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1.
송송이? 대박이다~ 너, 설마 고자질쟁이는 아니겠지? 지긋지긋하다, 정말 만날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니? 싹싹 지워야겠지? 2. 남자는 능력이야! 엄청난 부잣집 외동딸이야 오늘은 일 있어서 너희랑 못 놀아!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라 나, 예뻐? 3. 피임만 잘하면 돼 내가 한번, 싹 꾸며 줘 볼까? 오백만 원하고도 안 바꾼다 남의 돈 벌어먹기는 더 힘들단다 무궁화보다 더 예쁜 꽃, 본 적 있니? 봐, 내 손바닥 안에서 놀지? 멍청하기가 타조 수준이라니까 적포도한테 왜 청포도가 못 되느냐고 야단치나 그동안 나 부려먹은 값, 백만 원 내놔 대안도 없으면서 고집 피우지 마! 엄마, 나 포도 키우면서 살면 안 될까? 4. 시간이 우리를 포도주처럼 발효시키면 좋겠어 먼저 땅심을 키워라 포도 꽃 본 적 있니? 공짜 찜질방 왔다고 생각해~ 딱 한 번만 더 할게 5. 나는 이제 다른 길로 가고 있다 |
박정애의 다른 상품
|
소녀 셋, 말 많고 탈 많은 열일곱 살이다
송송이 시골에서는 공부 좀 한다고 우쭐대다가 엄마 등쌀에 못 이겨 얼떨결에 서울로 유학을 왔다. 하지만 생각처럼 서울 공부가 쉽지가 않다. 참고서를 붙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 보지만, 웬걸. 수학도 영어도 안개 속에서 바늘 찾는 기분이다. 시골에선 영어라면 제법 하는 축이었는데, 서울에서는 입도 벙긋, 못하면서 서울 영어하고 시골 영어하고는 근본이 다르다는 걸 깨닫고 절망하게 된다. 그런 송이를 주인집 딸이자 엄마 친구 딸인 아미는 젊음의 거리 홍대로 이끈다. 최아미 수학 성적은 거의 빵점에서 십 점 사이이지만, 돈 계산이라면 누구보다 빠르고,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은 미국 호텔재벌가 상속녀 패리스 힐튼이다.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풀하우스 만화방 집 딸내미 최아미 신세를 벗어나는 게 꿈이다. 아미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건 십만 원 수표에 그려진 무궁화이다. 아미처럼 세상에서 무궁화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친구가 한 명 더 있다. 강명애 학교에는 다니지 않지만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늘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가출소녀다. 그 누군가는 아빠도 아닌, 키다리 아저씨도 아닌 이상한 아저씨들이다. 딱 한 번만이라고 항상 다짐을 하지만 현실 앞에 번번이 그 결심은 무너진다. 날마다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는 아이, 눈이 너무 커서 오히려 불쌍해 보이는 아이, 그 아이는 아직도 구덩이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소녀 셋, 하루하루를 모아 다섯 장의 다이어리를 쓰다 1. 난 길을 걷고 있었다. 길 한가운데 깊은 구덩이가 있었다. 난 그곳에 빠졌다. 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 구덩이에서 빠져 나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2. 난 길을 걷고 있었다. 길 한가운데 깊은 구덩이가 있었다. 난 그걸 못 본 체했다. 난 다시 그곳에 빠졌다. 똑같은 장소에 또다시 빠진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빠져 나오는 데 또다시 오랜 시간이 걸렸다. 3. 난 길을 걷고 있었다. 길 한가운데 깊은 구덩이가 있었다. 난 미리 알아차렸지만 또다시 그곳에 빠졌다. 그건 이제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 난 비로소 눈을 떴다. 난 내가 어디 있는가를 알았다. 그건 내 잘못이었다. 난 그곳에서 얼른 빠져 나왔다. 4. 내가 길을 걷고 있는데 길 한가운데 깊은 구덩이가 있었다. 난 그 구덩이를 돌아서 지나갔다. 5. 난 이제 다른 길로 가고 있다. 포르티아 넬슨 「다섯 장으로 된 짧은 자서전」 송이의 구덩이 너무너무 똑똑해 보이는 선생님. 선생님은 아실까. 내 상태를. 내 문제를. 알면 좀 가르쳐 주시지. 하지만 세상의 선생님들이란 우등생 아니면 날라리한테만 관심을 가지는 족속이다. 나처럼 수업시간에 졸지도 않고 말썽도 안 부리고, 그저 커튼처럼, 사물함처럼, 눈에 띄지 않게 책상과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익명의 학생한테는 절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아미의 구덩이 “돈, 돈, 돈! 돈이 문제야. 돈만 많으면 사고 싶은 거 맘껏 살 텐데……. 아빠는 바보같이, 왜 그렇게 일찍 돌아가셨담? 엄마는 바보같이, 왜 돈을 조금밖에 못 번담? 홍태 오빠는 왜 재벌 집 아들이 아닌 거야? 그리고 쏭쏭이, 너는 또 왜 그저 그런 포도밭집 딸이냐고? 너라도 떵떵거리는 부잣집 딸이어서 이 가난한 베스트 프렌드한테 돈다발을 척척 안겨 주면 좀 좋으냐고.” 명애의 구덩이 “딱 한 번. 정말로 딱 한 번.” 명애가 일어나 앉아, 집게손가락을 치켜들고 고개를 까닥까닥 흔든다. 믿을 수 없다. 명애의 딱 한 번을. 내가 한숨을 쉬자, 명애가 또 히죽 웃으며 고개를 수없이 끄덕인다. 무섭다. 손쉽게 버는 무궁화 꽃, 정말로 무섭다.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 다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의지, 그런 걸 슬그머니 없애버리는 무궁화 꽃. 소녀 셋은 그렇게 열일곱 살의 인생길에 놓은 여러 구덩이에 푹푹 빠지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포도 꽃이 막을 뚫고 힘겹게 피어나는 것처럼 누가 뭐래도 꿋꿋한 소녀 셋은 오늘도 자신만의 삶의 기록을 차곡차곡 써 내려간다. 캔디가 실컷 울고 나서 눈물 글썽글썽한 얼굴로 또다시 웃는 캔디처럼, 씩씩하게! 그리고 믿는다. 언젠가는 자신 있게 "이제는 나도 다른 길로 가고 있다"고 미래의 자신에게 당당히 말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의 하루하루가 모여 자신의 자서전이 된다는 사실을. 소녀 셋,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다 열일곱 살, 하고 싶은 게 참 많은 나이다. 뭐든 사고 싶고 먹고 싶고 놀고 싶고 떠나고 싶고…… 하루에도 수억 개의 ‘싶다’가 마음을 붕붕 띄운다. 열일곱 살, 하기 싫은 것도 참 많은 나이다. 뭐든 보기 싫고, 듣기 싫고, 말하기 싫고, 웃기 싫고…… 하루에도 수억 개의 ‘싫다’가 마음을 가라앉힌다. 하루에도 수억 개의 ‘싶다’와 ‘싫다’가 싸움을 벌이는 나이이기에 열일곱 살 인생 앞에는 구덩이가 참 많다. 깊은 구덩이도 있고, 얕은 구덩이도 있고, 빠져 나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구덩이도 있고, 맘만 먹으면 언제든 빠져 나올 수 있는 구덩이도 있다. 알면서 빠지는 구덩이도 있다. 그렇게 수많은 구덩이에 빠지고 나오고 빠지고 나오면서 열일곱 살은 10대를 마치고 20대를 맞이한다. 하지만, 20대가 된다고 해서 앞으로의 인생길에 구덩이가 없을까. 어쩌면 우리는 수많은 구덩이에 빠지면서 20대를 보내고, 30대를, 40대를, 미래의 수많은 나를 만들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보내는 하루하루가 모여 미래의 내가 된다는, 자신의 자서전이 된다는 말은 아마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어제는 하루 종일 구덩이 생각을 했어. 우리가 빠졌던 구덩이. 빠져나온 구덩이. 또 빠질 구덩이. 몸 망가지고 맘 망가지고 삶이 통째로 망가져도 기어코 빠져드는 구덩이. 알면서도 빠지는 구덩이.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수없이 넘어지고 빠지고 하겠지? 하지만 이런 느낌 알겠니? 어떤 구덩이에 빠지든 내가 어디 있는지를 깨닫고 그것이 내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올 것 같은. 나를 믿게 되는. --- 「송이의 다이어리」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