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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006
주해 087 옮긴이의 말 빌라도, (다른) 아브라함 103 보론 유다적 상황: 구원과 최종해결의 동시성 134 참고문헌 164 찾아보기 165 |
Giorgio Agamb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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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예수의 편에 선 것 같은 이 질문은 실상은 비겁함의 냄새를 풍긴다. 빌라도는 ‘죽인 자’의 편에 속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두고 질문을 던질 줄 알았던 자이기도 하다. “진리가 무엇이냐?” 니체가 모든 역사를 통틀어 가장 세련된 말이라고 일컬었던 이 질문을 예수에게 던진 자는 빌라도였다. 우리는 과연 빌라도라는 심연을 거치지 않고서 예수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기독교는 예수의 탄생(성육신이라 부르는)과 죽음의 드라마 위에 구원의 신비가 자리 잡고 있다고 고백하는 종교다. 기독교가 말하는 이 두 가지 ‘신비’ 역시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는 하나의 역사적 종교가 되었다. 칼 슈미트가 말했듯, 그리스도(예수)의 탄생-성육신이 “무한한 유일성을 가진 역사적 사건”이듯이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재판은 또한 인류 역사의 핵심적인 계기를 내포한 다른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신이 인간의 몸이 되어 세상에 왔다는 사실조차 신이 사람의 아들로 법정에 세워지고 죽음에 처해지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말해야 마땅할 것이다.(만일 예수가 재판에 처해지고 처형당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뿐인 아들을 지상에 보냈다는 이야기는 신의 짝사랑이 빚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그런데 왜 하필이 면 신의 사랑에서 비롯된 구원의 신비 혹은 진리는 재판의 과정이라는 형식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어째서? 진리를 증언하러 온 자가 지상의 권력자에 의해 재판을 받는다. 이 재판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죽음이라는 결말이 아니다. 우리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제국의 진리와 예수가 증언하려는 진리 사이의 대립, 진리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이해 사이의 간극이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가 묻는다. “나의 왕국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니다.” 예수가 답한다. 예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기어코 왕국(권력)에 대한 대화를 진리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시킨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다.” 예수는 오로지 이것을 위해서만 태어났고, 태어나야만 했던 것이다. 누군가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태어나고 진리를 위해 죽는다. 그렇지 않고선 우리는 결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을 수 없을 것이고, 묻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지상의 왕국에서 세속의 재판과 진리에 대한 증언은 화합할 수 없다. 이 재판이 끝내 십자가상의 죽음을 부른 까닭이다. 그러므로 지상의 우리는 빌라도와 더불어 끊임없이 묻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그러나 대화는 파탄 났고, 진리에 대한 증언 또한 실패로 끝났다. 예수가 재판정에 섰다면, 그는 자신이 증언해야 할 진리를 입증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에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실로 불가능했던 것은 증언 자체가 아니라 입증되어야 하는 진리, 다시 말해 그는 분명 왕국을 갖고 있었지만 그 왕국은 이곳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역설적인 사실이었다. 그는 역사 속에서 그리고 시간 속에서 초역사적인 것, 영원한 진리의 현전을 증언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아직은 없는 왕국의 현전을 무슨 수로 입증할 수 있단 말인가. 미궁에 빠져버린 재판. 이 재판 속에서는 판결도 구원도 이루어질 수(종결될 수) 없었다. 빌라도는 판결하지 않았고 단지 예수의 죽음을 원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를 넘겨주었을 뿐이다. 예수 역시 구원의 진리를 증언하는 데 실패했고(법률적 관점에선 애초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빌라도가 한 번도 내리지 못한, 그리고 결코 내리지 못했을 판결에 굴복해야 했다. 재판(판결)과 구원은 적어도 [이 세계의] 시간들이 끝날 때까지는 서로를 배척한다. 서로를 배척하면서 또한 서로를 불러내는 법적 정의와 구원은 결코 서로 화해할 수 없을 것이다. 구원의 진리를 증언한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하기를 바라는 바로 그것을 오히려 우리가 심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세계는 자신의 덧없음 속에 갇혀 법적 정의를 원할 뿐 구원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현세에 만족하는 자가 천국을 갈망한다는 말은 거짓말이거나 터무니없는 욕심이다.)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 끊임없이 십자가가 세워지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 예수와 더불어 죽음에 넘겨지는 자들은 누구인가. 아감벤의 《빌라도와 예수》는 이 질문 앞에 우리를 소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