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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2일
지도의 암실 휴업과 사정 지팡이 역사 불행한 계승 지주회시 날개 봉별기 동해 황소와 독깨비 공포의 기록 종생기 환시기 실화 단발 김유정 미주 작품 해설 이상 연보 |
李箱, 김해경金海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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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나의 일생에 다시없는 행운이 돌아올 수만 있다 하면 내가 자살할 수 있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 순간까지는 나는 죽지 못하는 실망과 살지 못하는 복수(復讐)-이 속에서 호흡을 계속할 것이다. 나는 지금 희망한다. 그것은 살겠다는 희망도 죽겠다는 희망도 아모것도 아니다. 다만 이 무서운 기록을 다 써서 마치기 전에는 나의 그 최후에 내가 차지할 행운은 찾아와 주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무서운 기록이다.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
--- 「12월 12일」 중에서 가볍게 주먹으로 소운의 허리께를 쿡 찌르면서, 상은 울며 웃는 상판이었다. 이런 때 그는 가장 많이 가면(假面)을 사용하는 것인데, 그 가면이야말로 상 자신의 본얼굴에 제일 가까운 것인 줄을, 그 자신의 본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으로선 결코 알아챌 수는 없다. 모르면 몰라도 상 자신조차-가 그 정교함에는 미처 주의하지 못한다. --- 「불행한 계승」 중에서 밤-홍수가 고갈한 최초의 밤-신기하게도 건조한 밤이었다. 안해야 너는 이 이상 더 야웨서는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명령해 둔다. 그러나 안해는 참새 모양으로 깽깽 신열까지 내어 가면서 날이 새도록 앓았다. 그 곁에서 그는 이것은 너무나 염치없이 씨근씨근 쓰러지자마자 잠이 들어버렸다. 안 골던 코까지 골고-아-정말 양돼지는 누구냐. 너무 피곤하였든 것이다. 그냥 기가 막혀 버렸든 것이다. --- 「지주회시」 중에서 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늠바리인 것이다. 내나 안해나 제 거동에 로직을 붙일 필요는 없다. 변해할 필요도 없다.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면서 세상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이 발길이 안해에게로 돌아가야 옳은가. 이것만은 분간하기가 좀 어려웠다. 가야 하나? 그럼 어디로 가나? --- 「날개」 중에서 밤은 이미 깊었고 우리 이야기는 이게 이 생(生)에서의 영이별(永離別)이라는 결론으로 밀려갔다. 금홍이는 은(銀)수저로 소반 전을 딱 딱 치면서 내가 한 번도 들은 일이 없는 구슬픈 창가(唱歌)를 한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구비구비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질러 버려라 운운(云云).” --- 「봉별기」 중에서 나는 내 언어가 이미 이 황막한 지상에서 탕진된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만치 정신은 공동(空洞)이요, 사상은 당장 빈곤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유구한 세월을 무사히 수면(睡眠)하기 위하야, 내가 몽상(夢想)하는 정경을 합리화하기 위하야, 입을 다물고 꿀항아리처럼 잠자코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 「동해」 중에서 나는 물론 그 자리에 혼도(昏倒)하야 버렸다. 나는 죽었다. 나는 황천을 헤매었다. 명부(冥府)에는 달이 밝다. 나는 또다시 눈을 감았다. 태허(太虛)에 소리 있어 가로대, 너는 몇 살이뇨? 만이십오 세와 십일 개월이올씨다. 요사(夭死)로구나. 아니올씨다. 노사(老死)올씨다. --- 「종생기」 중에서 그날 나도 초저녁에 술을 좀 먹고 곤해서 한참 자는데 별안간 대문을 뚜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1시나 가까웠는데-하고 눈을 비비고 나가 보니까 유정이 B군과 S군과 작반(作伴)해 와서 이 야단이 아닌가. 유정은 연해 성(盛)히 곤지곤지 중이다. 나는 일견에 “익키! 이건 곤지곤지구나” 하고 내심 벌써 각오한 바가 있자니까 나가잔다. --- 「김유정」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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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명 속에 갇힌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이상의 문학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의 소설 세계 전체를 관통하며 읽어야 한다. 이 『날개: 이상 소설 전집』은 개별 단행본에서 온전히 확인하기 어려웠던 이상의 소설 16편을 생전 미발표 유고까지 빠짐없이 망라했다. · 실험과 도약의 서사: 최초의 장편 「12월 12일」부터 전위적인 동물 기호로 인간 문명의 퇴행을 꼬집은 「지도의 암실」, 단편 「휴업과 사정」, 「지팽이 역사」 · 파산과 절망의 내면 풍경: 제비 다방 폐업 이후 생활의 궁핍과 심리적 불안을 날것 그대로 담아낸 「공포의 기록」, 「불행한 계승」 · 자의식과 관계의 해체: 금홍과의 애증 어린 관계를 바탕으로 식민지 근대인의 분열을 포착한 ‘금홍 3부작’(「지주회시」, 「날개」, 「봉별기」) · 확장된 서사의 층위: 순박한 설화를 현대적으로 변주한 이상의 유일한 동화 「황소와 독깨비」, 지적인 여성과의 심리적 거리를 짚어낸 「환시기」와 「동해」 · 도쿄에서의 마지막 불꽃: 죽음을 예감하며 매일의 생을 하루 단위로 치열하게 불태운 걸작 「종생기」와 사후 발굴된 유고작 「실화」, 「단발」, 「김유정」 이처럼 16편 전편을 하나의 흐름 속에서 읽어내는 작업은 파편적 이미지에 가려져 있던 ‘소설가 이상’의 서사적 야심과 고투를 비로소 실체로 마주하게 해준다. 파격의 문장을 가장 온전하게 마주하는 법 원전의 숨결을 살리고 주석으로 이해를 돕다 이상의 텍스트는 파격적인 문장부호와 난해한 어휘로 팽팽한 편집적 긴장을 요구한다. 이 책은 독자가 이상의 소설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띄어쓰기는 현행 맞춤법에 맞게 다듬었지만, 1930년대의 표기법과 특유의 문장부호는 그대로 살려 원전의 숨결을 보존했다. 현대어로 무리하게 가공하지 않은 자리는 방대한 주석으로 채워 넣었다.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이상 고유의 조어와 관념어, 당대의 시대 어휘마다 책임 편집자가 꼼꼼히 주해를 달아 독자들이 원형을 음미하면서도 복잡한 글을 막힘 없이 읽어낼 수 있도록 했다. ‘박제된 천재’의 자의식과 매일의 종생 신범순 명예교수의 독보적 해설 한국 근대문학 연구와 이상 비평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신범순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의 심층 해설 「동물왕국과 공포의 성채 속 종생들의 황금빛 서사」를 실어 전집의 깊이를 더했다. 이상의 소설을 단순한 신변잡기나 기벽의 산물이 아닌 흉내와 모방의 굴레를 거부하고 단단한 주체로 서고자 했던 고유한 ‘동물 기호학’(「지도의 암실」), 삼십삼 번지 방 안에서 질식해 가는 자아의 실존적 조건(「날개」) 그리고 일상의 기계적 모방을 깨고 자의식의 틈(郤)을 뚫어 하루를 평생처럼 살고자 했던 ‘극유산호(郤遺珊瑚)’의 창작 미학(「종생기」)으로 엮어내며 이상의 텍스트가 지닌 내적 논리를 단단하게 해체하고 복원해 낸다. 상식의 바깥으로 밀려난 자의 고독, 권태와 불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의식의 날을 벼렸던 이상. 소설 16편 전체를 가장 정확하고 온전한 텍스트로 담아낸 이 책은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가장 도발적이고 눈부신 심연으로 독자들을 이끌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