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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프롤로그 연대기 1806~1843 에필로그 옮긴이의 글 주 / 참고 문헌 / 인물 설명 / 도판 출처 |
Giorgio Agamb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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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삶에 담긴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고, 어떤 방식으로든 감추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는 방법론적 원칙이다. 삶의 진실은 오히려 전기傳記에서 담론적으로 표현 가능한 수많은 사건과 사실이 수렴하는 무한한 소실점처럼 나타난다. 존재의 진실은 비록 명확하게 형상화될 수 없지만, 존재를 하나의 ‘형상’으로, 즉 실재하지만 숨겨진 의미를 암시하는 것으로 구성함으로써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삶을 하나의 형상으로 인식하는 지점에서만 그 삶을 구성하는 모든 사건이 우연적인 그럴 듯함 속에 자리를 잡는다. 즉, 삶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이 삶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모든 환상을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횔덜린이 탑에서 보낸 삶은 이 형상적 진실에 대한 끊임없는 검증이다. 그의 삶은 방문객들이 세세히 기술하려 한 일련의 크고 작은 사건과 습관의 연속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횔덜린이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라고 말한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형상 안에서의 삶은 순수하게 인식 가능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결코 그 자체로 앎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 책에서 시도하려는 바처럼, 삶을 형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삶을 앎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포기하고 그의 삶을 훼손되지 않은 인식 가능성 자체로 지켜내는 것을 의미한다.
--- p.17~18 1802년 5월 중순, 횔덜린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그 어떤 연유로 보르도의 마이어 영사 가문의 가정교사직을 3개월 만에 그만두고 서둘러 독일로 돌아온다. 여권을 신청한 후 걸어서 앙굴렘, 파리,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독일로 향했다. 스트라스부르 경찰국이 횔덜린에게 통행증을 발급해준 것은 6월 7일이다. 6월 말에서 7월 초 사이, “시체처럼 창백하고 쇠약하며 움푹 파인 눈에 눈빛은 거칠고 길게 자란 수염과 머리에 거지 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프리드리히 마티손 집 앞에 나타나 “동굴에서 날 법한 목소리로” 단 한마디를 내뱉었다. “횔덜린.” --- p.23 셸링에 따르면 횔덜린은 ‘완전한 정신적 부재 상태’였지만 그리스어 번역은 가능한 상태였는데, 이는 마치 소포클레스 번역 작업이 대단한 지적 능력을 요하지 않는 일처럼 들리게 한다. 또한 횔덜린의 말투에서는 광기를 느끼지 못했다는 진술까지 감안한다면 셀링은 횔덜린의 광기를 오직 외형에서만 찾은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든다. 만약에 그렇다면 횔덜린은 미치지 않은 것이다. --- p.35 문제는 횔덜린이 미쳤는지 안 미쳤는지가 아니다. 그가 스스로를 미쳤다고 믿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그가 미치기를 자발적으로 선택했거나, 오히려 어느 순간 광기가 그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비겁하게 회피할 수 없는 필연으로 다가왔다는 점이다…… 횔덜린은 광기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베르토가 지적했듯이 횔덜린의 광기는 현대의 우리가 이해하는 정신질환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오히려 이 광기는 사람이 거주할 수 있거나 혹은 거주해야 하는 어떤 장소 같은 것이다. --- p.39 희극 안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가장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것, 즉 일상적인 삶이 ‘무한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탈바꿈하며, 비록 그것이 삶의 맥락에서 고립되어 있더라도 자연적 진리로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횔덜린이 옥탑에서 보낸 36년 동안 삶과 시를 통해 끈질기게, 모범적으로, 그리고 희극적으로 추구했던 바가 아닐까? 그리고 그가 말한 ‘일상적인 삶’이란 마지막 목가시에서 멀리 사라져가는 것으로 묘사된 ‘거주하는 삶’, 즉 습관과 규범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아니었을까? --- p.81~82 9월 15일 횔덜린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존경하는 어머니!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매우 기뻤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어머님의 훌륭한 말씀은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보여주신 깊은 배려에 어머님을 향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더욱 커집니다. 어머님의 자비로운 마음과 유익한 충고는 언제나 저를 기쁘게 하고 큰 도움이 됩니다. 동봉해주신 옷도 아주 잘 맞습니다. 시간이 없어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어머님의 바람대로 제가 더욱 성숙하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횔덜린이라고 불릴 영광을 가진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아들 올림 이 편지에서 보이는 과장된 격식은 횔덜린이 외부 세계와 소통하는 방식의 또 다른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의도적으로, 거의 풍자적인 방식으로 상대와 거리를 두려는 태도는 아들이 목사가 되길 바라며 횔덜린의 예술적 열망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어머니와의 서신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 p.148~149 7월 8일 구스타프 슈바프의 일기 중에서 셰익스피어와 그의 매형 아르님을 제외한 모든 시인을 깎아내렸다. 괴테는 너무 고전적이고 인위적이라 했고, 울란트에게도 역시 같은 평가를 내렸지만, 약간의 재능은 인정했다. 티크는 겉으로는 매력적이지만, 평범한 재능을 가진 사기꾼이며, 측근들에서만 인정받는다. 최근에는 괴테를 비난하고 다니는데, 괴테의 명성에 대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나에서 학생 시절 처음 티크를 보았을 때 브렌타노는 존경심에 눈물을 흘렸고, 슐레겔 두 형제가 티크를 가운데 두고 길을 걸을 때, 마치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걷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그의 가장 높은 이상은 횔덜린이다. --- p.160~161 게오르그 헤르베그는 『사라진 사람』이라는 글을 횔덜린에게 헌정한다. “독일은 진정한 젊음의 시인에게 크나큰 빚을 지었다. 독일 때문에 그가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 통탄할 현실에서, 우리의 수치심이 극에 달하기 전에, 우리보다 앞서 나아가 전투의 노래를 부르도록 부름 받았던 그가 이제 성스러운 광기의 밤으로 스스로를 구원했다…… ‘젊음이 믿는 것은 영원하다’라고 뵈르네는 말했고, 이 말은 횔덜린에게서도 찾을 수 있는 진리이다…… 고대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에게 그는 그 어떤 문헌학자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횔덜린은 세상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았고, 또 그것이 얼마나 초라해졌는지를 견딜 수 없어 했다. --- p.264 그토록 비범한 정신이지만 비운 속에 파묻혀 이제는 다가갈 수 없는 사람과 마주한 순간, 우리의 대화는 어쩔 수 없이 어색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특정 질문이나 이름이 그의 마음을 건드릴 때면, 갑자기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는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젊은 시절 친구였던 실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마치 옛 친구를 떠올리는 듯 푸른 눈이 반짝이며 ‘아, 나의 실러, 나의 위대한 실러!’라고 외쳤다. 하지만 화제가 괴테로 옮겨가자 그는 갑자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아, 그 괴테 씨!’라고만 짧게 말했다. --- p.283 횔덜린의 후기 시들은 정지 상태에 놓인 언어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하나의 고정된 판본이 아닌 여러 버전으로 존재한다…… 이 다양한 판본은 실수로 누락된 것을 발견하고 어떤 궁극적 형태나 의미에 다가가기 위한 미완의 시도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짐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감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는 잠재적인 무한 운동 속에서의 시적 일탈이다. ‘시행verso’이 어원적으로 ‘스스로 돌아오는 말si volge’에서 유래했다면, 다시 말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면, 후기의 횔덜린은 시적 언어의 ‘회귀적 성격’을 극한까지 몰아붙인다.” --- p.325~326 인간이 지상에서 거주하는 것은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단순하고 일상적이며 진부한 삶일 뿐이다. 말하고 몸짓하지만 그 어떤 행위나 담론에도 귀속시킬 수 없는, 익명적이고 비인칭적인 삶의 형식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횔덜린의 삶은 우리 문화를 규정해온 범주적 대립들―능동/수동, 희극/비극, 공적/사적, 이성/광기 가능성/현실성, 의미/무의미, 통합/분리 등―을 무력화하는 하나의 전형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횔덜린의 삶이 모호한 경계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의 삶을 쉽게 마주할 수도, 그로부터 하나의 모범을 도출해내기도 쉽지 않다. 더욱이 모든 정황으로 볼 때 횔덜린의 삶은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적 대립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도움이자 자원으로 전환된다. 실패는 마치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동시에 신의 부재가 그렇듯이 말이다. 횔덜린이 남긴 가르침은, 우리가 어떤 목적으로 창조되었든, 그것이 우리가 성공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는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부여된 운명은 실패하는 것이며, 모든 예술과 학문에서, 그리고 가장 본질적으로는 삶이라는 순수한 예술 안에서 실패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실패야말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취다. --- p.340~341 횔덜린에게 거주하는 삶은 “인간은 이 지상에서 시적으로 거주한다”라고 했던 것처럼 ‘시적dichterisch인 삶’이다. 독일어 동사 ‘dichten(시를 짓다)’은 어원적으로 라틴어 ‘dichtare(받아쓰게 하다, 구술하다)’에서 유래하는데, 고전 작가들이 종종 필경사에게 자신의 작품을 구술하기 시작하며 점차 ‘시를 짓다’ ‘문학 작품을 창작하다’라는 의미로 자리 잡았다. 시적인 삶, 즉 시적으로 거주하는 삶이란 하나의 ‘구술된 삶’, 곧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지는 삶이다. 이는 하나의 습관, 하나의 주어짐에 따른 삶으로 우리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고, 다만 거주할 수 있을 뿐이다. 거의 1년 동안 나는 매일 횔덜린과 함께 살았다. 최근 몇 달은 내가 처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던 고립된 상황에서 지냈다. 이제 그에게서 떠나려고 보니, 그의 광기는 사회 전체가 깨닫지 못한 채 빠져든 광기에 비한다면 완전히 무해한 것처럼 느껴진다. 네카 강변의 탑에서 시인이 살았던 그 ‘거주하는 삶’에서 내가 포착해보고자 했던 정치적 교훈을 더듬어본다면, 나는 아마 당분간은 그저 “더듬거리고 더듬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는 독자는 없다. 수신자를 잃은 언어만 있을 뿐이다. ‘시적으로 거주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은 아직 답을 기다리고 있다. 팔락쉬. 팔락쉬. --- p.343~3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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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덜린의 후기 삶은 아감벤에게 철학적 사유의 진정한 ‘사건’이다. 침묵과 무위 속에 머무르며 시인이 증명해보인 삶의 가능성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말을 건넨다.” -『모나츠헤프테Monatshefte』 “이 책은 아감벤 사상의 정수다. 시와 철학, 광기와 정치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빚어낸 가장 아름답고 깊은 사유의 결실. 창의적이며 심오하다.” -『초이스Choice』 “횔덜린은 궁핍한 시대에 앞서 간 시인이다. 이 시대의 그 어떤 시인도 그를 추월할 수 없다. 선구적인 이 시인은 미래로 떠나는 것만이 아니라, 미래에서 도착하기도 한다. 그의 말이 도래할 때, 미래는 비로소 이곳에 임재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신화와 영적인 삶 사이의 관계를 다룬 후대 시들의 원형이 있다면, 그것은 횔덜린의 작품이다.” -발터 벤야민 “40세가 되던 해에 횔덜린은 인간으로서 이성을 잃는 것이 현명하다고, 그러니까 재치 있다고 생각했다.” -로베르트 발저 “횔덜린의 삶은 인류의 위대함과 처참한 신비다. 이 고귀한 영혼은 추락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그렇게 높이 날 수 없었을 것이다.” -빌헬름 바이블링거 “시는 철학이 되어야 하고, 철학은 시가 되어야 한다” 가장 깊고 아픈 방식으로 아감벤에 응답한 시인 횔덜린 “시는 철학이 되어야 하고, 철학은 시가 되어야 한다.” 이는 아감벤의 사유를 관통하는 핵심 명제로, 그는 이번 『횔덜린의 광기』에서 시와 철학의 오래된 동행을 새로운 방식으로 선보인다. 횔덜린은 아감벤의 오랜 철학적 기조에 가장 깊고 아픈 방식으로 응답한 시인이며, 횔덜린의 생애와 문학은 그가 평생 다뤄온 문제들에 가장 깊이, 가장 조용하게 응답하는 일종의 ‘철학적 실천의 장’이다. 이 책에서 아감벤은 횔덜린의 시를 단순히 언어의 형식으로 보지 않고, 존재론적 진리를 탐사하는 하나의 ‘철학적 사건’으로 읽는다. 이를 통해 횔덜린은 ‘광인’이 아니라 언어를 극한으로까지 몰아붙이면서 오히려 철학보다 더 철학적인 ‘시적 언어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 인물로 다시 태어난다. 철학은 무엇보다 한 개인이 개인들 사이에서 느끼는 소외다. 즉 철학자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거주하면서 여전히 이방인인 채로, 여전히 부재하는 조국에게 집요하게 말을 거는 존재 방식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철학적 조건의 역설을 극적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조국에게 너무나 낯선 존재가 되어 결국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그 선고를 받아들임으로써 자기를 추방한 바로 그 조국에 여전히 구속되어 있음을 천명한다. 근래의 문턱에 이르러 시인들조차도 더 이상 조국에게 말을 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시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들을 수 없고 들으려 하지 않는 조국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모순이 폭발하는 지점에 바로 횔덜린이 있다. 이 순간, 시인 횔덜린은 철학자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철학이라는 병원’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결국 시인은 자신의 조국이 그를 정신병자로 진단한 것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고, 어두운 밤 속에서 ‘독일의 노래’를 끈질기게 찾아 헤맸다. (48~49쪽)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삶을 형상으로 드러낸다는 것 『횔덜린의 광기』는 구성면에서도 특이한 면모를 보인다. 아감벤은 철학적 분석이나 문학이론적 해석보다 먼저 횔덜린의 생애를 시기별로 구성한 일종의 연대기적 서술을 채택한다. 여기에 시인과의 대화와 편지, 기록, 문헌, 진단서, 주변 인물의 증언들을 통해 횔덜린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나열하는데, 이러한 구성적 선택은 한 인간의 삶은 결코 분석이나 해석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직 ‘형상’으로서만 접근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인한다. 횔덜린은 말년의 삶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존재로부터 모든 역사적 흔적을 제거하기로 결단한 인물이었다. 전기 작가들의 가장 오래된 증언에 따르면, 그는 일관되게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Es geschieht mir nichts”라고 말하곤 했다. 이 단언은 자기 삶의 사건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 이상 사건의 연속으로 환원할 수 없는 어떤 ‘형상’으로 전환하는 시적 선언이다. 횔덜린이 탑에서 보낸 삶은 이 형상적 진실에 대한 끊임없는 검증이다…… 형상 안에서의 삶은 순수하게 인식 가능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결코 그 자체로 앎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 책에서 시도하려는 바처럼, 삶을 형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삶을 앎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포기하고 그의 삶을 훼손되지 않은 인식 가능성 자체로 지켜내는 것을 의미한다. (17~18쪽) 따라서 아감벤에게 있어 연대기란 단순한 사실의 배열이 아니라, 오히려 그 형상성의 리듬을 따라가는 윤리적, 철학적 실천에 다름 아니다. 광기 이후의 횔덜린을 분석하거나 해석하려는 모든 시도는 그 삶의 진실을 흐릴 뿐,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그의 삶이 ‘무엇을 견디고 있었는가’다. 탑 안에서의 고요한 일상, 기이한 응답, 그리고 시의 잔광들은 인식될 수는 있지만 해석될 수 없는 ‘형상 안에서의 삶’을 방증한다. “인간은 이 지상에 시적으로 거주한다” 거주 불가능한 시대를 위한 거주의 철학 아감벤은 “인간은 이 지상에 시적으로 거주한다”라는 횔덜린의 시구에서 존재론의 핵심 명제를 발견한 하이데거를 깊이 있게 계승한다. 하이데거는 횔덜린의 시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사유했으며, 시야말로 인간이 세상과 진정으로 관계 맺는 방식이라 보았다. 즉 “시란 존재를 언어 속에서 근원적으로 보존하는 행위”이며, “시적 거주란 인간이 존재에 응답하는 가장 본질적인 거주의 형식”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아감벤은 하이데거가 종국에는 신학적 구조 안에 머물고 있음을 지적하며 삶의 구체적인 형식이나 실천의 가능성을 열어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와 거리를 둔다. 횔덜린은 신들의 부재를 비극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곧 그의 시대를 규정하는 방식으로 사유하고 경험한다. 블량쇼에서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후기 횔덜린의 무신론에 주목한 이들은 횔덜린의 대표 시 「빵과 포도주」의 한 구절을 종종 인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잦은 인용에도 그들은 횔덜린이 보여주는 (어쩌면 니체조차 도달하지 못한) 일종의 신학적 허무주의를 간과했던 듯하다. 이때 신의 죽음이나 부재는 결코 비극적인 상황도 아니며, 후기 하이데거처럼 또 다른 신적 형상의 도래를 기다리는 어떤 상태로도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횔덜린은 “고대의 탄탈로스처럼”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을 볼 수 있는 심오하면서도 역설적인 통찰력으로 신들과의 이별을 목가 또는 희극이라는 시적, 실존적 형식 속에 위치시킨다. (79쪽) 아감벤에게 ‘거주한다는 것’은 단지 공간에 머무는 물리적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 속에, 침묵 속에, 무너진 세계 속에서조차 자신을 일상적으로 지속하는 존재의 형식이다. 흥미롭게도 아감벤은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어 문법에서 기원한 중간태 개념(주체가 행위자인 동시에 대상이 되는, 능동도 수동도 아닌 상태. 가령 ‘기뻐하다, 부끄러워하다, 미치다와 같은 동사)을 끌어오기도 한다. 아감벤은 시인 횔덜린의 삶이야말로 이러한 ‘중간태적 삶’의 전형이라고 보았다. 횔덜린은 강한 의지를 통해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능동태적 영웅도, 시대에 의해 일방적으로 희생된 수동태적 피해자만도 아니었다. 그의 삶은 의지적 결단 이전에 존재하는 순수한 성향과 횔덜린만의 고유한 습관에 따라, 그 자신에 의해 끊임없이 영향을 받으며 ‘살아진’ 삶에 가까웠다. (348쪽) 횔덜린은 정신적 침묵의 시기에도 시작詩作을 완전히 멈추지 않았으며, 이 시기의 언어는 파편적이고 균열되어 보이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철학과 시, 광기와 사유의 경계가 무너진 새로운 언어 실험이 전개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횔덜린은 단지 거주를 상실한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거주의 가능성을 열어젖힌 인물로 해석된다. 그는 언어가 무너지는 곳에서 새로운 언어의 형식을 탐색했고, 철학이 도달하지 못한 경계에서 삶을 지속하는 방식을 실험했다. 아감벤은 이러한 횔덜린의 실존과 시를 통해 현대인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세계 속에 어떻게 거주할 수 있는가라는 철학의 가장 오래된 질문을 던진다. 따라서 이 책은 하나의 전기나 비평서이기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쓰는 시, 다시 생각하는 철학, 다시 살아보는 삶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려는 횔덜린의 열망이 깃든 하나의 안내서이다. 횔덜린에게 거주하는 삶은 “인간은 이 지상에서 시적으로 거주한다”라고 했던 것처럼 ‘시적dichterisch인 삶’이다. 독일어 동사 ‘dichten(시를 짓다)’은 어원적으로 라틴어 ‘dichtare(받아쓰게 하다, 구술하다)’에서 유래하는데, 고전 작가들이 종종 필경사에게 자신의 작품을 구술하기 시작하며 점차 ‘시를 짓다’ ‘문학 작품을 창작하다’라는 의미로 자리 잡았다. 시적인 삶, 즉 시적으로 거주하는 삶이란 하나의 ‘구술된 삶’, 곧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지는 삶이다. 이는 하나의 습관, 하나의 주어짐에 따른 삶으로 우리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고, 다만 거주할 수 있을 뿐이다. (34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