로스가 다른 버전의 이야기도 제공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른 버전에서는 헤라가 뱀을 보낸 게 아니라고 한다. 헤라클레스의 의붓아버지인 암피트리온의 소행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왜 다른 신들이 헤파이스토스에게 성질 고약한 여신을 풀어주라고 사정했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만약 헤라가 풀려나서 돌아다니고 있으면, 자기가 한 온갖 못된 짓을 헤라 탓으로 슬쩍 돌릴 수 있을 테니까. 헤라는 어떤 면에서는 강력한 지위를 지니고 있으나 남편의 폭력과 부정 앞에서는 무력하다. 여기에 헤라에게 제물을 바치는 여성들의 상황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남편의 마음이 바뀌면 여자는 이혼당할 수 있지만 반대로 아내 쪽에서는 이혼을 청구할 수 없다면(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는 그랬고 그 이후로도 여러 사회에서 유지되어 온 관습이다.), 남편은 원하는 누구하고나 잘 수 있지만 아내는 집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면, 아내의 행동이 사회적 기대와 남편의 신체적 힘과 폭력적 기질에 제약을 받는다면, 남편이 욕정을 품는 여자를 원망하게 되지 않겠나. 만약 다른 여자가 내 자리를 차지한다면, 다른 여자가 낳은 자식이 내 자식을 밀어내면 어떡하나? 이것이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여자들에게는 실질적인 두려움이었다. 현대에 되살려진 헤라 혹은 유노 가운데 가장 애절한 버전은 스크린이나 무대나 모험 이야기의 책장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11년 8월 5일 플로리다 케이프 커내버럴에서 이륙한 ‘주노Juno’ 탐사선이 있다. 우주선 주노는 5년 동안 비행하여, 당연하게도 신비한 행성 목성Jupiter으로 가서 이 행성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내려 했다. 미항공우주국NASA의 보도 자료는 신화적 연관 관계를 명확히 밝혔다. “신 유피테르는 못된 짓을 감추기 위해 구름으로 자신을 감쌌고, 아내인 여신 유노는 구름 속을 꿰뚫어 유피테르의 진정한 본성을 드러낼 수 있었다.” 참으로 적절하게도 주노 탐사선은 우주를 가로지르다가 이오와 에우로페를 포착했다. 유피테르가 덮쳤던 젊은 여성 가운데 두 명의 이름을 딴 목성의 위성이다. 그러니 가장 머나먼 곳에서 미래적인 형태로 재현된 유노도 여전히 유피테르를 쫓아가며 유피테르의 부정을 찾으려 하고 결국 발견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무인 우주선의 승무원 가운데 유피테르와 유노를 형상화한 레고 미니 피겨가 있다.(레고 갈릴레오도 있다.) 2016년, 탐사 여행이 마무리되었을 때, 주노는 목성 궤도에서 이탈하여 목성 주피터로 추락했다. 영원히 함께, 또다시. --- 「헤라」 중에서 숨마코스는 나란히 함께 싸우는 전우를 뜻한다. 아프로디테는 비유적 의미의 동지가 아니라 진짜 전투에서의 동지가 되어준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전쟁을 벌이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비유가 고대 시가 전반에서 확장되어 쓰인다. 카툴루스나 오비디우스 같은 고대 로마의 위대한 사랑시인도 자신을 사랑을 위해 싸우는 전사로 종종 묘사한다. 사포는 사랑은 치명적일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최대의 적일 수 있다는 이 주제의 초기 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아프로디테가 앙키세스를 대하는 태도는, 욕정은 도덕과는 무관하며 감상이 개입할 여지도 없다는 아주 좋은 예시가 된다. 여신에게 원하는 걸 주면, 여신은 사랑스럽고 건강한 아이와 네가 무사할 거라는 약속을 남기고 떠나버릴 것이다. 나더러 이것과 가장 비슷한 것을 떠올려 보라면, 마피아의 행동 방식이 떠오른다. 이 순간이 아프로디테의 권능의 핵심을 드러내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상황이 어떻든, 아무리 주위 남자들에게 굴욕과 수치를 당했든 간에, 아프로디테는 눈 깜짝할 사이에 평소처럼 웃음 짓는 태평한 아름다움을 회복한다. 디오메데스에게 신체적 상처를 입었을 때조차도 곧 어머니의 손에 치유된다. 이번에는 모여든 남자 신들에게 불륜 상대와 함께 침대에 갇힌 모습을 들키고 비웃음을 당했고, 남편에게 비난과 조롱을 받았고, 형제들에게(호메로스식 계보에 따르면 아프로디테는 아폴론과 헤르메스와 동기간이다.) 외설스러운 농담거리가 되었지만, 아프로디테는 여전히 웃음을 사랑하는 여신의 모습으로 그 자리를 떠난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아프로디테의 아름다움과 완벽함은 손상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점이 모든 신의 정수일 수도 있다. 신은 불멸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프로디테는 어딘가 전쟁터에서 립스틱을 바르는 여인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이 여인에게서 전투용 얼굴을 빼앗을 수는 없다. 아주 잠깐이라면 몰라도. 인간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면, 변장하고 유혹하고 위협한 다음 떠날 것이다. 웃음거리로 만들면, 더더욱 자신을 갈망하게 만들 것이다. 아르테미스만큼 한 가지로 콕 집어 말하기 힘든 여신은 없을 것이다. [……] 그런데 아르테미스의 경우에는 그리스 전역에서 지역에 따라 너무나 다른 성격으로 나타나서 모순적으로 보일 지경이다. 아르테미스는 야생동물의 여왕이지만, 야생동물을 사냥하고 죽인다. 아르테미스는 어린 소녀의 수호자이지만, 때로 소녀들을 희생제물로 요구한다. 아르테미스는 아폴론의 누이(쌍둥이라고도 함)이지만, 서로 다른 섬에서 태어났다고 이야기되기도 한다. 아르테미스는 인간을 치유할 수 있지만, 급작스럽고 이유 없는 죽음을 야기하기도 한다. 우리 딸에 관해서는 축복받았다고 생각해도 돼, 연극 끝부분에서 아가멤논이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말한다. 이피게네이아는 이제 신들과 어울리고 있을 테니. 그렇지만 그 직전, 아가멤논이 무대에 등장하기 전에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전령의 말을 들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거짓말일 거라고, 자기가 슬퍼하지 못하게 하려고 거짓을 들려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설령 딸이 신들 사이에 있다고 쉽게 믿어버린들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어떤 위로가 되나? 대체 어떤 부모가 자식을 잃고 그런 말에 위안을 받겠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안다. 아가멤논. --- 「아르테미스」 중에서 하데스는 웃음을 지으며 페르세포네에게 어머니에게 돌아가라고 말한다. 가, 하지만 나에 대해 좋게 생각해 줘, 화내지 마. 그러고는 데메테르가 헬리오스에게 들은 주장을 반복한다. 자기는 제우스의 형제이고 너에게 걸맞은 남편이며, 너는 모든 생물의 여왕이니 너를 숭배하지 않는 자 누구든 벌할 수 있다고. 나는 이 시를 읽는 내내 하데스에게 경멸을 느끼지만 이 대목만큼 강력한 혐오가 솟는 부분은 없다.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널 납치했지만, 그렇다고 우울해하지는 마?너도 날 좋아하잖아? 그냥 연쇄 강간범이라서 혐오스러운 게 아니다. 물론 그 점이 크게 기여하기는 하지만. 자기가 납치하고 강간한 여성의 승인을 갈구한다는 점이 결정타이다. 이 관계에서 모든 권력을 쥐고 있고 지하세계 전체의 왕이면서도, 자기를 인정해 달라고 징징거리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피해자는 자기라는 듯이. 맙소사. 우리는 흔히 데메테르를 어머니상으로, 양육하고 보호하는 인자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데메테르의 분노가 신들조차 겁에 질리게 할 만큼 무시무시하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호메로스 찬가』를 비롯한 작품에서 데메테르는 크루사오로스chrusaoros라고 지칭되는데, ‘황금 칼을 든 데메테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나는 전에는 데메테르가 추수와 뚜렷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이 문구를 ‘황금 낫의’로 번역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더 중의적으로 ‘황금 날의’ 데메테르라고 번역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데메테르는 자신이 가진 최강의 무기인 기근을 아킬레우스가 창을 휘두르듯 살의를 담아 휘두른다. 이 시에서는 남자끼리 만날 때(헤르메스와 하데스는 감정 없이 인사만 나눈다.), 남자가 여자를 대할 때(하데스는 페르세포네를 납치하고 헤르메스는 페르세포네에게 아예 말을 걸지 않고 하데스만 상대한다.), 여자끼리 만날 때(기쁨, 포옹, 즐거움)가 뚜렷이 대비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여자들의 행복한 재회가 연달아 세 번 이루어진다. 이 찬가가 너무나도 명백하고 확실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쓰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으나, 그럼에도 여성들이 맺는 관계의 가치를 인지한다. 여자들은 온갖 부당함 앞에서 서로에게 위안, 위로, 기쁨, 따스함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이 젊은 여성의 어머니이며 따라서 포식자 남성의 시선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데메테르는 그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자신의 분노를 무기로 삼아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진작 했어야 할 일을 하게 만든다. 페르세포네와 데메테르의 감정을 고려하는 일을. --- 「데메테르」 중에서 하지만 나는 자꾸 같은 의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헤스티아가 크로노스의 딸이며 제우스와 헤라 등등의 누이임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미미하게 취급된 까닭이, 지위 높은 사람은 누리기만 하고 관여하지 않는 집안의 어느 영역과 관련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헤스티아는 어디에나 있으며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라는(레이아의 맏딸이면서 크로노스에게서 마지막으로 탈출했으며, 첫 번째와 마지막 제물을 받는다.) 지위를 지니고 있어 장대한 신화적 서사에서 언급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 끝없이 호명되는 신이었다. 이 장의 시작 부분에서는 헤스티아는 부재로 정의할 수밖에 없는 듯 느껴졌다. 헤스티아에 관련된 이야기도 없고, 조각상도 없고, 헤스티아는 분노도 드러내지 않고, 전투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정의는 약간 농담조이긴 하지만 헤스티아에 대한 전혀 다른 접근을 제시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것이 진실로 느껴진다. 이 여신은 무언가를 ‘하는’ 여신이 아니라, 늘 ‘있는’ 여신이다. 당신의 집과 나의 집의 심장이며, 우리 도시와 신전의 중심이다. 헤스티아는 따뜻한 귀가, 갓 구운 빵, 그리고 어둠 속의 빛이다. --- 「헤스티아」 중에서 아테네인들을 비롯한 그리스인들이 왜 아테나에게 기도하고 도시를 굽어보는 아테나 조각상을 세우고 싶어 했을지 그 까닭을 알고 싶다면, 『일리아스』에서 필요한 근거를 전부 찾을 수 있다. 아테나는 정말로 프로마코스promakhos, 최전선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군을 격려하고 가장 좋아하는 영웅에게 초인적 능력을 부여하고 전세의 유불리에 낱낱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아폴론은 이 모든 인간 사이의 다툼을 하찮게 여기며 한 걸음 물러서 있지만, 아테나는 제대로 된 싸움이라면 무엇보다도 좋아하며 뛰어든다. 고대 그리스에는 심리학 관련 용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신들이 심리적 상태를 대신하곤 한다. 아프로디테가 압도적인 욕망을 누군가에게 불어넣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여기에서 아테나는 하나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악하고 추상적인 힘으로 읽을 수도 있다. 너무 많은 죽음과 너무 많은 피를 목격하고 죽음을 가까스로 피한 경험이 너무 많은 전사를 사로잡아 버리는 압도적인 영향이다. 우리는 전쟁을 이기고 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지만, 백병전에는 승자가 없다. 생존자만 있을 뿐이다. 나는 그리스 비극이 왜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토록 호소력이 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그럴 때마다 똑같은 답을 한다. 비극의 통화 단위는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수천 년 세월 동안 다른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그것만큼은 여전히 그대로라고 생각한다. 폭력을 당하고 상처를 입는 사람의 입장에서 사회의 가치가 어떠한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회는 전쟁에 대해 엄청나게 높은 관용도를 보이지만, 내 집이 침해당하고 가족이 죽는 일을 온당하다고 느낄 사람은 없다. 전쟁의 위협이 상존할 때는 으레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예상하게 되나?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예상했다고 해서 고통이 줄어드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 「아테나」 중에서 이제 복수의 여신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고르곤하고 좀 비슷한데, 적어도 뱀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는 그렇다. 고르곤은 대개 두피에서 머리카락 대신 뱀이 자란다고 묘사되는 한편, 복수의 여신은 뱀이 머리카락 속으로 구불구불 파고들거나 팔을 둘둘 감고 있다고 묘사된다. 그러나 피를 흘리는 눈, 무시무시한 춤, 이들을 본 사람으로 하여금 달아나야 한다고 확신하게 만드는 능력은 오직 복수의 여신에게서만 발견되는 특징이다. 아이스킬로스의 극에서 복수의 여신이 노래하고 춤을 추는 모습으로 그려진 것은 특히 섬찟하다. 악행을 저지른 자를 벌하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는 이들은 마치 무사이의 어두운 자매들 같다. 그런데 자기들이 인기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살해당했다면 우리는 살인자가 신이 시켰다는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는 일이 없기를 바랄 것이다. 복수의 여신은 비호감이지만 어쩌면 정의로운 사회를 유지하려면 꼭 필요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살인자는 처벌받아야 하고, 선량한 사람은 자유롭게 다닐 수 있어야 한다. 이 특정 판례나 아폴론이 변호하고 아테나가 결정하는 재판 방식에 발끈할 사람도 있겠지만(그게 바로 나다.), 그럼에도 이 순간은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순간이다. 이들의 주장이 마음에 안 들기는 하나 나는 복수의 여신의 가치에 아무 의문이 제기되지 않는 세상에는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오레스테스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진짜 부모가 아니라는 것에도 당연히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부모를 죽이는 일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 경우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학대받는 아이가 어린 동생까지 학대당하는 것을 막으려고 부모를 죽인다거나. 이런 사례라면 모살(계획적 살인)이 아니라 고살(우발적 살인 혹은 과실치사)로 보아야 할 듯싶다. 지금은 이런 정치인들의 과거 주장과 급작스러운 입장 변화가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증거가 있다고 해서 예전 같은 효과를 갖지는 못하는 듯하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뻔뻔스럽게도 거짓말을 하고 또 하고 진실을 부정하고 과거를 부인하고 자기들이 섬겨야 할 사람들의 집단 기억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소개한 여신들 가운데에서도 나는 특히 에리니에스가 복수자의 역할이 아니라 집단적 사회적 수치?식언이나 잔인하고 부정직한 행동에 대한 수치를 의인화한 여신으로서 오늘날의 판테온에 복원되기를 바란다. --- 「복수의 여신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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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비극부터 레이디 가가까지
시대를 가로질러 나타나는 여신의 흔적 나탈리 헤인스는 고전에서 여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중세와 근현대 예술 및 대중문화까지 폭넓게 시야를 확장하여 여신의 흔적을 찾는다. 그림과 조각만이 아니라 소설, 영화, 코믹스, 뮤직비디오와 피겨까지, 고대 그리스 여신들은 오랫동안 다양한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왔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 아프로디테의 경우, 그 미를 칭송하는 예술 작품이 고대에서부터 줄곧 만들어졌다.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보티첼리의 「베누스의 탄생」을 거쳐 우디 앨런의 영화 「마이티 아프로디테」와 레이디 가가의 「비너스」까지, 아프로디테의 이미지는 시대를 초월하여 등장한다.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가 지닌, 활을 잘 쏘고 강인하고 독립적인 이미지는 마블 코믹스, 소설 『헝거 게임』과 동명의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저자는 살인에서 어떠한 쾌락도 느끼지 않는 아르테미스의 냉정한 얼굴에서 영화 「터미네이터」의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기계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통찰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책을 시작할 때는 아널드 슈워제네거를 아르테미스 여신에 비교할 일이 생기리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그렇게 됐다.” 저자는 현대의 다양한 예술 작품에서 여신들의 모습이 관찰되는 현상에 대해 단순한 차용을 넘어 그들이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는 고전적 신화가 가진 보편적인 서사 구조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민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데메테르 장에서는 『호메로스 찬가』와 현대의 소설과 시, 영화를 번갈아 제시함으로써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상대의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페르세포네를 납치한 후 사랑을 구걸하며 마치 자신이 피해자인 양 구는 하데스. 반면 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마침내 모든 신, 심지어는 제우스의 뜻을 철회시키는 데메테르. 두 신을 대조함으로써,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로맨스가 아니라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의 사랑으로 이 신화의 초점을 옮겨놓는다. 시대를 관통하는 저자의 분석은 그리스 로마 신화가 현대 문화 콘텐츠를 이해하는 데 아직까지도 유효한 키워드임을 깨닫게 만든다. 여성 작가의 손에서 재탄생하는 여성 인물 고정관념을 벗어던진 입체적 초상 “소, 사자, 말에게 사람처럼 손이 있어 그림을 그리고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말은 말처럼, 소는 소처럼, 기타 등등 자신의 모습과 비슷한 신을 그릴 것이다.” 크세노파네스의 글에서 시작하는 이 책은 이제껏 남성 작가들에 의해 여신들이 그려져 왔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오래도록 남성 작가들은 매력적인 벌거벗은 여성을 예술 작품에 등장시켜 왔다. 그렇다면 여성 작가가 그려내는 여성과 남성은 어떠할까? 『아름답고 살벌하고 웃기는』이 서술하는 여신들의 모습은 확실히 고정관념에서 빗겨나 있다. 병적으로 질투심 많은 헤라, 그의 무시무시하고 끈질긴 복수는 사실 자신이 언제든 남편에게 버림받을 수 있다는 불안에서 기인한다. 저자는 많은 (남성) 작가들이 모든 불화의 원인을 헤라에게만 돌리며 그녀의 악독한 행위를 묘사하는 데 그쳤다는 점을 지적하고, 오히려 제우스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지점들을 예리하게 밝혀낸다. 저자가 보기엔 모든 문제의 원인은 “인내심이 바닥난 아내”가 아니라 “성질 나쁘고 여자를 밝히는 가부장”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헤라의 처지는 일반적인 고대 그리스 여성의 불안한 처지와 그대로 닮아있다. 또한 남성 작가들이 여신을 이분화하고 단편적인 서술에 그쳤던 것과 달리, 헤인스는 여신을 지극히 입체적인 존재로 다루며 부정적인 면모 또한 가감 없이 소개한다. 지혜의 여신이자 영웅의 수호자인 아테나는 “최전선에서 함께 싸우는” 존재이자 특히 그리스군이 필요로 할 때 “그곳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굉장히 자기중심적이고 차별적인 여신이기도 하다. 자기가 아끼는 자가 아니라면 망가지고 죽더라도 개의치 않고, 심지어는 영웅 아이아스의 타락을 지켜보며 즐거워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자신은 어머니가 없이 태어났으니 결혼을 제외한 모든 일에서 남자의 편이며, 전적으로 아버지를 우선시한다고” 말할 만큼 가부장적인 면모를 지녔다. 이러한 여신들의 입체적인 초상은 독자들이 신화 속 여성 인물의 주체성과 힘을 발견하도록 도울 것이다. 앞선 크세노파네스의 글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이것이 크세노파네스가 던진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다. 여자가 남자들처럼 예술을 한다면, 그들이 창조한 여신은 정말 끝내주게 멋있을 거라고.” 절대 지루할 틈 없는 신화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유머를 더하다 『아름답고 살벌하고 웃기는』의 강력한 매력은 생동감 넘치는 문체와 통쾌한 유머에 있다.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한 나탈리 헤인스는 고전학자로서의 철저함을 갖추면서도,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서의 유머러스한 문체로 독자들이 지루할 틈 없이 책을 따라가도록 만든다. 저자의 탁월한 유머 감각은 영국 최고의 코미디상인 에든버러 코미디상 신인상 부문에 여성 최초로 노미네이트됨으로써 입증된 바 있다. 이러한 장점을 살려 BBC 라디오에서 「나탈리 헤인스의 고전 스탠드업」을 10년 넘게 진행하고 있다. 무엇보다 저자의 유머가 가장 빛을 발하는 순간은 모순을 신화 속에서 모순을 발견할 때이다. 첫 번째 장에서 저자는 무사이 여신들이 창작의 힘을 나누어주는 존재임에도 위협적이지 않을 만큼 예쁘고, 춤추고, 노래하는 특징을 가졌기 때문에 “찬양받으면서 동시에 과소평가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상황을 여신들이 느꼈을 황당함과 불쾌감을 담아 “내가 자란 동네에서는 이건 그냥 싸우자는 거다.”고 정리한다. 이어서 무사이에게 도전하는 걸 말릴 수는 없겠지만 “그러다 보면 까치로 변할 수도 있다”고 경쾌하게 경고를 더한다. “고전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기를 누구보다 잘하는 작가”라는 옮긴이의 말처럼 저자는 비판적인 지점을 재치 있게 전할 줄 안다. 고대와 현대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고전에서 현대적 맥락을 잘 포착하는 이러한 서술 방식은 여신들을 마치 지금 이 세상을 함께 걷는 여성들처럼 생생하게 그려낸다. 덕분에 그리스 로마 신화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신선하게,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는 친근하게 느껴질 것이다. “헤스티아는 조용히 집에 앉아 있는 게 당연시되다 보니 그리스 신화의 장대한 서사에서 누락될 때가 많은데, 로마화된 베스타는 그보다는 더 눈에 뜨이는 편이다. 특히 폼페이에서는 빵집에서 베스타 제단이 무수히 발견되었다. 안 그래도 호감 가는 구석이 많은 다재다능한 여신인 데다 심지어 탄수화물의 수호신이기까지 하다니, 이 여신의 매력의 끝은 어디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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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치 있고, 탁월하고, 무자비하다”. - 마거릿 애트우드 (『페넬로피아드』, 『시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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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 헤인스는 방대한 지식을 재치 있고 가볍게 드러내며 고전을 현대 세계로 능숙하게 끌어온다.” - 케이트 앳킨슨 (『살인의 역사』,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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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면서도 박식하다. 학술적으로도 엄밀하고 방대한 지식과 통찰을 가볍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 《더 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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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익숙한 독자와 젊은 세대의 독자 모두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 대한 유쾌한 재해석.” - 《퍼블리셔스 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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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고전의 원문에서 길어 올린 풍요로운 디테일을 선사한다.” - 《뉴 스테이츠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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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이 흘렀어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들.” - 《NB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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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속 위대한 여성들의 이야기. 헤인스는 잊혀진 여신들을 되살려 우리 곁으로 불러낸다.” - 《데일리 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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