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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사|저자의 글
1장 미국,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 인정 17 -1905~1910년 2장 미국의 인도주의적 관심과 외교적 무관심 29 -1919년 3·1운동, 파리강화회의와 1921~1922년 워싱턴회의 1. 한국 독립운동진영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과3 ·1운동 31 2. 파리강화회의 한국 대표의 청원과 미국대표단의 반응 39 3. 서울과 동경 주재 미국 외교관들의 반응 45 4. 재미 한국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미국의 인도주의적 관점 52 5. 1921~1922년 워싱턴회의와 미국의 한국 문제 무관심 62 3장 한국 독립운동의 대미외교와 미국 대한정책의 전환 71 -1941~1945년 1. 1941년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미국 대한정책의 전환: “무관심의 종언 ” 73 2. 1943년 카이로회담·카이로선언: 한국 독립과 국제신탁통치의 이중적 선언 86 3. 1945년 얄타회담·포츠담회담: 한국 문제의 미결정 96 4장 미군정의 실시와 표류하는 미국의 대한정책 105 -1945~1948년 1. 1945년 8월 38선 분할의 결정: 군사적 편의와 준비된 정책 사이 107 2. 미군정의 실시: 군부와 국무부의 대한정책 차이 114 3. 1946~1947년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과 미소공동위원회 123 4. 1947년 주한미군 철수 논쟁과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 132 5. 한국 문제의 유엔 이관과 한국 정부의 수립, 주한미군의 철수 145 5장 한국전쟁과 한미동맹의 성립 155 -1950~1953년 1. 북한의 공격과 미국의 개입, 유엔 안보리의 참전 결정 157 2. 38선 북진과 북한 점령을 둘러싼 한미 갈등 167 3. 휴전회담과 진지전, 포로문제 182 4.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동맹의 성립 189 맺음말 201 |
Jung Byung-joon,鄭秉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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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한국이 식민지가 되었을 때 미국은 근대 제국주의 역사상 최초의 조약에 의한 식민지 창출, 식민지 통합을 환영했다. 미국이 관심을 가진 유일한 한국 관련 문제는 운산금광 등 경제적 이익의 유지, 종교적 선교의 특권 유지, 기독교 학교·병원·시설에 대한 권리 유지 등이었다. 미국이 개입된 이런 측면을 제외하곤 한국은 여전히 ‘은자의 나라’로 남았다
--- p.24 워싱턴회의는 태평양지역의 현상유지에 관한 4개국 조약(미국·영국·이탈리아·프랑스), 승전국의 군사력 순위를 결정하기 위해 주력함 보유율을 정한 해군군축조약(미국·영국·일본·프랑스·이탈리아), 중국의 문호개방·기회균등을 협정한 9개국 조약 등을 체결하고 1922년 2월 6일 폐막되었다. 1921년 내내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에게 미일 충돌설, 미일 개전설이 희망 속에 확산되었지만, 워싱턴회의는 1차 대전 승전국이자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리품 정리와 군사적 위계서열을 확정한 채 한국의 목소리에는 어떤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 p.65 매트레이(James I. Matray)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미국이 20세기 초반 이래 지속해 온 한국에 대한 “무관심의 종언(An End to Indifference)”이 이뤄졌다고 평가했다. 때마침 재미 한인사회는 오랜 사회 풍파를 딛고 통일운동을 벌였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41년 4월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고, 재미한인사회의 통일조직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만들었다. 한인 7천여 명이 거주하는 하와이에 의사부를, 3천여 명이 거주하는 본토에 집행부를 둔 이 위원회는 단순한 교민단체가 아니었다. 재미한족연합회는 항일전선의 통일, 임시정부 봉대, 군사운동, 대미 외교기관 설치, 독립금 모금 등을 자신의 임무로 내세운 독립운동기관이었다. --- p.74~75 서울·동경·워싱턴의 정보당국자들은 1950년 봄 이래 북한군의 군사력 강화, 병력·무기 등의 38선 전진 배치, 38연선 주민 소개 등 전쟁 징후와 관련된 정보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 잘못된 가정법과 논리에 사로잡혀 정보를 주관적으로 평가했다. 북한이 소련의 괴뢰이며, 북한이 남한을 공격함으로써 소련이 미국을 향해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거대 전제를 세움으로써 전쟁 징후를 나타내는 중요한 정보들은 제대로 평가되거나 주요 관심을 끌지 못했다. --- p.153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체결 시점에서 한국과 미국의 비대칭적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한국 측에서는 20세기 초반부터 고대하던 미국의 방위공약을 조약으로 확보한 것이었고, 미국 측에서는 아시아 태평양의 다른 동맹에게 제공한 안전보장을 제공하면서 이를 휴전협정 체결의 비용으로 판단했다. 한미 합의가 결정되자, 5조 63항으로 구성된 휴전협정이 1953년 7월 27일 체결될 수 있었다. 유엔군 수석대표 해리슨 중장, 공산군 대표 남일이 영어·한국어·중국어로 작성된 3통의 휴전협정서·부속협정서에 서명했고, 이어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김일성 조선인민군총사령관, 펑더화이 중국인민지원군총사령관이 서명했다. 한국은 상호방위조약과 군사원조를 획득했지만, 휴전협정에서 배제되었고, 한국군 지휘권을 유엔군에 이양했다. --- p.1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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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20세기, 한미 관계의 기원과 형성
“미국의 대한정책은 어떻게 무관심에서 동맹으로 바뀌었는가”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을 인정했던 20세기 초 미국의 대한정책에서 3·1운동과 독립운동진영의 대미외교, 태평양전쟁과 미국 대한정책의 전환, 해방과 미군정, 한국전쟁, 그리고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까지. 『근현대 한미 관계사: 기원과 형성 1910-1953』은 오늘날 한국의 외교와 안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한미 관계가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를 추적한다. 저자는 러일전쟁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한국전쟁이라는 국제정세의 격변을 중심으로 미국의 대한 인식과 정책이 변화해온 과정을 사건 중심의 연대기적 서술로 정리한다. 현재의 한미동맹만을 놓고 보면 한국과 미국의 밀접한 관계가 오래전부터 지속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보여주는 20세기 전반의 한미 관계는 훨씬 복잡하다. 한국은 위기 때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 조항과 미국의 선의에 기대를 걸었지만, 미국은 오랫동안 한국 문제를 일본의 내정으로 취급했다. 이러한 무관심은 1941년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비로소 전환되었고, 이후 해방과 점령, 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은 한반도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 변화의 과정을 따라가며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어떻게 현대 한미 관계의 원형을 형성했는지를 살펴본다. 미국은 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했는가 그러나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의 태도는 달라졌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정부는 일본을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할 수 있는 동아시아의 세력으로 평가했고,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미국은 가장 먼저 서울의 외교공관을 철수했으며, 1910년 한국 강제병합 역시 승인했다. 한국이 조미조약의 약속과 미국의 선의에 기대를 걸었던 것과 달리 미국은 자국의 태평양 전략과 국제정치적 이해에 따라 움직였던 것이다. 이후 한국 문제는 오랫동안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일본의 국내 문제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의 태도는 달라졌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정부는 일본을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할 수 있는 동아시아의 세력으로 평가했고,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미국은 가장 먼저 서울의 외교공관을 철수했으며, 1910년 한국 강제병합 역시 승인했다. 한국이 조미조약의 약속과 미국의 선의에 기대를 걸었던 것과 달리 미국은 자국의 태평양 전략과 국제정치적 이해에 따라 움직였던 것이다. 이후 한국 문제는 오랫동안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일본의 국내 문제로 취급되었다. 3·1운동은 미국의 마음을 움직였는가 2장 「미국의 인도주의적 관심과 외교적 무관심」은 1919년 3·1운동과 파리강화회의, 1921~1922년 워싱턴회의를 중심으로 한국 독립운동과 미국의 반응을 살펴본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국제정세의 변화를 독립의 기회로 인식했다. 상하이의 여운형과 김규식, 미국의 이승만과 재미 한인사회 등 세계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은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 미국의 지원을 얻으려 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와 국내외 독립운동의 움직임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2·8독립선언과 3·1운동으로 이어지는 동력이 되었다. 3·1운동은 미국 사회에 한국 문제를 알리는 데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주한 선교사와 미국의 종교계·언론·정치권에서는 평화적인 독립운동과 일본의 탄압에 대한 인도주의적 관심이 나타났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대한정책은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 문제를 일본의 내정으로 판단했고,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지지하거나 일본과 외교적 갈등을 감수하면서까지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를 ‘인도주의적 관심과 외교적 무관심’이라는 서로 다른 두 태도로 설명한다. 태평양전쟁은 어떻게 ‘무관심의 종언’을 가져왔는가 3장 「한국 독립운동의 대미외교와 미국 대한정책의 전환」에서는 1941년 태평양전쟁을 기점으로 미국의 한국 인식이 크게 달라지는 과정을 추적한다. 1910년 이후 한국을 일본의 국내 문제로 취급했던 미국은 일본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대한정책을 마련해야 했다. 한국을 일본에서 분리해 독립시키는 것이 미국의 전후 구상에 포함되면서 한국은 더 이상 일본의 일부가 아니라 독립되어야 할 지역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를 미국 대한정책에서 ‘무관심의 종언’이라고 설명한다. 1943년 카이로회담과 카이로선언은 이러한 변화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카이로선언에는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로 만들겠다는 약속과 함께 ‘적절한 시기’에 독립시킨다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은 한국이 즉시 독립국가를 운영할 정치적 자치능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했고, 국제신탁통치를 거쳐 독립시키는 방안을 구상했다. 이에 한국 독립운동진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과 즉각적인 독립을 요구하면서 미국을 상대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이 시기부터 한반도는 미국의 전후 동아시아 질서 구상 속에 본격적으로 포함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미국의 대한정책은 왜 표류했는가 4장 「미군정의 실시와 표류하는 미국의 대한정책」에서는 해방 직후 38선 분할과 미군정, 모스크바 3상회의와 미소공동위원회,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주한미군 철수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본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한반도는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직접 군정을 실시했지만, 한국의 정치·사회 상황에 대한 이해와 충분한 준비 없이 점령정책을 추진해야 했다. 현지 미군정의 국가주의적 정책과 미국 국무부가 추구했던 국제협력적 대한정책 사이에도 차이가 존재했다. 미국과 소련은 모스크바 3상회의를 통해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에 합의했지만, 이를 둘러싼 국내 정치세력의 대립과 미소 간 갈등으로 미소공동위원회는 결국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남한에 미국식 제도와 가치가 빠르게 자리 잡는 과정에도 주목한다. 개항 이후 교회·학교·병원 등으로 축적되어온 미국 기독교와 한국 사회의 관계는 해방 이후 미군정과 결합하면서 친미적 정치·사회세력이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뒤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별도의 안보공약이나 동맹조약을 제공하지 않은 채 1949년 주한미군의 철수를 완료했다. 한국전쟁은 한미 관계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5장 「한국전쟁과 한미동맹의 성립」에서는 1950년 북한의 남침에서 미국의 참전, 38선 북진과 중국의 개입, 휴전회담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미국은 한국과 동맹관계를 맺지 않았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하자 미국은 즉각 전쟁에 개입했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역시 유엔군 파견을 결정했다. 전쟁은 북한과 남한의 내전적 성격을 넘어 미국과 유엔, 중국이 개입하는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 북진과 북한지역의 통치권을 둘러싸고 한국과 미국 사이에 갈등이 나타났고, 중국군의 참전 이후 전선이 교착되면서 1951년부터 휴전협상이 시작되었다. 휴전을 둘러싼 한미 간의 입장 차이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이승만 정부는 휴전에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주장했고, 미국에 확실한 안보공약을 요구했다. 특히 반공포로 석방을 계기로 미국은 한국과의 방위조약 협상을 본격화했다. 한국은 휴전을 방해하지 않는 대신 한미상호방위조약, 한국군 증강과 군사지원 등을 확보했고,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면서 양국 관계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처음부터 동맹’이었던 한미 관계라는 익숙한 인식을 다시 묻다 『근현대 한미 관계사』가 보여주는 한미 관계의 핵심은 ‘변화’이다. 20세기 초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했던 미국은 3·1운동에도 외교적 무관심을 유지했지만,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대한정책을 전환하고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반도에 깊숙이 개입했다. 한국 역시 대한제국의 거중조정 요구에서 독립운동진영의 대미외교, 한국전쟁기 안보공약 요구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미국의 지원과 개입을 요청했다. 이러한 양국의 이해와 선택이 맞물리면서 한미 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다. 그 전환점이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다. 저자는 이를 한국이 오랫동안 기대해온 미국의 방위공약이 현실화된 것이자 현대 한미 관계의 토대가 마련된 사건으로 평가한다. 이 책은 오늘날의 한미동맹을 당연한 결과로 바라보지 않고, 무관심에서 관심으로, 개입에서 동맹으로 이어진 역사적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현재의 한미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새롭게 살펴보게 한다. “실패한 근대라는 통념을 넘어, 대한민국의 형성과 성장을 새롭게 읽는다” [근현대 한국사 새로 읽기] 7권 8책은 한국 근대와 현대를 하나의 연속된 역사적 흐름으로 읽어내며, 오늘의 대한민국이 형성된 과정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교양·학술 총서이다. 우리 역사에서 근대는 종종 식민지화와 국권 상실로 귀결된 ‘실패한 역사’로 이해되어왔다. 이 때문에 근대와 현대를 함께 조망하는 시도는 많지 않았다. 이 시리즈는 이러한 통념을 넘어 대한제국과 독립운동, 분단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는 물론, 시민사회와 과학기술, 음악과 미술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를 움직여온 다양한 역사적 동력들을 하나의 시야 안에서 살펴본다. 각 분야의 권위 있는 연구자들은 한국 근현대사를 정치사 중심의 서술에 머물지 않고 외교, 사상, 문화, 예술, 과학기술, 시민사회의 성장 과정까지 확장하여 해석한다. 이를 통해 식민주의 역사관과 냉전적 인식을 넘어 한국 사회가 축적해온 역량과 창조성, 그리고 세계 속에서 형성해온 문화적 정체성을 새롭게 조명한다. 『근현대 한국사 새로 읽기』 시리즈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한국인이 만들어온 변화와 성취의 과정을 입체적으로 탐구함으로써, 대한민국의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기 위한 새로운 역사 읽기의 길을 제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