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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나의 첫 부동산 그림
[2화] 부린 왕자와의 첫 만남 [3화] 부린 왕자와의 대화 [4화] 부린 왕자의 고향 [5화] 부린 왕자의 슬픔 [6화] 부린 왕자가 만난 정치인 [7화] 부린 왕자가 만난 유튜버 [8화] 부린 왕자가 만난 폭락론자 [9화] 부린 왕자가 만난 개발업자 [10화] 부린 왕자가 만난 공무원 [11화] 부린 왕자가 만난 공인중개사 [12화] 부린 왕자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 강남 [13화] 뱀처럼 다가온 기획 부동산 컨설팅업자 [14화] 높은 건물 [15화] 카페 [16화] 길냥이와의 만남 [17화] 길냥이의 가르침 [18화] 부동산 단체 임장 버스 운전사 [19화] 첫차가 들어올 무렵 [20화] 불안의 시작 [21화] 이별의 직감 [22화] 부린 왕자와의 이별 [23화] 기억 저자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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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강남의 높은 빌딩들로부터 수백 미터 떨어진 강남역 지하상가에서 쓸쓸하게 잠이 들게 되었다. 드넓은 태평양 한가운데서 혼자 뗏목을 타고 있는 조난자보다도 훨씬 외로운 신세였다. 그러니 잠이 들 무렵 조그마하고 이상한 목소리를 듣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아저씨……, 나 좋은 부동산 하나만 찍어 줘!” “응?” “나 좋은 부동산 하나만 찍어 줘.” 나는 머리에 벼락을 맞은 것처럼 후다닥 일어나 눈을 비비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의젓한 모습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부린 왕자가 보였다. - ‘부린 왕자와의 첫 만남’ 중에서, ---p.18 하는 수 없이 나는 집을 한 채 그려 줬다. 그는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안 돼! 이건 아파트가 아니잖아. 다른 걸로 그려 줘.” 또 그렸다. 부린 왕자는 상냥하게 방긋 미소를 지었다. “이거 봐, 아저씨……. 이건 아파트지만 브랜드가 있는 대단지 아파트가 아니라 나 홀로 아파트잖아. 한 동이 외롭게 서 있으니 말이야…….” 그래서 또다시 그렸다. 그러나 이 그림도 앞의 그림들처럼 거절당했다. “이건 아파트들이 모여 있지만, 주변에 지하철역이나 학교가 없어. 아저씨는 역세권이랑 초품아도 몰라? 난 오래 살 수 있는 집을 갖고 싶은걸.” - ‘부린 왕자와의 첫 만남’ 중에서, ---pp.21-23 “나도 내가 떠나온 마을에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있어. 그 친구도 나처럼 서울에 살아 본 적이 없어. 아파트에 살아 본 적도 없고, 부동산 투자라는 것을 해 본 적도 없어.” “뭐라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면 아무리 못해도 서울에 10년 이하 신축에 면적은 국평 이상 되는 대단지 브랜드 아파트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말하던데, 난 지금 부동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심지어 가진 것도 아무것도 없다고!” 부린 왕자는 점점 더 화를 내면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 ‘부린 왕자의 슬픔’ 중에서, ---pp.37-38 부린 왕자는 소행성리 읍내에 있는 버스 터미널에서 하루에 겨우 한두 대 정도 출발하는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 수 있었다. 일거리도 구하고 부동산 투자도 배우고, 결혼도 해 볼 생각으로 서울이라는 지역부터 찾아가기로 했다. 맨 처음 찾아간 곳에는 정치인이 살고 있었다. 정치인은 깔끔한 양복을 입고 있었다. 매우 단정하고, 세련되고, 위엄 있어 보이는 1톤 트럭의 화물칸에서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띠를 두르고, 현란한 음악과 함께 마이크를 들고 서 있었다. “아! 우리 존경하고 사랑하는 시민 한 분께서 오셨구나!” 부린 왕자가 오는 것을 보자 정치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 ‘부린 왕자가 만난 정치인’ 중에서, ---pp.42-43 두 번째로 찾아간 곳에는 부동산 채널을 운영하는 유튜버가 살고 있었다. “아아! 구독자가 찾아오는구나!” 유튜버는 부린 왕자를 보자마자 멀리서부터 소리쳤다. 유튜버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채널을 보는 구독자로 보이는 것이었다. - ‘부린 왕자가 만난 유튜버’ 중에서, ---p.50 다음 장소에는 부동산 폭락론자가 살고 있었다. 이곳에는 아주 잠깐밖에 머물지 않았으나, 부린 왕자는 마음이 아주 우울해졌다. 이곳저곳에 나뒹구는 인구 감소 그래프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에 관한 책들, 곧 세계 전쟁이 날 것이라는 뉴스, 이렇게 하면 모두 다 망한다 또는 난리났다는 공포스러운 영상으로 가득 찬 노트북을 앞에 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부동산 폭락론자를 보고 어린 왕자는 물었다. “아저씨는 왜 부동산 가격이 폭락할 거라고 생각해?” 폭락론자는 몹시 침울한 안색으로 말했다. “부동산을 살 사람들이 없으니까 그렇지.” 부린 왕자는 벌써부터 폭락론자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부린 왕자가 만난 폭락론자’ 중에서, ---pp.56-57 네 번째 장소에는 부동산 개발업자가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부린 왕자가 곁에 왔는데 쳐다보지도 않았다. “안녕, 아저씨! 휴대폰에 진동이 오고 있어.” 부린 왕자가 말했다. “세 필지 옆에 두 필지를 보태면 다섯, 다섯 필지에 일곱 필지면 열둘, 열두 필지를 합하면 다시 하나라. 안녕? 합쳐진 한 필지에 건물을 세워서 예순일곱 개 호수로 쪼개서 분양을 하고, 열 개의 상가를 추가로 분양하면 일흔일곱 개……. 휴대폰을 받을 시간도 없구나! 일흔일곱 개를 하나당 10억 5천만 원씩 분양을 한다고 하면. 휴우! 그러니까 808억 5천만 원이 되는구나.” “무엇이 808억이야?” “응? 너 아직도 거기 있었니? 저어……, 808억 5천……. 잊어버렸다, 하도 바빠서! 나는 착실한 사람이야.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지! 다섯 필지에 일곱 필지면 열둘…….” “무엇이 808억이란 말이야?” 한번 물어본 말은 그냥 지나쳐 본 일이 없는 부린 왕자는 다시 물었다. 부동산 개발업자는 고개를 들었다. - ‘부린 왕자가 만난 개발업자’ 중에서, ---pp.59-61 강남에 도착한 부린 왕자는 이상하게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혹시 잘못 찾아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참이었는데, 한 사람이 조심스레 다가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명품 시계와 벨트를 착용하고, 기름을 바른 것처럼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모습이었다. 눈가에는 웃음이 가득했으며, 물티슈와 전단지가 가득 담긴 가방을 들고 있었다. “안녕?” 부린 왕자는 인사를 건넸다. 그랬더니 그 사람도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 “내가 도착한 이곳은 어디야? 너는 누구고?” “여기는 강남이야. 나는 부동산에 고민이 많은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기획을 하는……, 음, 좋은 말로 컨설팅을 해 주는 부동산업자지.” “아, 그래?” - ‘뱀처럼 다가온 기획 부동산 컨설팅업자 ’ 중에서, ---pp.81-82 카페에서 눈물을 닦으며 밖으로 나온 부린 왕자 앞으로 숨어 있던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왔다. 강남 길거리 한구석에서 살고 있는 듯 보이는 고양이였다. “안녕?” 고양이가 말했다. “안녕?” 부린 왕자는 공손히 대답하며 돌아보았으나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넌 누구야?” 부린 왕자가 말했다. “나는 길에 사는 고양이야. 사람들은 나를 길냥이라고 부르지.” “길냥이? 그것 참 알 수 없는 이름인걸? 그럼 넌 좋은 부동산을 아니?” “난 그걸 알려 줄 수 없단다. 길이 안 들었으니까.” - ‘길냥이와의 만남’ 중에서, ---pp.93-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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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부린 왕자’인가?
웃다가 멈추고, 읽다가 뜨끔해지는 부동산 이야기! “아저씨, 좋은 부동산 하나만 찍어 줘.” 이 한마디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강남역 지하상가, 막차가 끊긴 밤, 지갑도 휴대폰도 잃어버린 채 첫차를 기다리던 부동산 박사 앞에 부린 왕자가 나타난다. 상황 설명도 없이 건네는 한마디, “좋은 부동산 하나만 찍어 줘.” 황당하고도 엉뚱한 이 부탁은 단순한 해프닝처럼 보이지만, 곧 독자를 낯익은 세계로 데려간다. 우리가 매일 보고, 듣고, 고민하는 바로 그 세계! 부동산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이야기 속으로 말이다. 처음엔 웃음이 난다. 그런데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 이상한 기분이 든다. 부린 왕자의 질문이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그 질문에 우리가 쉽게 답하지 못한다는 걸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안전 진단 D등급? 당장 사야지!” 위험은 경고인데, 누군가에게는 기회다! 이야기는 시작부터 묘하게 비틀려 있다. 무너질지도 모르는 낡은 아파트를 보고 “재건축이다!”라며 기뻐하는 건물주들. 위험 신호를 보고 불안해하는 대신, 오히려 환호하는 이 장면은 현실을 과장한 듯 보이지만 놀랍게도 너무 현실적이다. 부린 왕자는 당황한다.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아파트를 왜 좋아하지?”라는 그의 질문은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집을 ‘살 곳’이 아니라 ‘오를 곳’으로 먼저 바라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장면은 웃기면서도 묘하게 씁쓸하다. 웃다가도 금세 멈추게 되는 이유는, 그 풍경이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집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구독과 좋아요를 누르면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정보는 넘치는데, 답은 점점 사라진다! 부린 왕자가 만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과장된 듯하면서도 사실적이다. 더 자극적인 말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유튜버, 끊임없이 폭락을 외치는 사람, 숫자를 세며 분양만 고민하는 개발업자까지. 이들은 모두 확신에 차 있다. 지금 사야 한다고 말하거나, 절대 사면 안 된다고 말하거나, 혹은 자신을 따라오면 돈을 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확신은 묘하게 공허하다. 부린 왕자가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행복한 집을 얻을 수 있는 거야?” 그 순간 대화는 멈춘다. 누구도 그 질문에는 답하지 못한다. 이 장면들이 유쾌한 동시에 불편한 이유는 우리가 이미 이런 말들을 너무 많이 들어 왔기 때문이다. 넘쳐 나는 정보 속에서 오히려 기준을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책임 중개라고 써 있지만, 책임지지는 않습니다!” 집은 추천해 주지만, 삶은 책임져 주지 않는다! 공인중개사 사무소에서의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벽에는 매물이 빼곡히 붙어 있고, 지도와 아파트 단지가 정리되어 있으며, 모든 것이 체계적으로 보인다. 이제 드디어 ‘좋은 집’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집이 있나요?”라는 질문에 “그건 몰라요.” 대신 거래는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한다. 조건을 맞춰 주고, 계약을 연결해 주고, 필요한 절차를 안내해 줄 수는 있지만, 그 집에서의 삶까지 책임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장면은 웃기면서도 묘하게 현실적이다. 우리는 종종 ‘좋은 선택’을 누군가 대신 내려 주길 바라지만, 결국 그 선택의 결과는 온전히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당연한 이야기가 이 장면에서 유쾌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드러난다. “네가 길들인 집만이 너의 집이 된다!” 좋은 집은 찍어 주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 모든 여정을 지나며 부린 왕자는 조금씩 깨닫는다. 좋은 부동산은 누군가가 찍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해하고 선택하며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 투자 노하우를 알려 주는 대신, 기준을 묻고 태도를 돌아보게 만든다. 빠르게 읽히지만 쉽게 넘길 수는 없고, 가볍게 시작했지만 끝에서는 멈추게 된다. 웃으며 읽다가 어느 순간 조용해지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한 가지 질문이 오래 남는다. 집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그 집에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가 중요한가? 『부린 왕자』는 그 질문을 어렵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부린 왕자의 이야기를 따라가게 할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가 끝날 즈음에는 어느새 자신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