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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 유키가 다가왔다. “나도 파고 싶은데.”
히로가 대답했다. “안 돼.” 그러고 나서 계속 구덩이를 팠다. --- p.6-7 옆집에 사는 슈지가 다가왔다. “뭐 할 거야, 이 구덩이.” 히로가 대답했다. “글쎄.” 그러고 나서 계속 구덩이를 팠다. --- p.8-9 아빠가 왔다. “서두르지 마라. 서둘면 안 된다.” 히로가 대답했다. “흠.” 그러고 나서 계속 구덩이를 팠다. --- p.10-11 손바닥의 굳은살이 아프다. 귀 뒤에서 땀이 흘렀다. “좀 더 파야 해. 더 깊게.” 히로는 생각했다. --- p.12-13 그때, 커다란 애벌레가 구덩이 아래쪽에서 기어 나왔다. “안녕.” 히로가 말했다. 애벌레는 잠자코 도로 흙 속으로 되돌아갔다. 갑자기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히로는 파는 일을 그만두고 쪼그려 앉았다. --- p.14-15 구덩이 안은 조용했다. 흙에선 좋은 냄새가 났다. 히로는 구덩이 벽에 생긴 삽 자국을 만져 보았다. ‘이건 내 구덩이야.’ 히로는 생각했다. --- p.16-17 옆집에 사는 슈지가 다가왔다. “함정으로 쓸 거야?” 히로가 대답했다. “글쎄.” 그러고 나서 계속 구덩이 안에 앉아 있었다.--- p.22-23 히로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구덩이 안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여느 때보다 훨씬 파랗고 훨씬 높아 보였다. 그 하늘을 나비 한 마리가 팔랑팔랑 가로질러 날아갔다. --- p.26-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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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아무 할 일이 없어서 혼자 구덩이를 파는 히로는 가족과 친구로부터 왜 구덩이를 파는가, 각각 다른 질문을 받는다. 땅속이 궁금하니까. 몸을 움직이고 싶으니까.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어떤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덩이를 파는데 이유 같은 건 필요 없다. 언뜻 이상한 행위로 보일 수도 있지만 어른의 놀이도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른 사람이 볼 때 모두 다 쓸데없는 짓이다. 그래도 구덩이를 파는 주인공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따뜻하다. “서두르지 마라. 서둘면 안 된다”라는 아버지 말도 인생에 울림을 준다. 뭔가를 깊이 파는 일이 인생에는 있기 미련이다. 파고, 또 파고, 녹초가 될 때까지 파 내려가는 동안 히로는 점차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간다. 자신이 파는 구덩이는 히로가 직접 만드는 최초의 장소이다. 그때 구덩이 아래쪽에서 애벌레 한 마리가 기어 나온다. 애벌레는 히로가 인사를 해도 잠자코 흙 속으로 되돌아가 버린다. 그러자 히로는 파던 일을 그만두고 구덩이 속에 쪼그려 앉는다. 주위는 조용하고, 흙에선 좋은 냄새가 난다. 구덩이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보통 때보다 더 파랗고 더 높아 보인다. 그 하늘을 나비 한 마리가 팔랑 가로질러 날아간다.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고 히로에게 딱 맞는 구덩이에서 히로는 해방감과 함께 고독을 느낀다. 문득 히로는 말한다. “이건 내 구덩이야.” 이렇게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히로가 구멍을 메우는 것은 마음이 충족되어 훌쩍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할 때마다 언제든 끄집어낼 수 있는 ‘내 구덩이’를 영원히 자신 안에 들여놓았기 때문이 리라. 〈옮기고 나서〉 10여 년 전 처음 이 그림책을 발견하고 바로 번역하였으나 출판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한참 시간이 흘러 이제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1976년에 초판이 나온 후 40년이 지났지만 지금 봐도 글과 그림이 신선합니다. 다니카와 슌타로 시인과 와다 마코토 화가, 이 두 콤비는 『우리는 친구』에서도 호흡을 맞췄습니다. 『우리는 친구』를 번역할 때도 지금처럼 설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외로울 때나 슬플 때 나는 이 구덩이 안에 앉아 하늘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도 아이와 똑같이 말할 것입니다. “이건 내 구덩이야”라고. 이 구덩이는 그 아이만의 구덩이면서 이 책을 읽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구덩이니까요. 내 가슴속 책꽂이에 오래 꽂혀 있던 이 그림책을 함께 나눌 수 있어 행복합니다. - 김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