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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서문
권두에 붙이는 논쟁적 후기 1. 이 책의 저술 동기 2. 또 하나의 역설 3. 기존 연구의 전제들 4. 전도서의 기원에 관한 논쟁 5. 전도서의 저자 6. 지혜의 성문서 7. 전도서의 구도 8. 모순성의 원리 9. 전도서와 숙곳 절기 제1부 헛되고 헛되다 1. ‘헤벨’ 2. 진보 3. 묵상 4. 권력 5. 돈1 6. 일 7. 행복 8. 선 9. 인간의 응답 10. 종합1 제2부 지혜와 철학 1. 지혜와 실존 2. 아이러니 3. 참된 지혜 4. 지혜의 시험 1) 말 2) 소유 3) 남자와 여자 4) 종합 5) 에필로그266 제3부 하나님 1. 엘로힘 2. 모순 3. 베푸는 하나님 4. 하나님을 향한 태도 5. 완성 부록-자끄 엘륄과의 대담 엘륄 저서 및 연구서 |
Jacques Ell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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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엘륄이 말하는 이 책의 저술 동기
오늘날 전도서에 관해 또 하나의 책을 쓴다는 것은 유별나게 헛된 욕심을 가진 사람이거나 극히 무분별한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이리라! 참고도서 목록만 해도 수많은 장이 할애되어야 하고, 하나같이 훌륭한 학자들이 쓴 주석들의 목록만 해도 수십 장에 이르는데 말이다.( 라우하(A. Lauha)는 200여 쪽을 인용하고 있다. ) 나는 학자도 주석가도 해석학자도 신학자도 아니다. 내가 여기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단지 전도서를 반세기가 넘게 읽고 묵상하며 기도해 왔다는 사실뿐이다. 내가 그토록 깊이 파고들고 또 그만큼 수확을 얻었던 성서 텍스트는 아마도 전도서가 유일할 것이다. 전도서만큼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건네준 책은 없었다. 여기서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대화 내용이라고 해두자. 그리고 이 책의 전개 방식은 내가 다른 저서들에서 간혹 취하곤 했던 대학의 학문적인 방식과는 다르다는 점을 독자 여러분에게 미리 예고한다. 대학의 학문적인 방식은 주제에 관한 참고문헌을 작성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가능한 모든 자료들을 다 읽고, 분류 카드에 기록하고, 하나의 기본 구도를 수립한다. 그리고 다른 저자들의 연구 결과들을 확장하거나 또는 반박하는 내용으로 편집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이 책의 전개방식은 정반대가 된다. 나는 미리 다른 관계서적들을 읽어서 예비지식을 습득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전도서의 텍스트와 일대일로 마주하고 싶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았지만 그것을 읽는데 나는 아주 서툴렀다. 그래서 도움도 받고 점검도 받을 겸해서 9개의 번역판을 보았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텍스트를 써내려갔다. 내가 쓴 것이 외적인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걸 쓴 것은 이미 기존에 습득한 문화와 지식을 가진 개인으로서의 나 자신이지 어떤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나는 아주 오래 전에 코헬레트 [역주] 앞의 일러두기에서 언급한 대로, 여기서는 ‘코헬레트’라는 호칭을 문맥에 맞게 코헬레트, 전도서, 전도서 기자, 지혜자 등으로 옮기기로 한다. 에 관한 몇 가지 논문들을 읽었었다. 『신앙과 삶』(Foi et Vie)에 실린 비셔(Vischer)의 논문, “전도서와 몽테뉴”(L'Ecclesiaste et Montaigne)는 물론이고 페데르센(Pedersen), 루티(Luthi), 폰 라드(von Rad)의 글들을 보았었다. 나중에 그 이유를 설명하겠지만, 반세기 전부터 전도서에 관해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내게 있었다. 그래서 30년 전에는 델리취( Franz Delitszch, Biblische Kommentar uber die poetischen Bu chern, Hohes Lied und Koheleth, 1875.)의 글을 요약하기도 했었다. 그러므로 나의 입장은 중립적일 수 없고 백지상태에서 출발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점점 써야할 시간이 다가오면서 나는 전도서에 관해서 다른 아무 것도 읽지 않도록 스스로 자제했다. 깊이 숙고하여 나만의 텍스트를 완성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눈에 띄는 모든 글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독서 중에 접한 책들 가운데 포드샤르(Podechard), 스타인만(Steiann), 바룩(Barucq), 라우하(Lauha) 등의 책들이 좀 무덤덤하게 느껴졌다면, 리스(Lys)의 책과 마이요(Maillot)의 책은 나로 하여금 모든 걸 포기하게 할 뻔했다. 그 두 책들은 각각의 장르에서 완벽하게 보였다. 리스는 학문과 주석학적인 엄정성과 완결성과 진실성의 모범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서문에서 모든 가설들을 검토하고, 각각의 용어에 관해서 해박한 설명을 쏟아놓으면서, 텍스트를 단어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구성하였다. 마이요는 나에게 번뜩이는 예언자적인 영감과 함께 텍스트에 대한 깊은 통찰을 훌륭하게 보여 주었다. 아주 다르지만 완벽하게 서로 보완하는 그 두 권의 책들을 앞에 두고서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제 나만의 텍스트가 있다. 십여 편이 넘는 주석들을 읽었지만 나는 내가 쓴 텍스트의 한 줄도 고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나의 방식은 전도서의 말씀에도 들어맞는다고 본다. 경험과 지식을 어느 정도 가졌다면 남들의 말( 참고문헌: Andre Barucq, Ecclesiaste, Paris, Beauchesne, 1968; Aare L. Lauha, Kohelet, Munich, Neukirchener Verlag, 1978; Daniel Lys, L'Ecclesiaste, ou que vaut la vie, Paris, Letouzey, 1977; Alphonse Maillot, "La contestation. Commentaire de l'Ecclesiaste", in Cahiers du Reveil, Lyon, 1971; E. Podechard, L'Ecclesiaste, Paris, Gabalda, 1912; J. Steinmann, Ainsi parlait Qohelet, Paris, Editions du Cerf, 1955.)을 모방하지 말고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텍스트를 써가는 가운데 내가 “역사학자들과 주석학자들”의 견해를 넌지시 꺼낸다면, 그것은 보통 어디나 통용되는 사회통념들이거나 일반적인 이론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후에 읽은 훌륭한 책들에 대해서는 많은 각주들을 붙여 표시했다. 나는 그런 각주들 속에 나의 견해를 표명하여 입장을 정리했다. 이와 같이 전개해나간 것이 내가 취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서문이라고 해야 할 제목을 “후기”라고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또한 “논쟁적”이라고 한 것은 나중에 가서 몇몇 저자들을 비판한 데 따른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책의 한계들을 보여준다. 즉, 나는 전도서의 새로운 “주석”이나 “요점”이나 거기서 취합한 종교적 강론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한 작업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40년 동안 나는 전도서에 관한 실제적 묵상이 내가 마음속에 그리기 시작한 나의 모든 저서들 전체에 대한 적절한 결론이 될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것은 지적이고 활동적인 내 삶의 여정이 끝날 무렵에 가서야 가능할 듯했다. 전도서라는 책은 하나의 결론이지 하나의 출발점일 수는 없다. 나는 그것이 전도서의 말씀에 부합한다고 본다. 전도서의 모든 긍정이나 부정은 일을 다 겪은 후에 일종의 마침표처럼 내려진다. 그것은 결과가 아니라 결론이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는 전도서를 기점으로 해서, 또는 전도서 이후로 거기에 덧붙일 만한 말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 내가 집필하고자 했었던 모든 책들의 전체적인 서문이라고 한다면, 전도서는 마지막 결론에 해당할 것이다. 사실 나에게 아직 더 많이 쓸 수 있는 여력이 남아있는 것 같지 않다. 내가 마음속에 담아둔 계획을 모두 다 이룰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이 허락한다면 한두 권을 더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한두 권은 이미 저술한 책들을 보완하는데 그치고 말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