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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_ 숨쉬기는 쉬운 일인가
넘치는 평화 숨쉬기는 쉬운 일인가 나의 직장 음악다방 내력 승부의 세계 초대장 가정교육 주유기(舟遊記) 마음 구형 테레비의 독백 복개천 그곳에 가는 길 쓰레기통을 비우며 오해 천동설을 믿는 당신에게 2부 _ 무성영화 한 컷 근황 우산 없이 젖다 그 방 신통한 처방 무기력증에 빠지다 그들이 한때는 어릴 적 보았던 버스정류장 세상 그리기 하모니카 소풍 가는 길 믿지 못할 눈물 무성영화 한 컷 크리스마스 전야 흔적 흰 우유를 마시는 아침 마흔 살 3부 _ 검은 비닐봉지 사직의 변 불면증에 시달리는 밤 긍정적인 생각 검은 비닐봉지 울음 혹은 노래 우울한 산책 바다의 엘레지 조류도감에 갇힌 새들 정신력 사바나 기린 나는 멀었다 시립벽제승화원 다이제스트 시대 경고, 가지치기 산 오피스타운 그날이 오면 4부 _ 열여섯 살은 지나갔을까 물렁한 변명 식물의 자존심 옛날 외투 젊은 예술가의 초상 노래방에서 불편한 충고 가을 저녁 폐업안내문 돌고 돌고 돌고 익숙한 길 소주 금붕어 11월 퇴근 열여섯 살은 지나갔을까 마지막회 연속극처럼 후회 시인의 산문 독주, 신파, 손목 그것으로 한 컷 |
조항록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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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직장
어린이대공원 동물원 가문비나무 아래 앉아 피워무는 담배 한 개비의 평화가 나의 지루한 일상이어야 옳았다 견딜 만하다거나 견디는 게 아니라 사육되는 맹수들을 바라보며 위로의 말씀 한마디 던지는 여유 오만한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한 마리 순한 잡식 동물이어야 옳았다 때로 관람객들은 동정의 눈길을 보내며 실패한 인생인 양 자식들에게 산교육을 시키겠지만 내가 끌고 가는 수레에 실린 것은 정글의 분뇨가 결코 아닐 것이다 별똥별 나는 밤새 동물원에 떨어진 천상의 분뇨를 수레에 쓸어담아 가문비나무 아래로 간다 별똥별도 시립 어린이대공원 관리사무소 조씨인 나도 잠시 쉬어가는 시간 서울시 지하철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에 내리면 있는 아이였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아이가 함께 풍선을 들고 걷는 나의 직장 언제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호랑이와 사슴의 평화로운 낮잠을 바라보며 담배 한 개비 피워물어야 옳았다 다이제스트 시대 약력(略歷)을 묻는다 약사(略史)가 통사(通史)를 대변한다 전집(全集)의 전성기는 지나갔다 여론은 표본추출의 기술이다 누더기처럼 편집한 마라톤 중계를 공공연히 선전한다 잊혀지기 싫다면 서둘러 요점(要點)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들은 이제 통음(痛飮)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의 드라마를 줄거리로만 기억할 것이다 승부의 세계 패를 감춘 시뻘건 장막 너머로 눈들이 붉은 알전구처럼 깜빡거린다 빨간색은 이전부터 이데올로기적으로 쇼비니즘적으로 본능적으로 우리를 미치게 했다 빨간 카포테를 향해 돌진하는 투우들, 방금까지 갇혀 지낸 칠흑의 공간이 분노를 키웠다 골방에서 계곡에서 초상집에서 음식을 기다리는 식당 내실 한켠에서 새로운 세기의 거리에서 뻘겋게 괴성을 적시며 솟구치는 선혈 8월 공산명월에 2월 매조를 만난 듯 뜨거운 피의 흥분이 등골에 창이 꽂히는 아픔을 견디게 한다 ---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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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항록 시인은 시집 『근황』을 통해 삶에 대한 ‘연민’을 이야기하고 있다. 누구나 그러하듯 시인에게도 삶은 애증의 연속이다. 희망의 빛이 어른거리는가 싶으면 캄캄한 어둠이고, 돌아서서 외면해야지 하면 낯선 손길이 조용히 어깨를 감싸 안는다. 그래서 시인은 헤아릴 수 없는 삶의 비의에 대해, 그리워하면서 두려워하고 미워하면서 마음을 빼앗기는 삶의 부조리에 대해,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는 그 무엇에 대해 시를 쓰는 것이다.
다음은 시집에 수록된 시인의 산문 중 일부다. ‘방송으로 울트라마라톤을 보았다. 울트라마라톤은 시간주와 거리주로 구분한다. 주어진 시간 동안 얼마나 멀리 가는가를 따지는 것이 시간주, 일정한 거리를 얼마나 빨리 달리는가를 따지는 것이 거리주다. 얼마나 멀리 가든 얼마나 빨리 가든 울트라마라톤은 인생과 닮았다. 그냥 인생이 아니라 극기의 인생사라 할 만하다. 그 날은 100킬로미터 거리주였다. 제대로 먹지 않고 쉬지 않으며 달린다는 것에는 어떤 매력이 있는 것일까. 기꺼이 불편과 고통을 받아들이기도 하는 인간의 심사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일까. 울트라마라톤은 순위가 중요하지 않은 시합이었다. 하마터면 꼴찌로 들어온 완주자 때문에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의 몸은 피로와 물집으로 엉망이었으나,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보였다. 그는 가까스로 숨을 고르자마자 또다시 달릴 것이라고 말했다. 울트라마라톤이 은유하듯 인생은 독주(獨走)다. 독주(獨奏)라도 좋고 독주(毒酒)라고 해도 상관없다. 인생은 홀로 달리는 것이고 홀로 연주하는 것이고 홀로 독한 술을 마시는 것이다. 인생이 그러할진대 시라고 다르지 않다. 시는 레크레이션이 아니다. 시는 교향악이 아니다. 시는 사교 모임에서 홀짝거리는 샴페인이 아니다. 가벼우면서 무겁고 뜨거우면서 차갑고 무료하면서 시끄러운 것.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것. 미워할 수 없는 것. 사랑할 수 없는 것. 인생이 그렇고, 시가 그렇다.’ 이렇듯, 조항록 시인에게 세상의 모든 절실한 것들은 연민의 대상이 된다. 울트라마라톤도, 삶도. 거기서 그의 시가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