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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고집
신발
일거리를 두고
낚시
불경기
공회전
공단길을 걸으며
어떤 하루
행렬을 보며
걱정
이사를 하며
늦가을에
자존심
제 살 뜯어먹기
장난감 자동차
겨울

제2부
척 하면
겨울나무
십 원짜리 동전
하루살이의 노래
콩을 볶으며
달동네에서
페인트칠을 하며
알았으면 좋겠어
비 오는 날
백수
선풍기
담쟁이
쇠비름을 보며
노이로제
연삭을 하면서
소사장

제3부
받침돌
복사기
노고단을 오르며
실제 상황입니다
홍수
보초를 서며
허수아비
하나됨을 위하여
큰어머니
말하지 않아도
짝퉁 시대
양파 껍질을 벗기며
아버님 전상서
화엄사에서
고드름을 보면
CCTV

제4부
선인장
아내1
아내2
집에 오면
나무를 심으며
고향

지금 우리 집은
이름을 위하여

아직도
벌초
양심
팔만대장경
일기예보

발문 · 정규화(시인)
삶의 중심에서 이룬 보편적 가치

저자 소개

저자 : 이규석
1958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하여 1987년 <고주박> 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경남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이며, 객토문학의 동인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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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7년 12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12쪽 | 157g | 128*210*20mm
ISBN13
9788961950046

출판사 리뷰

삶의 중심에서 이룬 보편적 가치 ― 정규화(시인)

시를 매개로 도달해야 하는 보편적 가치는 시인의 사상과는 무관하게 부풀리고 와전되어 본질과 목적에 혼돈을 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에 나타난 한 시인의 사상을 검증한다는 것을 범죄 심리학적인 접근이 필요하겠지만 그것 역시 완벽하다고는 볼 수 없다. 더구나 신명을 바쳐 완성한 개인의 정신적 자산에 대해 평가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짓을 모순인 줄 알면서도 반복하고 있다. 그 결과 최근 들어 남의 작품이 눈에 띄면 그것을 텍스트로 말을 바꾸는 연금술사의 역할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다. 시 속에 사상은 없고 말의 유희만 난무하는 희한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 같은 이유는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매체의 발달도 한 몫을 감당했을 것이다. 그 점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의도가 좋다하더라도 시로써의 형식과 표현양식이 있어왔다. 다시 말하자면 시는 시라야 그 생명력이 주어지는 것이다. 시인들은 누구나 긴 습작기를 거쳐 오는 동안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시인에게서 자아란 누구에게 부여받을 수 없는 시인의 사상 속에 뿌리를 둔 철저한 정체성의 한 형식일 수 있다. 시다운 시란 먼저 쉬운 시를 뜻 한다. 누구나 꽃을 보면 즐거워하고 쿠바에 있는 미군의 ‘관타나모기지’에 대해서는 비판을 쏟아놓을 줄 안다. 일상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결론내면 시란 시 이전에 머물곤 한다. 시란 쉽고도 어려운 것은 낱말 하나와 땀을 흘리게 한 자기와의 싸움의 소산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 모든 것이 역사와 현실의 투철한 인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비근한 예를 들자면 1786년부터1788년까지 있었던 괴테의 이탈리아 종단 기행에서 괴테의 해박한 지식이 이탈리아의 고대건축물과 자연 환경은 물론이고 무용 연극 미술과 같은 예술에 접근하여 입체감을 더하고 있다. 이것은 기행에 앞서 괴테가 그 방면에 많은 공부를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일 거다. 더 쉽게 비교가 가능하다면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것 같은 충격을 이탈리아 기행이 지니고 있는 좋은 점이다. 괴테 역시 시인이었듯이 무릇 시인은 그의 경험과 지식세계는 넓고 깊어야 한다. 알아서 손해 보는 일이 없다. 배우고 쓰기를 거듭하여 조심스럽게 자기의 땅에 천착해야 할 것이다. 개중에는 쉽게 시인이 된 사람이 많다. 다시 말하지만 무수한 문예지가 자신들의 입지 확보를 위해 무더기로 쏟아내는 시인들이 제대로 시적 재질을 갖추지 못했다는 얘기가 종종 들리고 있다. 따라서 문인의 수는 늘어가지만 질적 향상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비판적 시각이 대두되고 있다. 예술은 미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시도 마찬가지다. 모든 가치의 우위에 시를 두지 않고 결코 좋은 시인이 될 수 없다. 때로는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시와 시를 쓰는 일이어야 시인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성취란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이 없다. 우연히 오는 성과란 상상력 속에서나 있는 것이다. 성공의 이면에는 부단 없는 노력도 있겠지만 깨어있는 지각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 자신을 정확히 알 수 있고 부족한 부분을 노력으로 메워 나갈 수 있다. 개인이 자기 주변의 것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으므로 자기가 잘 아는 것이 자신의 자산이다. 이것은 파고들어야 한다. 괜히 모르는 부분에서 남의 흉내를 낸다는 것은 위험한 곡예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의 문학은 늘 내 주변에 산재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표현의 기법이야 세월이 가면 저절로 터득되어지고 자기화 되는 것이다. 동시대인의 고뇌와 갈등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며 동시대의 허와 실을 시인의 땀과 예지로 부딪쳐야 살아남는다. 우리가 보편적 가치에서 시의 진실을 구하자면 시인 자신이 그 가치의 중심에 서 있어야 될 것이다. 피상적인 접근은 그 본질에 도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독자로부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것이 문학이며 시다. 그래서 시인되기도 어렵고 시인으로 살기도 힘든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는 주변이 빈둥거리는 젊은이와 노인은 있어왔다고 예사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사회의 균형을 깨뜨리고 있다. 거지들을 다 소탕하면 또 거지가 생기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이들은 모두 우리 사회 구성원이다. 이들의 희생을 담보로 하여 있는 자들의 배를 불리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다. 우리 주변의 서민들에게도 부유해질 수 있는 기회마저 완전히 봉쇄되고 있다. 신용불량자 제도가 그렇다. 조지 길더는 『부와 빈곤』이란 책에서 “보수주의자들은 진짜 가난은 소득상태보다도 마음의 상태에 있으며 정부의 시혜는 그것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거의 모두를 위축 시킨다”는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정신적 위축은 가정의 파탄과 재앙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미래까지 유산으로 남는다. 위의 시에서처럼 생활의 저변에 가난에 시달리는 모습이 너무 안쓰럽다. 삶이 이 지경에 왔다면 마음잡고 시를 쓸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주변에는 높게 올라가는 아파트와 빌딩이 보이고 출세한 친구들의 얘기가 소문에서 소문으로 전해지는데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은 자기 당착일 것이다. 시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이 삭막한 시대에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사는 일이 몇 갑절 더 값나가는 일이다. 그런 것을 감수하면서 시에 정진한다는 것은 그 정신만으로도 일단은 인생의 문턱에서 자신을 승리대열에 세우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시가 난해하여 옥석을 가리지 못하는 상황이 한 시대를 넘기지 못할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이규석의 시는 자신의 갈무리를 통해 얼마든지 거듭날 수 있다. 「논리적 범위와 감정적 범위」의 한계를 벗어나면 사회적 합리화의 표면에 존재하고 있는 세계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적당한 가난과 적당한 고통 속에서 자아의 형성은 폭넓은 감성을 얻어낼 수 있기에 이규석의 고통은 그 껍질을 깨뜨릴 때 예술적 임무의 도화선으로 이어질 것이다. 시란 경험의 축적이 밑거름이 되기에 더욱 그러하다. 시에 있어서 논리의 미숙이나 철학의 빈곤은 독서를 통해서 보충할 수밖에 없다. 독서는 마음을 순화시키는 마음의 양식이라고들 한다. 인격의 도야는 독서가 우선 돼야 한다. 아무리 시적 상상력이나 감수성이 뛰어나더라도 그것을 정제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시의 성공은 기대할 수 없다. 종종 기초를 다지지 않고 문인의 반열에 서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결국 사상누각에 불과한 안타까운 일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만이 그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 항상 사물의 본질은 접근도 못하면서 지엽적인 문제를 삶의 실체로 알고 허둥대지만 그것이 한갓 실루엣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늦어서 모든 가능성과 기회를 놓쳤다는 뉘우침에 통곡할 수도 있다. 노력 없는 기회의 포착은 있을 수 없다. 고민하고 땀 흘리며 노력하는 가운데 시도 길도 열리는 것이다.

우리 보다 앞선 세대의 삶은 누구나가 지니고 있는 애환의 일부이지만 그렇게 보낸 세월의 잔영이 이규석의 가슴에도 드리우고 있다. 병석의 큰어머니를 간병하면서 비운의 삶을 지켜야 하는 것은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우리네 삶의 단면을 보는 것 같은데 시로써의 성취이전에 이규석의 애잔한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있다. 시는 생활저변에 그것도 시인 자신의 주변에 늘려 있다. 바꿔 말하면 시란 시인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인 것이다. 그래서 시와 삶은 일치할 수밖에 없으며 시대 상황이 나타나는 것이다. 현실이 실종된 시들을 흔히 보고 있던 터에 시인의 참모습에 접근해가는 이규석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는 것은 그것에 있다. 시는 삶이라는 말 때문이다. 한 시인의 태동은 천지창조와 같다. 그래서 시공을 초월하여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독자들은 시인의 사상에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시의 위대함을 체험하게 된다. 시인이 그냥 태어나는 것은 아니며 시는 누구나 쓰는 게 아니다. 오늘날 시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지만 자본주의가 새로운 사회지배 이데올로기에 예속 되는 날 시인의 시는 지리산처럼 우뚝 서 있을 것이다. 시대와 사상은 변하지만 시의 본질은 이어져 갈 것이다. 그래야 이규석시인의 노력이 헛되지 않을 것 아닌가. 나는 이규석의 대성을 믿는다. 이규석 시인의 시는 그가 바랐던 문학적 성취에 관계없이 그의 고달픈 삶을 고정시키고 있다. 생활이 사방으로 얽혀 정신적 육체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면 대개는 무기력해지게 된다. 고민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찾는 일이 시들해지는 수밖에 없다. 비근한 예를 들자면 「보리가 아직 익지도 않았는데 밥걱정」을 하면 오직 배고픔 말고는 무슨 기력이 있겠는가. 이규석 시인에게도 드러내놓고 얘기 못할 가정사가 있었다. 그것이 제삼자의 객관적 입장에서는 어떻게 비췰지 모르지만 몸으로 부대끼는 당사자들에게는 태산 같은 걱정과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무작위로 뽑은 위의 시들에서 보면 시인의 주변여건이 안정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시에서 주지하는 상황들이 이규석 시인의 삶 그 자체일 때 이규석 시인이 아니더라도 안절부절 못하게 되어 있다. 삶이란 현실에 예속될 수밖에 없고 그 굴레에서 보다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저마다 마음속에 칼날을 세우고 있다. ‘숱한 제품이 들락거리고/겨울 찬바람’을 맞는 삶을 살아보지 않고는 그 고통을 말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다. 그의 시에서 군데군데 묻어나는 체취는 춥고 배고픔과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반항적 뉘앙스가 풍기고 있다.
‘바람/그 소리만 들어도/춥다’라든지 ‘세찬 바람에/나뭇잎들을 다 떨어뜨린 나무’에서 보여주는 을씨년스런 분위기는 이 땅 서민들의 애환 그대로 이다. 일자리를 구해 나서도 덥석 받아주는 일터는 없고 허기진 발길을 끌고 집에 돌아오면 ‘대문에는 어지럽게 붙어 있는/광고 전단지 뿐’인 현실이 이규석 시인의 자아형성에 큰 부담을 주는 것이다. 너무 삶에 시달리다 보면 누구나 망각의 상태에 머물고 싶어 한다. 그래서 술을 마시게 되고 노래방을 찾게 된다. 그러나 가난이란 부끄럼은 절대로 아니지만 무기가 될 수는 없다. 시란 자신이 체험하고 느낀 것들을 통해서 형상화 시키면 된다. 다시 말해서 고달픈 삶 자체가 시는 아니다. 우리는 수기 같은 것에서 더 고통스런 삶의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고통을 시라는 형식을 통해 표현했을 때 독자들의 공감대 형성이 있어야 성공한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언제든지 좋은 시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이다. 시인의 삶이란 그 시인의 시의 보고이며 자산인 것이다. 좋은 자양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걸 시라는 틀 속에 걸러내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시에 있어서 명징한 것은 통일된 사관과 번쩍이는 추리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벼를 그대로 먹을 수는 없다. 도정이라는 공정을 통해 밥이 되는 취사 과정을 두루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시집에서 가장 대표 시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선인장이다. 온갖 열악한 환경에서 악착같이 살아남는 방법을 찾지만 낭떠러지에 서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모랫바람으로 서걱거리는/메마른 사막’은 어쩌면 시인이 처한 현실의 삶일 것이다. 그래서 ‘온 몸에 가시비늘 세우고’ 척박한 환경을 극복해가는 삶의 의지가 돋보이는 가 했더니 ‘푸른 절망 하나 삼키고 섰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말하자면 문장의 완성에 미숙을 드러내지만 시인의 정신적 성숙은 「목마름에 속울음 우는 사람아」에서 보듯이 이성에 호소하고 있다. 이규석 시인의 시를 보편적 관점으로 볼 수만은 없다. 그렇다고 곳곳에 드러낸 문맥상의 모순과 오류는 반드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밤송이는 무수한 가시에 싸여 있다. 밤이 익었을 때 스스로 송이를 터뜨리며 알밤이 밖으로 쏟아진다. 이규석 시인이 키우는 밤송이는 가을을 내다보고 열심히 달린다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는 「늦가을에」라는 시에서 그걸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 그는 가을복판에 서 있다. 맺은 밤송이를 잘 갈무리하여 보란 듯이 알밤을 이 가을에 떨어뜨리길 기대해 본다.

나름대로 성공한 작품의 하나인 이 시에서는 가을의 허전한 심정을 무리 없이 다루고 있다. 물론 이규석 시인의 다른 작품과는 수준을 달리 하고 있다. 그는 이미 가을을 감지하고 언제나 포근한 ‘들판’이고 싶고 그 자연에 순응하는 섭리를 따르고 싶은 것이다. 계속되는 불황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그는 심한 피로를 느끼고 있다. 그래서 그는 ‘가을걷이 끝난/ 빈 들판의 기다림이면 좋겠다’ 했고 가을볕 속을 날고 있는 잠자리가 더 여유 있고 유연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유추해내는 자연의 접근이 안 될 때 그는 허전하고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바람마저도 자신처럼 허전해 보이며 하루 종일 공치고 돌아서는 무거운 발걸음 까지도 허전할 수밖에 없다. 그는 지금 상실한 세월을 되찾는 것보다는 자신의 허전함과 외로움에 자연이 동참해 줄 것이라는 간절한 바람으로 현실에의 피곤함을 위로 받고 싶어 한다. 이 상황이면 누구나 외롭지 않을 사람이 없다. 현재 처해 있는 위기의식에서 발 빠른 탈출을 할 때 그를 괴롭히는 허전함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출구는 사방이 막혀 있다. 그러나 반드시 출구는 있다. 이제 이규석 시인이 찾아야 한다. 그날이 속히 오길 바라며 그날이 왔을 때 나는 이규석 시인에게 소주잔에 술을 따라주고 싶다.

추천평

시골집 행랑채도 사라지고, 쇠똥구리도 사라지고, 돌담도 사라지고, 소래 기찻길도 옛 길로 이미 사라지고 말았이규석 형을 만난 것이 1989년이니 20년이 다되어 가는데도, 형의 모습이나 형이 쏟아내는 말이나 심지어 형의 詩까지 변함이 없다. 변해야만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20년 전이나 앞으로 20년 후나 전혀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는 것은 형의 첫 번째 시집이 말해주고 있다. 형이 한 길을 고집하는 이런 모습에서 형이 말하고자 하는 “절규” 같은 것을 발견해 내고는 형의 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나는 어렴풋이나마 이 시집을 받아들고 알게 되어 부끄러울 뿐이다.
― 표성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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