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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시인의 말·5

1부

모르는 호두·15
어떤 슬픔은 냄새를 가질 수도 있다·16
새들은 둥지를 틀고·18
두고 온 사과·20
노랑은 아직도 마르지 않는다·22
밑줄 그어둔 책·24
풀 냄새·26
중독·28
도마의 일·30
한순간의 스냅·32
나무에 등을 대고·34
안내·36
니트의 성질·38
카페인 우울증·39
갱신·40

2부

불협화음·43
배회의 기술·44
방음벽·46
스키드마크·47
뜻밖의 연착·48
오후의 일·50
물을 다 쏟아버리고·52
알 수 없는 인과·54
흑백사진·56
수평·58
폭설의 시간·60
테베레강에서·62
미해결 인물·64
화살표를 따라가다가·66

3부

마른 장미·69
여분의 열매·70
마리오네트 주름·72
식물성 편지·74
미리 눈 감는 버릇·76
오렌지 자몽 티·78
레이스를 푸는 여자·80
하늘을 오래 올려다보았다·82
‘우리’라는 이름의 거리·84
사십구 이후·86
마요네즈·88
종점을 향해·90
공갈빵·92

4부

모란이 아닌 당신·95
진열된 울음·96
적정 온도·98
작은 배·100
불꽃놀이·102
부음으로 온 안부·103
맨발의 동전·104
합평·106
우리는 같은 구원을 꿈꾼다·107
길고 긴 골목·108
선반·110
만보·112
내가 낚일 수도 있었던 시간·114
애벌레 구하기·116

산문 | 조영란
독특한 틈·117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10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126쪽 | 124*198*8mm
ISBN13
9791192651491

책 속으로

나의 뜰에는 모란은 없지만
아직도 모란은 자라고
기억으로 회자되는 사적인 계절이 있지

꽃잎 흔들어 놓고 숲으로 사라져 버린
나비는 이제 보이지 않지만
숲 너머의 문 근처를 맴돌던 날개가 약속처럼
바람이 되어 불고 있어

모란의 그림자가 흔들릴 때마다
나는 노래를 불렀지

그것은 알면서도 모른 체했던 시간들
영영 끝내지 못할 시 한 편

제 이야기를 숨긴 채 달은 기울고
모란은 슬픔을 잊은 채 피어나고
---「모란이 아닌 당신」중에서

내가 입을 다물자
너는 없던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뭔가 있는 것 같다고

신비는 늘 그렇게 왜곡되곤 하지

상상은 넓은 들판을 뛰어다니고
이야기는 계속된다
너는 풀을 뜯는 이국의 말들을 그려내고
민들레 풀씨에 바람의 관절을 달아준다

은유는 멈추지 않는다
소문은 그늘 아래 잎맥처럼 번지고
서로의 이름을 닮아간다

나는 연못처럼 고요하다
뛰어들고 싶어 안달하는 눈동자
수면 위를 겉도는 가벼운 파문들

차라리 다행이다
너의 오해가 나의 비밀을 가로질러 가고
나의 침묵이 너의 상상을 살찌우는 이 기형적인 평화
발을 곧추세워도 닿지 않는 바닥이
우리를 침몰시키지 않고 떠받치고 있다는 게

너는 거기서
나는 여기서

이제 확인할 차례다
가장 완벽하게 분리되어 비로소 안전해진
‘우리’라는 이름의 거리
---「‘우리’라는 이름의 거리」중에서

우리는 서로 원수도 아닌데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

너를 밀치고 갈지 피해서 되돌아갈지 생각한다

여기가 우리의 벼랑이라면
서로를 밀쳐낼 것처럼 불안하다면
그것은 이미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너는 악수가 뭔지도 모르면서 손을 내미는 사람
덥석 손잡을 생각은 없지만 손바닥 온기는 탐났다

끌어당길지 끌려갈지
잡아보면 안다는 이치를 모른 체하는 나에게 너는 말했다
우리 잠시 그냥 이대로 있기로 하자
기를 쓰고 다리를 건너봐야 별것 없을 거야

출렁이는 강물 한가운데였다

아직도 외나무다리에 서 있다
서로 떠밀지만 않으면 영원히 이대로일 것 같은
우리 사이에 있는 거리가
붙잡아주는 끈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수평」중에서

손바닥 위로 시간이 지난다

진한 손금 외엔 잡힌 것이 없다
쥔 자리만 선명하다

너무 세게 움켜쥐어 짓물러 버린 이름들
펴지지 못한 채 굳은살이 되어버린 자리들

또 쥔다

지문만 남아 있다
땀도 열도 없이

텅 빈 악력 속에 터지지 못한 열

나는 바닥을 짚는다
한쪽으로 쏠리는 체중
조금 더 버텨보는 빈손
---「갱신」중에서

출판사 리뷰

◨ 시집 산문 들여다보기—조영란 산문으로 바꾸기

독특한 틈
조영란 시인

모자를 선물 받았다. 내 머리보다 큰 모자는 자꾸 시야를 가리고 귀를 덮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게 되자 점점 걷는 일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알았다. 내 어둠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머리를 담아내는 ‘모자’라는 공간은 이토록 구체적이고 직설적이다. 어제는 모자가 작아서 머리가 아팠고 오늘은 너무 크고 헐거워서 앞이 캄캄하다. 맞지 않는 모자를 쓰고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서 어울리는 사람답게 살려고 취했던 것은 일종의 포즈였던 것. 이젠 모자를 벗어볼까. 강한 햇빛에 있는 그대로의 민낯을 들이대 볼까.

대학 졸업 축하 자리에서 한 선배는 내게 말했다. 학교를 떠나 사회생활을 해도 언제나 그 자리에 맞는 사람답게 살라는 충고였다. 자라면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엄마에게서 들은 이야기도 모나지 않게 그저 둥글둥글 살아가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튀지 않는 삶을 선호했다. 최선을 다해 타인이 원하는 나를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의심도 확신도 없이 ‘지금, 여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나는 내 고유의 색깔을 잃어갔다. 맞지 않는 모자와 머리 사이의 공간처럼 ‘가장 나답지 않은 나’와 ‘가장 나다운 나’와의 간극에서 비롯된 갈등이 내 시작(詩作)의 시작(始作)이었다.

신선한 공기와 직사광선으로부터 보호받았던 시간은 그럴만한 논리와 당위가 있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삶에도 의미와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즐거움도 슬픔도 없는 권태로 이어졌다. 우울증이 철학의 시작이라고 했던 사람이 지젝이었나. 그렇게 욕망을 욕망하지 않는 날들이 점점 많아졌다. 생각은 너무 멀리 가서 돌아오지 않고 어느 날은 어딘가에 처박혀 빠져나올 줄 몰랐다. 이렇게 갈피 없는 삶의 정면을 보는 일,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 또 발견한 척 가장하는 가여운 제스처까지. 나는 그 모두가 시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너는 손이 너무 차갑구나

손이 따뜻해지면
제가 이 알을 부화시킬 수 있을까요

일생을 굴려도 불가능한 미래를
더는 두고 볼 수 없다고

껍질 속에 갇힌 것들은 생각이 많고
그러다 때를 놓치는 일이 잦은 법이라고

망치는 약한 곳만 골라 내리친다
악의도 선의도 없이

우리는 서로 통증의 목록을 쥐고 있다
-「모르는 호두」 전문


내 안에 등장하는 나라는 화자들은 만남이 원활하지 못하다. 스스로 격리되고 단절된 자폐의 문 앞에 서 있을 때가 많다.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이 내게 존재하는 한 왜곡된 자아로부터 벗어나 이질적인 나를 발견하는 일은 시를 쓰는 일과 별개의 작업일 수 없다. 무언가를 만나기 위해 통과의례처럼 미리 겪어야 하는 고독과 서성이는 그 시간이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행복하다면 믿을 수 있을까.
꺼내고 싶었다. 내 안에서 울리는 심장 박동 소리, 오랫동안 마음에 끼어 있던 낯선 기억들을 꺼내고 싶었다. 긴 시간 불편한 자세로 살다가 변형된 자의식의 측만에서 삶의 원형을 회복하고 싶었다.


속눈썹이 덮고 있는 네 눈동자의 비밀을 상상하다 보니 네가 누군지 모르겠다 우울이 몰려다닌다 밤낮으로 몰려다니는 연쇄 우울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너를 읽고 또 읽고

파고들다 보면

깊은 그늘에 갇힌 너의 첫인상
-「미해결 인물」 부분

절벽에 서 있는 나를 시로 옮기는 일은 나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어 현장을 누비는 일, 그것은 아마도 매일매일 좌절하는 한 사람의 나를 목격하고 절망의 단서를 찾으려 동분서주하는 일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 시인의 말

도착하지 않은 것들의 목록이 있다.

기꺼이 길을 잃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길 위에 서 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배회하던 하루도 나름대로 눈부셨다.

2026년 10월 조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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