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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한용운
범우사 2015.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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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희곡 top20 1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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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님의 침묵 -
군말[序]_11
님의 침묵_13
알 수 없어요_15
이별은 미(美)의 창조_16
나는 잊고자_17
가지 마셔요_19
고적한 밤_22
꿈 깨고서_23
나의 길_24
예술가_26
이별_28
길이 막혀_32
자유 정조(自由貞操)_33
하나가 되어주셔요_35
차라리_36
나룻배와 행인_37
나의 노래_38
당신이 아니더면_40
생명_41
잠 없는 꿈_42
사랑의 측량_44
진주_45
슬픔의 삼매(三昧)_46
행복_47
의심하지 마셔요_48
당신은_50
착인(錯認)_51
밤은 고요하고_53
비밀_54
사랑의 존재_55
꿈과 근심_56
포도주_57
비방(誹謗)_58
해당화_59
‘?’_60
님의 손길_62
당신을 보았습니다_63
비_65
복종_66
참아주셔요_67
어느 것이 참이냐_69
정천한해(情天恨海)_71
첫키스_73
선사(禪師)의 설법_74
그를 보내며_75
금강산_76
님의 얼굴_78
심은 버들_80
낙원은 가시덤불에서_81
참말인가요_83
꽃이 먼저 알아_85
찬송_86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_87
후회_91
사랑하는 까닭_92
당신의 편지_93
거짓 이별_94
꿈이라면_96
달을 보며_97
인과율(因果律)_98
잠꼬대_99
계월향(桂月香)에게_101
만족_103
반비례_105
눈물_106
어디라도_108
떠날 때의 님의 얼굴_109
최초의 님_110
두견새_112
나의 꿈_113
우는 때_114
타고르의 시(Gardenisto)를 읽고 115
사랑의 불_117
‘사랑’을 사랑하여요_119
수(繡)의 비밀_121
버리지 아니하면_122
당신 가신 때_123
당신의 마음_124
요술_125
여름밤이 길어요_127
명상(冥想)_128
칠석(七夕)_129
생의 예술_132
꽃싸움_133
오셔요_134
거문고 탈 때_136
쾌락_137
고대(苦待)_138
사랑의 끝판_141
독자에게_142

해설/만해 한용운과 그의 시 세계_143
연 보_164

저자 소개 1

韓龍雲, 만해, 한유천

승려·시인·독립운동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이며, 용운은 법명, 호적상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서경』 등을 통달하여 총명한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풍습이 그러함에 따라 14세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 전정숙과 일찍 혼인하였으나, 집을 나가 떠돌고 출가하기를 반복했다. 가출하여서는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고, 고향 홍성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불교서적을 탐독했다. 21세에 강원도 인제군 설악
승려·시인·독립운동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이며, 용운은 법명, 호적상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서경』 등을 통달하여 총명한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풍습이 그러함에 따라 14세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 전정숙과 일찍 혼인하였으나, 집을 나가 떠돌고 출가하기를 반복했다. 가출하여서는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고, 고향 홍성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불교서적을 탐독했다. 21세에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였고, 이때를 전후해서 세계여행을 계획하였다.

1894년 동학군에 가담하여 투쟁하다 실패했다.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은거, 수년 간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 교양서적을 읽어 서양의 근대사상을 접했다. 1904년(26세)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불목하니 노릇을 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27세 백담사에서 김연곡사金蓮谷師에게서 득도. 백담사에서 전영제사全泳濟師에 의하여 수계受戒. 백담사에서 이학암사李鶴庵師에게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등을 수료. 29세 강원도 건봉사에서 수선안거(최초의 禪수업)를 성취하였다.

30세 강원도 유점사에서 서월화사徐月華師에게 『화엄경』을 수학하였고 4월, 일본의 시모노세키, 교토, 도쿄, 닛고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였다. 도쿄 조동종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청강하였으며, 10월, 건봉사 이학암사에서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료하였다. 31세에 강원도 표훈사 불교 강사에 취임하였고 1910년(32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 1911년(33세) 박한·진진웅·김종래·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 조약 체결을 분쇄하였다. 1913년(35세) 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하였고 『조선불교유신론』을 불교서관에서 발행하였다.

1914년(36세) 『불교대전』을 범어사에서 발행하고 1917년(39세) 『정선강의 채근담』을 신문관에서 발행하였고 항일 투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12월 3일 밤 10시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정돈석擬情頓釋이 되어 진리를 깨치고, 오도송을 남겼다.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지를 창간했다. 1919년(41세) 3.1운동을 주도,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삼장을 첨가하였다. 1923(45세)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하였고,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지원하는 강연을 하였다.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 총재를 역임하였다.

1925년(47세) 오세암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하엿다. 1927년(49세) 1월 신간회를 발기하였으며, 5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에 뽑혔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민중대회를 개최하였다. 1931년(53세) 월간 [불교]지를 인수하였고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으며, 1932년(53세) 조선불교 대표인물 투표에서 최고득점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한용운 422표, 방한암 18표, 박한영 13표, 김태흡 8표, 이혼성 6표, 백용성 4표, 송종헌 3표, 백성욱 3표, 3표 이하는 생략. 불교지 93호에 발표됨). 1933(54세) 유숙원씨와 재혼하였고, 이때를 전후하여 『유마힐소설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몇 분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었으며, 이때 총독부 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

1940년(62세) 『불교』지 2월호에 『유마힐소설경』 연재를 시작하였고, 1943년(65세) 조선인 학병의 출정을 반대하였다. 1944년(66세) 6.29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하였으며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한용운은 불자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민중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등 사회 참여가 활발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3·1운동에 가담하고 독립선언서를 공개하여 낭독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는데, 기존의 시조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를 취했으며, 향토적 정서가 묻어나는 언어와 서민적인 시어 활용으로 민중정신을 반영했다. 독립을 향한 열망, 자연 등을 ‘님’으로 표현했고,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화법으로 검열을 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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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6월 13일
쪽수, 무게, 크기
168쪽 | 110*174*20mm
ISBN13
9788908062825

출판사 리뷰

이 책을 읽는 분에게

만해는 1879년 충남 홍성군 주북면 옥동에서 태어났다.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세도정치를 펴는 한편, 민씨 일파와 대원군과의 권세 다툼이 절정에 달했던 때였다. 안으로는 양반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했고, 밖으로는 혼란한 민심을 틈타 외국의 세력이 침투했다. 일본은 고종13년 병자수호조약을 계기로 무력적 침략을 감행했다. 이런 혼란기에 만해는 태어났던 것이다. 그는 6세 때부터 사상과 학문의 바탕을 쌓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18세까지 주로 유교의 경서를 읽었다. 18세에 그는 동학혁명에 참가했다.

그러나 동학혁명의 실패로 그는 몸을 피하기 위해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거기서 머슴으로 시작한 것이 인연이 되어 불교를 공부하게 되었다. 26세인 1905년 백담사로 들어가 중이 된다. 그리고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기도 했다. 일본의 강제에 의한 합방이 이루어지자 1910년 이시영, 신백우, 윤세복 등의 동지와 함께 민족 광복을 위해 소야하(小也河)에 의병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모으며, 만주지방에 흩어져 있던 독립군 훈련장을 찾아다니며 독립사상를 고취시켰다.

1913년 《불교유신》을 발행하여 당시의 부패한 교단과 승려의 근본적인 유신을 주장했다. 1918년 교양지 《유심(惟心)》을 발간하여 신문화(新文化) 사업을 벌이면서 문학 창작에 정열을 쏟았다. 1919년 3_1운동의 민족대표로 활약,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문]에 공약 3장을 첨가시켰으며, 1920년 7월 감옥에서 [3_1 독립선언 이유서]를 집필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했고, 1927년 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총동맹으로 조직을 개편하여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는 한편,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52세 때인1931년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어 젊은 승려들을 계몽, 진로지도, 혁신사상을 고취시키면서 소설 [흑풍(黑風)] 등을 창작했고, 1937년 불교계통의 항일단체인 만당사건의 배후자로 피검되기도 했다. 그는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과 영양실조로 고생하다 1944년에 65세로 입적(入寂)하였다.

이상은 만해의 대략적인 약력 소개에 불과하다. 이로써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이 민족의 수난기에 태어나 그 어둠을 밝혀, 잃었던 주권을 찾아보려고 전력투구했던 혁명가인 동시에 독립투쟁가였으며, 새로운 문화로 사회를 개화하려 했던 진취적 사상가였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호국불교의 입장에서 불교의 개혁을 주장한 승려이기도 했으며 민족정신을 일깨운 시인이기도 했다. 그의 파란만장했던 생애의 각양각색의 모습과 활동의 공통점은 초인적인 힘으로 일제하(日帝下)의 암담한 현실에서 중생을 구하려 했던 집념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의 친구들이 지어준 심우장은 북향(北向) 집이었는데, 그 이유는 만해 자신의 주장으로 총독부를 등지려 함이었다. 그는 일제치하에서는 호적을 만들지 않았으며, 딸의 취학도 거부했고, 일본어로는 절대 글을 쓰지 않았으며, 외국어(일본어)를 모르는 것을 자랑으로 삼을 정도로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리고 가족에게는 엄하면서도 매우 자상했고, 친일(親日)로 변절한 친구와는 절교를 결행했다. 이광수가 창씨개명한 후 찾아왔을 때 인사도 받기 전에 “너 이놈, 보기 싫다. 다시 보이지 마라”라고 하며 쫓았고, 그의 가난을 도우려는 친일 인사의 도움은 극구 거부했다.
만해의 ‘옥중투쟁 3대원칙’은 유명하다. 그 내용은 ① 변호사를 대지 말것, ②사식(私食)을 취하지 말 것, ③보석(保釋)을 요구하지 말 것으로, 어떤 난관이라도 철 같은 의지로 극복하려는 선언이다. 그는 ‘일제하의 이 나라가 온통 감옥인데 무슨 변호사냐’라는 생각이었다. 그는 정의 이외의 것은 행동으로 때려부수려는 확고불변한 신념의 과단성으로 행동했다. 이러한 실천성 때문에 일제는 그를 꺾지 못했다. ( - 문학평론가 강성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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