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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한 건축
아파트에서 식물원까지 공간은 어떻게 우리를 만드는가
조진만 저
미래의창 2026.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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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여는 글 공간을 쓰는가, 공간에 쓰이는가?

1장 학교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던 날들

그날의 공기 | 배움의 원형과 타락의 연대기 | 해부대의 시선 | 마당과 누각 사이, 병산서원 | 표준 설계도의 유령 | 마을이 된 학교 | 사라진 교실의 벽 | 그날의 공기를 바꾸는 일

2장 아파트
우리는 집을 샀고 집은 삶을 정했다

집이 먼저 깨어난다 | 새로운 삶의 표준, 바이센호프 주거단지 | 기능으로 나뉜 방, 자산이 된 집 | 겹겹의 문으로 세워진 사적 요새 | 마당을 삼킨 거실 | 남향의 적막, 북향의 노동 | 집과 바깥 사이의 한 겹, 발코니 | 도시를 삼킨 단지 | 삶을 찍어내는 금형 | 복제할 수 없는 삶의 형식 | 거주한다는 것

3장 일터
효율은 우리를 어떻게 길들였나

벌레가 된 아침, 지각의 공포 | 자본이 세운 바벨, 시그램 빌딩 | 관료의 미로가 된 기록관, 동인도회사 | 식민이 남긴 격자, 삼일빌딩 | 성공의 규격을 입은 사옥들 | 격자의 해부학 | 서로를 마주하는 일터 | 용도를 열어둔 장소 | 모두에게 똑같은 책상이 주어졌다

4장 도서관
우리는 책보다 침묵을 먼저 배운다

불타는 책 | 지식을 가둔 건축, 규장각 | 용해된 언어, 목록함의 유령 | 도시를 비켜선 지식의 사원, 남산도서관 | 냉전이 지은 화강암 신전, 국립중앙도서관 | 관계를 회복한 낡은 교사, 정독도서관 | 책을 지키는 그늘, 사유를 여는 빛 | 지식의 숭고 | 빈 중심을 둘러싼 창가, 엑서터 아카데미 도서관 | 풍경이 된 도서관 | 배경이 되어버린 책 | 불타지 않는 자리

5장 박물관
기억의 서랍은 누가 채우는가

누구나 자기만의 박물관을 가진다 | 궁궐을 박람회장으로 만든 시대 | 국보를 오려 붙인 콘크리트 | 금단의 땅에 세운 이정표, 전쟁기념관 | 성벽의 침묵과 콘텐츠의 반란, 국립중앙박물관 | 취향을 전시하는 자본 | 기억보다 먼저 세운 궁궐 | 공간 그 자체가 전시가 될 때

6장 광장과 길
권력은 왜 텅 빈 광장을 원했을까

국가의 스크린, 도시의 압력밸브 | 아스팔트를 덮은 초록 마스크 | 발효된 광장의 깊은 맛 | 재료가 만든 관계의 구조 | 거리의 계보, 사라진 골목들 | 모든 길이 광장이었다

7장 공원
깨끗해질수록 공원은 사라진다

느슨한 연대의 풍경 | 권력의 정원에서 도시의 심장으로, 센트럴 파크 | 하워드의 다이어그램, 가우디의 골격 | 이식된 풍경과 야만의 계절 | 일상을 통과하는 공원 | 120년의 진공을 메우는 마지막 시험지

8장 동물원
유리 너머의 동물, 유리 이편의 우리

브라운관 속의 스파이 | 철창에 갇힌 것은 동물만이 아니었다 | 궁궐에 들어선 동물원, 창경원 | 노아의 방주는 왜 칸을 나눴나 | 펭귄의 고문실이 된 걸작, 런던 동물원 | 평양보다 더 크게 지으라, 서울대공원 | 투명한 우리, 사파리에서 수족관까지 | 유리 이편의 우리

9장 식물원
자연을 살린다는 아름다운 착각

건축이라는 원죄와 녹색의 면죄부 | 녹색 금을 가둔 기하학의 감옥 | 유리 궁전과 기후 조작 기계, 수정궁 | 조선의 온실은 땅을 품고 있었다 | 표본이 된 식물, 삶이 된 온실 | 자본의 산소호흡기 | 조화 사이로 개망초가 자랐다

닫는 글 명사를 넘어 동사가 시작되는 건축

참고 문헌 | 이미지 출처

저자 소개 1

건축가. 정해진 사용법을 의심하며 공간에 스며든 안이함과 타성을 파고든다. 장소에 잠재된 가능성을 새로운 쓰임과 관계로 엮어왔다. 도시의 잘린 절벽에 세운 창신동 ‘채석장 전망대’, 독서와 산책을 연결한 ‘내를 건너서 숲으로 도서관’, 흙과 지형 자체를 놀이로 삼은 ‘산마루 놀이터’, 삼대가 따로 또 함께 살도록 입체적 마당을 둔 ‘층층마루집’을 설계했다. 버려진 군용 벙커를 바꾼 대방동 ‘청소년 벙커’, 고가도로 아래 빈 공간을 활용한 ‘다락옥수’, 닫혀 있던 취수탑을 사색의 장소로 바꾼 수성구 내관지 ‘생각을 담는 길’, 디지털 금융 시대에 은행의 역할을 돌봄과 일상의 만남으
건축가. 정해진 사용법을 의심하며 공간에 스며든 안이함과 타성을 파고든다. 장소에 잠재된 가능성을 새로운 쓰임과 관계로 엮어왔다. 도시의 잘린 절벽에 세운 창신동 ‘채석장 전망대’, 독서와 산책을 연결한 ‘내를 건너서 숲으로 도서관’, 흙과 지형 자체를 놀이로 삼은 ‘산마루 놀이터’, 삼대가 따로 또 함께 살도록 입체적 마당을 둔 ‘층층마루집’을 설계했다. 버려진 군용 벙커를 바꾼 대방동 ‘청소년 벙커’, 고가도로 아래 빈 공간을 활용한 ‘다락옥수’, 닫혀 있던 취수탑을 사색의 장소로 바꾼 수성구 내관지 ‘생각을 담는 길’, 디지털 금융 시대에 은행의 역할을 돌봄과 일상의 만남으로 넓힌 ‘하나은행 노원 사옥’ 등도 주요 작업이다. 한국일보와 경향신문에 건축 칼럼을 연재하며 공간과 삶의 통념을 도발하고 직시하는 글을 써왔다. 대한민국 젊은건축가상, 신진건축사대상, 공간문화대상, 서울시 건축상, 세계건축상 등으로 작업을 인정받았고, 미국 《아키텍처럴 레코드》의 ‘디자인 뱅가드’에 선정되었다. 저서로 《그를 만나면 그곳이 특별해진다》가 있다. 말보다 실천을 앞세워 왔다. 건축은 발로 장소를 읽어내며 생각을 세우는 일이라 믿는다. 이 책도 그 몸짓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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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11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352쪽 | 510g | 145*200*30mm
ISBN13
9791124073452

책 속으로

학교의 기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나무 한 그루가 나타난다. 루이스 칸(Louis Kahn)은 학교의 시작을 그 나무 아래에서 찾았다. 스스로를 선생이라 여기지 않던 한 사람이 몇몇 사람과 자신의 깨달음을 나누던 자리였다. 배움은 사람 사이에서 생긴다. 그래서 학교의 원형은 배움이 발생하는 행위의 들판이었다. 문명은 이 들판을 저마다의 언어로 번역했다. 그리스의 아고라(agora)는 정치와 일상 속에서 토론과 문답이 오가는 배움의 광장이었고 ‘녹야원(鹿野苑)’은 자연의 여백 속에 석가모니의 설법을 머물게 했다. 우리에게는 서원이 있었다. 거기서 배움은 마당과 누각을 오가며 자연과 마주하고 몸과 사유의 리듬을 바꾸는 일이었다.
--- p.20

교실 풍경은 이미 달라졌다. 초등학교 한 학급은 평균 20명 안팎으로 줄었고 교사와 아이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눈을 맞추
는 밀도 높은 수업의 가능성도 전보다 커졌다. 그러나 아이를 부르는 방식은 달라졌어도 아이를 앉히는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학교 건축은 여전히 대량 수용과 효율의 시대가 남긴 격자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 사이 배움의 도구는 교탁과 칠판을 훌쩍 넘어섰다. 손안의 화면에서 지식을 찾고 AI와 질문을 주고받는 아이들에게도 교실은 여전히 하나의 정면만 고집한다. 아이들이 접하는 세계는 넓어졌는데, 그 안에서 몸이 향하는 방향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았다.
--- p.42

한국 아파트의 거실을 보면 그 욕망의 궤적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복도를 따라 각 실이 분리되는 평면이 많은 유럽, 북미의 공동주택과 달리 한국의 전형적 아파트는 거실을 중심으로 여러 방과 주방이 맞물리는 평면을 발전시켜 왔다. 한국 아파트의 거실 중심 평면은 마당과 대청을 중심으로 방들이 관계 맺던 한옥의 공간 감각을 떠올리게 한다. 아파트의 거실은 바깥에 있던 마당의 역할을 집 안으로 끌어들인 현대적 변주였다. 지독한 공간 효율성이다. 복도를 생략하고 중심에서 각 방으로 동선을 분산시키니 작은 면적에서도 집이 넓어 보이고 이동 거리도 짧다.
--- p.64

등받이로 쓰던 소파를 과감히 치우고 거실 한가운데를 비워둔 채 맨바닥의 감각을 즐기는 일. TV가 차지하던 자리에 긴 식탁을 놓아 밥과 일과 대화가 뒤섞이게 하는 일. 어느 날은 침실에, 어느 날은 거실에 이불을 펴 잠자리를 옮기고, 발코니 한쪽을 식물과 햇빛에 내어주다가 문득 작은 텐트를 펴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보는 일. 도면에 적힌 ‘거실’과 ‘침실’, ‘발코니’라는 이름을 잠시 지우고 공간을 하나의 자유로운 판처럼 사용하는 이런 사소한 거부가 규격화된 평면 위에 한 사람의 삶을 새겨 넣는다.
--- p.84

개발자 로버트 프롭스트(Robert Propst)는 가구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철학으로 자세와 업무 방식의 변화를 수용하고 몰입과 협업을 오갈 수 있는 가변형 워크스테이션을 내놓았다. 그러나 가변성을 위해 고안된 모듈은 시장에서 더 많은 직원을 더 작은 면적에 수용하는 칸막이로 오역되었다. 그는 훗날 사람들을 규격화된 칸에 밀어 넣는 기업의 방식을 보고 “획일적 광기”라고 탄식했다. 한국에서는 이런 칸막이식 배치가 오랫동안 사무실의 표준으로 남았다. 2017년 한 사무 가구 기업은 “사무환경이 문화를 만듭니다”라는 문구를 브랜드 캠페인에 내걸었다. 개인의 작업 방식보다 조직의 규율과 밀도를 앞세운 한국의 대기업 사무실에서, 사무 가구는 실제로 하나의 문화를 만들었다. 파티션의 높이는 권한의 높이였고 통로를 향해 열린 책상의 방향은 개인이 어느 쪽으로 몸을 돌려야 하는지를 무언으로 지시했다.
--- p.108

책은 언제나 불안한 존재다. 세계를 다시 쓰려는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권력은 오래도록 책을 불태워 왔다. 기원전 213년, 진시황은 사상과 지식의 통제를 강화하며 역사서와 제자백가의 책들을 불태웠다. 불은 때로 사회의 불안을 도덕적 정화로 봉합하는 의식이기도 했다. 메디치 가문이 쫓겨난 피렌체에서는 종말과 정화를 부르짖던 광장에서 허영의 소각(Bonfire of the Vanities)이라는 명목으로 사치품과 책들을 한데 모아 불길에 밀어 넣었다. 수 세기가 지나도 권력은 군중을 정렬시키는 손쉬운 의식으로 광장의 화형을 택했다. 1933년 5월 베를린, 지금의 ‘베벨광장’에서 나치 독일 학생연맹의 주도로 대규모 분서가 자행되었다. 학생들은 ‘비독일적’이라 낙인찍힌 저작을 수거했고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의 연설 속에서 2만여 권의 책이 잿더미로 변했다.
--- p.124

현대 도서관에서 서가가 건축의 형상으로 전면에 나서면서, 책 역시 읽는 대상에 머물지 않고 도서관의 이미지를 만드는 재료가 되기 시작했다. 수많은 책이 쌓여 만들어내는 강렬한 풍경은 사람을 끌어들이지만, 책을 보여주는 일과 오래 보존하는 일 사이에는 새로운 긴장이 생겨난다. 2006년 문을 연 멕시코시티의 ‘바스콘셀로스 도서관(Biblioteca Vasconcelos)’에서는 그 변화가 압도적인 장면으로 나타난다. 알베르토 칼라치(Alberto Kalach)가 이끈 설계팀은 길게 뻗은 중앙 공간에 철골 서가와 열람층을 여러 겹 매달았다. 공중에 떠 있는 듯 중첩된 서가 사이로 깊은 시선이 끝없이 관통한다. 불레의 지식의 산맥이 중력을 잃고 공중으로 떠오른 듯한 풍경이다. 책은 여전히 실제 장서이지만, 한 권의 내용에 앞서 수만 권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집합적 형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 p.156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를 계기로 문을 연 ‘조선총독부박물관’은 훗날 ‘중앙청’으로 불린 총독부 본청사와는 별개의 독립 건물이었다. 근정전 동편, 왕세자가 거처하던 자선당과 비현각 터에 들어선 이 건물은 당시 조선에서 보기 드문 내화 구조였고 사무실로는 자경전을 사용했다. 궁궐의 전각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박물관을 세우며 다른 전각을 행정 공간으로 점유한 일은 일제가 조선의 과거를 식민 통치의 시선 아래 다시 배열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 p.173

전쟁기념관이 “우리는 지켜냈다”는 호국의 자리를 선점했다면 용산의 더 깊은 심장부에는 “우리는 오래되었다”는 역사의 명제가 자리를 잡았다.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404미터의 수평선으로 가로지르는 국립중앙박물관이다. 2005년 박물관이 안착한 이곳은 일본군 주둔지에서 미군 기지로 이어진 병영의 시간이 켜켜이 쌓이며 도시에서 도려내진 공백이었다.
--- p.190

매년 한 번씩, 뉴스 화면은 약속이라도 한 듯 기묘한 기하학의 향연을 송출한다. 평양 김일성광장에 도열한 이동식 미사일 발사대와 그 앞을 로봇처럼 뒤뚱거리며 지나가는 병사들의 칼 같은 열병식. 비슷한 장면은 베이징 ‘톈안먼광장’에서도 반복된다. 줄을 맞춘 탱크 부대와 붉은 깃발을 든 군중의 파도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어린 시절 내 눈에 새겨진 광장의 이미지는 TV 속 이런 장면들이었다. 사람과 병기가 하나의 기계 부품처럼 오차 없이 맞물려 움직이는 초현실적인 무대였다.
--- p.213

앞에서 본 광장들이 비장한 결기를 띠고 뉴스 화면의 배경으로 자주 소환될 때, 유럽의 오래된 광장은 헐거워진 슬리퍼를 끌고 나온 시민들의 일상과 정치를 한 바닥 위에 섞어낸다. 그들에게 광장은 빵을 사러 가다 마주치고 퇴근길에 에스프레소 한 잔을 기울이며 잠시 머무는 도시의 거실이다. 이 풍경의 기원에는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가 있다. 아크로폴리스가 신을 위해 높이 들려진 성역이라면 그 아래 펼쳐진 아고라는 인간의 땀 냄새와 생선 비린내가 진동하는 낮은 땅이었다.
--- p.229

현대 한국 도시의 공간적 부조화는 틈과 여백을 따라 작동하던 길의 도시 위에 서구의 광장이라는 전혀 다른 공간 문법을 이식한 데서도 찾을 수 있다. 광장은 한곳에 응축된 기념비적 장소지만 길은 도시 전체의 실핏줄처럼 퍼져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장이다. 우리는 그동안 텅 빈 광장을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하며 동상을 세우고 잔디를 깔았다. 그러나 관계는 채워 넣는다고 생기지 않는다. 흐름과 결이 엇갈리고 서로 다른 발걸음이 우연히 부딪치는 자리에서 자란다. 도시의 매력은 수많은 사용이 겹쳐 남긴 굴곡진 시간의 흔적에 있다. 광장은 빈터에 이름만 붙인다고 작동하지 않는다.
--- p.250

노을공원 한가운데 서면 서울의 도심 경관은 차단되고 넓은 잔디와 하늘만 시야를 채운다. 쓰레기산의 기원을 감춘 이 목가적인 배경은 수많은 예비부부가 찾는 웨딩 촬영지와 캠핑장이 되었다. 하지만 평온한 표면 1미터 아래에서는 매립가스와 침출수가 계속 뽑혀 나오고, 바로 곁의 자원회수시설에서는 오늘의 폐기물이 소각된다. 눈에 보이는 기억을 남긴 선유도와 달리, 난지도는 오물을 덮은 인공 지형과 그를 유지하는 기반 시설이 한 장소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 p.272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는 이 공간적 상상력을 뒤집는다. 곰과 호랑이는 인간이 되기를 원했고, 환웅은 쑥과 마늘을 주며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라고 명했다. 동굴로 들어간 두 동물 중 호랑이는 이탈했고, 곰은 스물하루를 버텨 여자의 몸을 얻었다. 웅녀의 탄생이다. 노아의 방주가 종의 보존을 위해 동물의 경계를 지키는 칸이었다면, 단군신화의 동굴은 동물의 경계를 부수고 인간으로 도약하기 위한 여과의 공간이다. 양쪽 모두 생사의 운명을 가르는 가혹한 밀폐 공간으로 배와 동굴을 선택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 p.292

서구 제국들이 식물을 과시하려 투명한 유리 탑을 하늘 높이 쌓아올릴 때, 지구 반대편 조선은 정반대의 건축적 선택을 했다. 그들은 하늘로 솟구치지 않고 대지로 낮게 내려앉았고, 투명한 유리가 아닌 반투명한 종이와 흙으로 빛과 열을 다스렸다. 15세기 조선의 기록 『산가요록(山家要錄)』에는 ‘동절양채(冬節養菜)’라는 이름의 온실이 실려 있다. 조선의 온실이 서양보다 앞섰다는 연대기적 우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연을 대하는 두 문명의 건축적 태도가 극명하게 갈린다는 점이 중요하다. 제국의 온실이 식물을 시각적 트로피로 전시하기 위한 쇼케이스였다면 조선의 온실은 겨울 추위로부터 생명을 살려내기 위한 따뜻한 인큐베이터였다.
--- p.319

우리는 식물원의 온실로 기후를 조작하고, 조화로 성장의 시간마저 건너뛰려 했지만, 개망초는 그 사이에서 제 시간을 살고 있었다.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은 에세이 〈폐허(Die Ruine)〉에서 건축이 형태의 완결성을 잃는 순간, 그것을 이루던 재료는 다시 자연의 법칙으로 돌아간다고 짚었다. 개망초는 그 틈에서 자랐다. 건축이 완성을 선언하고 행정이 가짜 녹색을 칠한 뒤에도 자연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콘크리트는 갈라지고 그 틈에는 다시 진짜 생명이 들어온다. 건축은 자연을 영원히 소유하지 못한다. 잠시 자리를 빌릴 뿐이다.
--- pp.329-330

출판사 리뷰

설계와 삶은 어디서 어긋나는가

모래섬이던 여의도 한가운데에는 전쟁이 나면 비행기가 뜨고 내릴 수 있도록 넓은 아스팔트가 깔렸다. 국군의 날에는 탱크와 미사일 행렬이 지나갔다.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 집회에는 100만 명이 넘게 모였고, 1981년에는 군사 정권이 기획한 ‘국풍 81’이 열렸다. 광장은 행사를 위해 비워둔 바닥이었다. 국군의 날 행사가 끝나면 아이들은 남겨진 미사일 발사대에 올라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부모들은 탱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활주로와 사열대로 설계된 공간은 놀이터로 쓰였다. 건축가 조진만은 이 장면을 국가가 세운 질서에 시민들이 남긴 ‘불순한 균열’이라 쓴다.

책은 먼저 각 공간의 유형이 어디서 왔는지 살핀다. 서구에서 오랜 세월 고쳐가며 자리 잡은 근대 건축의 유형들은 한국이 식민지기와 전쟁, 산업화를 지나는 동안 빠르게 표준이 되었다. 1962년 문교부가 학교 시설 표준 설계 지침과 표준도를 만들면서 전국의 학교는 지역과 대지의 조건이 달라도 비슷한 모양을 갖췄다. 『불순한 건축』은 아파트에서 식물원까지 아홉 가지 유형의 공간을 살핀다. 사람들은 그 공간에서 무엇을 하도록 요구받았고, 실제로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좋은 의도는 왜 칸막이가 되었나

사람을 위해 만든 공간이 사람을 관리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미국 가구회사 허먼 밀러의 개발자 로버트 프롭스트는 일하는 사람의 자세와 방식에 맞춰 바꿀 수 있는 가구 ‘액션 오피스’를 구상했다. 그러나 기업들은 가구를 이용해 좁은 사무실에 더 많은 직원을 배치했다. 사무실에는 칸막이가 늘어났다. 한국의 대기업으로 건너온 칸막이에는 위계까지 얹혔다. 칸막이 높이는 권한을 뜻했다.
집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한국의 아파트는 위생과 편리를 약속하며 들어왔다.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서 하던 부엌일은 싱크대 앞에 서서 하는 일이 되었고, 마당 끝에 있던 변소는 수세식 화장실이 되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생활은 편리해졌다. 아파트 단지에는 공원과 놀이터, 주차장도 들어섰다. 이 시설들은 울타리 안에 사는 주민들만을 위한 공간이 되기도 했다.

벽이 사라지면 공간은 열리는가

요즘 도서관은 카페 같고, 사무실은 라운지 같다. 저자가 보기에 건축가들이 오랫동안 말해 온 복합성과 유연성은 이미 도시 곳곳에서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공간을 쓰는 방법까지 자유로워지지는 않았다. 카페 같은 도서관에도 좌석 예약제가 있고, 건물에 들어가려면 앱으로 인증하거나 QR 코드를 찍어야 하는 곳도 있다. 저자는 새롭게 생겨난 경계에 대해 이렇게 쓴다. “건축가가 벽을 허무는 동안 플랫폼은 조용히 로그인 창을 세웠다.”

공간의 모든 쓰임을 계획할 수는 없다. 마지막 장에는 저자가 직접 겪은 일이 나온다. 고가 하부 재생 사업에서 저자는 그늘에서도 버티는 식물을 심으려 했지만, 구청은 준공 날짜에 맞춰 식생을 걷어내고 플라스틱 조화를 설치했다. 이듬해 늦봄, 조화 사이로 개망초가 자라 있었다. 건축가도 행정도 계획하지 않은 식물이 공간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닫는 글에서 저자는 설계에 여지를 남겨두자고 말한다. 방에 이름을 붙이더라도 그 쓰임까지 고정하지 말고, 완성의 일부는 시간에 맡기자는 것이다. 책은 이렇게 끝난다. “어쩌면 우리가 이 복잡한 삶을 견디기 위해 건축을 지독하게 분류하고 정돈해 온 것은 아닐까. 당신은 왜 이토록 완결된 공간을 원했는가.”

추천평

생각해보면, 우리는 집의 방 이름을 예전에는 안방, 건넛방, 문간방 등 위치에 따라 부르며 주체적으로 살다가, 언제부턴가 거실 침실 식당 등 목적에 따라 부르면서 그 방에 놓인 가구가 원하는대로 앉고 눕고 먹는 객체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을 한탄해온 나에게, 저자는 집뿐만 아니라 학교와 일터와 놀이터 도시 모두 그렇게 주어진 이름의 목적에 맞게 타성적으로 우리는 살고 있다고 적시하며 깨어날 것을 강력히 권한다. 그래야 장소가 생기고 우리 고유의 삶이 잉태된다는 것이다. 날카롭고 집요하며 번뜩이는 저자의 안목과 성찰에 경탄하며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다. 한때 그와 같이 중국 땅을 누비며 이로재의 건축을 펼쳤다는 것이 너무도 자랑스럽다. - 승효상 (건축가, 이로재 대표, 동아대학교 석좌교수)
<시대예보> 연작을 준비하며 늘 사람들의 흔적에서 시대를 읽어온 제게, 이 책은 정작 우리가 매일 몸을 누이는 아파트와 사무실, 도서관과 광장이야말로 가장 오래되고 힘센 데이터였음을 일깨워 줍니다. 저자를 따라 익숙한 공간을 낯설게 걷다 보면, 그간 관찰해 온 습관과 욕망의 상당수가 실은 벽과 창과 동선이 먼저 새겨 넣은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공간을 읽는 눈을 갖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 송길영 (마인드 마이너, <시대예보> 시리즈 저자)
광고인인 나는 오래전부터 공간을 가장 중요한 작품의 재료로 써왔다. 주어진 공간에 숨어 있는 메시지와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대중과 호흡해 왔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공간을 건축물로만 보지 않고, 그 안에 숨은 사람과 사회의 이야기를 읽어낸다. 결국 좋은 아이디어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있지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공간을 전혀 다른 눈으로 다시 보게 만든다. - 이제석 (광고인, 《광고천재 이제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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