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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태종실록 재위 5년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양장
이한우
21세기북스 2017.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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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품의 시리즈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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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들어가는 말
일러두기
태종 5년 을유년 1월 원문
태종 5년 을유년 2월 원문
태종 5년 을유년 3월 원문
태종 5년 을유년 4월 원문
태종 5년 을유년 5월 원문
태종 5년 을유년 6월 원문
태종 5년 을유년 7월 원문
태종 5년 을유년 8월 원문
태종 5년 을유년 9월 원문
태종 5년 을유년 10월 원문
태종 5년 을유년 11월 원문
태종 5년 을유년 12월 원문

저자 소개 1

LEE,HAN-WOO,李翰雨

1961년 부산 송도해수욕장 근처에서 태어나 여름만 되면 팬티만 입고 송도해수욕장을 오가던 개구장이였다. 중학교 때는 가방에 책 대신 야구 글러브를 넣고 다닐 정도로 야구에만 미쳐 있었고, 고등학교 때는 영화 [친구]에 나오는 교사 못지않은 선생님들한테 자주 맞아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1981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데모하다 얻어맞는 여학생을 보고 충격을 받아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겁이 많아서인지 결국 혁명가의 꿈을 접고 공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1985년 대학원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했다. 마르크스에 대한 미련이 컸지만 대학원 과정 때 우연히 접하게 된 하이데거에
1961년 부산 송도해수욕장 근처에서 태어나 여름만 되면 팬티만 입고 송도해수욕장을 오가던 개구장이였다. 중학교 때는 가방에 책 대신 야구 글러브를 넣고 다닐 정도로 야구에만 미쳐 있었고, 고등학교 때는 영화 [친구]에 나오는 교사 못지않은 선생님들한테 자주 맞아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1981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데모하다 얻어맞는 여학생을 보고 충격을 받아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겁이 많아서인지 결국 혁명가의 꿈을 접고 공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1985년 대학원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했다. 마르크스에 대한 미련이 컸지만 대학원 과정 때 우연히 접하게 된 하이데거에 매료되어 석사학위 논문으로 [마르틴 하이데거에 있어서 해석학의 문제]를 썼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1985년부터 번역을 시작해 첫 작품으로 《헤겔 이후의 역사철학》을 냈다. 그 후 지금까지 평균 1년에 한 권 정도 번역 작업을 해왔다. 심지어 1988년부터 1990년까지 번역병으로 근무할 때에는 네 권을 번역해 계급마다 한 권씩 번역한 셈이 됐다. 번역은 나의 운명을 바꿔놓기까지 했다. 1990년 제대 후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찾아간 곳이 [중앙일보]의 《뉴스위크》였다. 그때 정식기자로 일하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고 ‘번역하는 기자’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기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삶은 점점 그쪽으로 몰고갔다. 1991년 《월간중앙》에 김용옥의 《대화》를 비판한 것이 계기가 돼 [문화일보] 학술 담당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번역하는 기자’에서 ‘기사 쓰는 기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문화일보] 기자 생활 만 3년째 되던 1994년 12월에 [조선일보]의 제의를 받았다. [조선일보] 학술 출판 담당기자로 일하면서 한국 지식인 사회의 명암을 볼 수 있을 만큼 봤다. 2001년부터 1년 동안 독일 뮌헨에서 연수 생활을 하면서 촌티도 많이 벗었다. [조선일보] 국제부에서 일했고, 지금은 경제사회연구원 사회문화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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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12월 29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432쪽 | 820g | 158*230*30mm
ISBN13
9788950972721

책 속으로

관제(官制)를 고쳤다. (…) 비로소 여관(女官)을 두었다. 현의(賢儀)가 하나, 숙의(淑儀)가 하나, 찬덕(贊德)이 하나, 순덕(順德)이 둘, 사의(司儀)가 둘, 사침(司寢)이 하나, 봉의(奉衣)가 둘, 봉선(奉膳)이 둘이었다. _19~24쪽(태종 5년 을유년 1월 임자일 기사)

이조판서 이직(李稷, 1362~1431년)이 소(疏)를 올려 전선법(銓選法)을 논(論)했다. 소는 대략 이러했다. ‘본조(本曹)는 사람을 잘 저울질하여 골라 뽑는[銓選] 임무를 맡았으니 마땅히 사방(四方)의 재간(才幹) 있는 선비를 널리 구해[旁求] 중외(中外)에 포진시켜서 사림(士林)들로 하여금 그들의 재주를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이 없게 하고 임금과 신하의 여러 공적들[庶績]이 빛나게 하며 풍속(風俗)을 아름답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바로 전하께서 신하(臣下)에게 기대하는 바이며 신하로서 마땅히 온 마음을 다해야 할 바일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臣)은 저의 우천(愚賤)은 헤아리지 않고 감히 사람을 뽑는 방법을 아래에 조목별로 열거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재결(裁決)하고 채택해서 시행하소서.’ _38~39쪽(태종 5년 을유년 2월 을해일 기사)

병조(兵曹)의 보거법(保擧法)을 세웠다. 병조에서 청했다. “무관(武官)의 보거(保擧)는 경중(京中)에서는 동반(東班) 6품, 서반(西班) 4품 이상이 각각 3품 이하의 무재(武才)가 능한 자를 그 나이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천거하여 본관(本貫)과 부(父)의 직명(職名)을 갖춰 본조(本曹)에 올리고, 외방(外方)에서는 각 고을 수령(守令)이 경중의 사례와 같이 감사(監司)에게 보고하여 감사(監司)가 본조에 올립니다. 그러면 본조에서는 삼군부(三軍府)와 더불어 고험(考驗)하여 그 이름을 적(籍)에 기록했다가 갑사(甲士)의 궐원(闕員)이 생기면 낙점(落點)을 받아서 서용(敍用)하고, 만일 추천과 달리 그 실상이 못 미치는[不稱] 자가 있으면 죄(罪)가 거주(擧主)에게 미치게 하소서.” 그대로 따랐다. _70쪽(태종 5년 을유년 3월 을사일 기사)

‘옛날에는 백성들을 때에 맞춰 부렸기[使民以時] 때문에 부역이 3일을 넘지 않았습니다. 이는 백성들의 힘을 중히 여기고 농사에 힘쓰기를 염려한 것입니다. 지금 한도(漢都)에 이궁(離宮)을 짓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오니 승도(僧徒)들의 노는 손[遊手]과 부졸(府卒)들의 상역자(常役者)들로 부역시키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영선(營繕)의 잡무(雜務)와 공억(供億-물품 지원)의 큰 비용, 그리고 농가(農家)의 사람과 소를 이용하여 운반하고 일하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또 근년에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잇따라서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먹기도 어렵습니다. 게다가 지금 농사철을 맞아 공역(工役)을 멈추지 않으니 만약 파종(播種)할 시기를 잃어 장차 기근(飢饉)이 들게 되면 백성을 사랑하는[字民=子民] 지극한 어짊[至仁]에 훼손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농사짓는 어려움[艱難]을 생각하시고 한 사람이라도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게 됨을 염려하시어 유사(有司)에게 명령을 내려 농사철에 한(限)하여 우선 이 역사(役事)를 정지시켜 생민(生民)의 바라는 마음을 위로하셔야 합니다.’ 상은 그렇다고 여겨 기술(技術)이 숙달된 목수(木手) 외의 승려들은 모두 놓아 보내게 하고 그 부졸(府卒)들은 당번을 나눠 일하도록 명했다. _84~85쪽(태종 5년 을유년 3월 계해일 기사)

우박이 내리고 폭풍이 불었으며 밤에는 서리가 내렸다. (황해도) 서흥(瑞興)과 곡주(谷州)에는 우박이, (강원도) 평강(平康)에는 눈이, (황해도) 신주(信州-신천)에는 눈이 오고 서리가 내렸다. 상이 정양월(正陽月)에 서리가 내렸다 하여 자책(自責)하니 병조판서 남재(南在)가 답하여 말했다. “늘 있는 일일 뿐입니다.” 호조판서 이지(李至)는 재상(宰相)이 직책을 다하지 못한[不稱] 때문이라고 했다. 예조판서 이문화(李文和)가 답하여 말했다. “성상께서 마땅히 날마다 삼가셔야 합니다.” 상이 말했다. “참소(讒訴)가 행해졌는가? 백성들이 원한이 있는가? 어찌하여 하늘의 꾸지람이 이처럼 심한가?” _117~118쪽(태종 5년 을유년 4월 임오일 기사)

간관(諫官)을 불러 명하여 말했다. “금년 봄과 여름은 가뭄[旱氣]이 몹시 심했기에 내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경계하고 두려워하여[兢?] 내 허물을 들어 자책하고 있다. 몸을 닦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도리에 지극하지 아니함이 있는가? 정령(政令)이 고르지 못함이 있는가? 대신과 백료가 그 직책을 다하지 못함이 있는가? 환관과 궁첩이 간알(干謁)을 행함이 있는가? 너희들[爾等]은 직임이 언책(言責)에 있으니 마땅히 숨기지 말고 극언(極言)하라. 내 마땅히 품어서 받아들일 것이다.” _215~216쪽(태종 5년 을유년 7월 경자일 기사)

상이 태상전에 조알했다. 상이 태상께 장차 한경(漢京)으로 환도하겠다고 아뢰고 또 헌수(獻壽)하니 태상이 말했다. “음양(陰陽)의 설(說)이 비록 충분히 믿을 것은 못 되나 ‘왕씨(王氏) 500년 뒤에 이씨(李氏)가 나라를 얻어 한경(漢京)에 도읍한다’라고 했는데, 우리 집안이 과연 그 설(說)에 부합했으니 어찌 허황한 말이냐? 또 우리 집안이 혹시라도 미리부터 나라를 얻을 마음이 있었겠느냐? 왕이 (지금) 한경으로 환도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상 왕의 마음이 아니라 하늘이 시켜서 그러한 것이다.” _249쪽(태종 5년 을유년 8월 갑술일 기사)

‘돌아보건대 우리 한성(漢城)의 도읍(都邑)은 실로 도록(圖?)에 응하여 태상왕께서 정하신 곳이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있는 곳입니다. 백성들이 옮기기를 어렵게 여겨 살 곳으로 가려 하지 않는데, 전하께서 종묘(宗廟)의 중대함과 당구(堂構)의 의리로 옮기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시어 종묘에 고하여 길(吉)한 곳을 얻어 궁실(宮室)을 영건(營建)하고 환도(還都)하셨으니 종묘사직을 높이고 백성의 뜻을 정하고 태상왕의 환심(?心)을 받든 것입니다. 옛적의 천사(遷徙-천도)한 일과 비교하면 그 의의가 더욱 중(重)하니 마땅히 마음껏 노래하고 손발로 춤을 추어 넓고도 큰 거리[康衢]에서 오래오래 노래하고, 아름다운 음악[休聲]에 올리어 영원토록 후세에 들릴 것입니다.’ _341쪽(태종 5년 을유년 10월 임오일 기사)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난세를 치세로 바꾼 18년의 역사,
그 치열한 기록이 펼쳐진다!


태종 이방원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는가? 형제들을 살육하고 왕위에 오른 ‘피의 군주’, 조선의 설계자라 평가받는 정도전을 죽인 ‘냉혈한’… 그에 대한 이해는 즉위 이전의 비정한 면모에 머물러 있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태종의 자취를 좇는 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오랜 기간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저자는 최근 역사 저술가로서 매진하며 우리 사회의 기본을 밝혀줄 고전 번역에 힘쓰고 있다. 군주의 리더십 함양의 필독서인 『대학연의』를 비롯해 『논어로 대학을 풀다』 등 ‘사서삼경’ 등을 번역해온 저자의 시선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 일로 이동하여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하기에 이르렀고, 그 성과를 묶어 『태종: 조선의 길을 열다』 등 ‘이한우의 군주열전(전6권)’ 시리즈를 집필했다. 이러한 행보에서 나아가 조선의 여러 왕 중에서도 가장 먼저 『태종실록』을 번역한 이유는 그만큼 태종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큰 통찰을 주는 군주인 까닭이다.

나는 왜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하기로 결심했던 것일까? 선조들의 정신세계를 탐구해 우리의 정신적 뿌리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런 이유만으로 방대한 실록 번역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삶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깊은 지혜를 얻고 싶어서다. 그런 면에서 모든 실록 중에서 『태종실록』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지혜를 담고 있다. _본문 중에서

태종은 조선 건국 과정에서부터 왕이 되기까지 냉혹한 혁명가의 모습을 보였지만, 재위기간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상왕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외교 전략을 펼치고 관제개혁에 힘쓰는 등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기 위해 현실 정치의 영역에서 다양한 족적을 남겼다.

우리가 태종에 집중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조선 최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 때문이다. 『태종실록』 곳곳에는 세종의 한글 창제의 밑바탕이 된 민본정치의 기조가 담겨 있는데, 저자는 예리한 시각으로 이러한 부분을 짚어내며 태종의 정치철학을 드러낸다. 이처럼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세종을 비롯하여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태종을 적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자, 우리 역사 속에서 위기를 기회로 만든 군주의 리더십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올바른 번역, 치밀한 해석, 섬세한 역주…
우리에겐 친절한 실록 완역본이 필요하다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실록 원문의 편년체 서술을 따라 1년 단위로 책을 구성하여 재위기간 18년의 기록을 18권의 책으로 엮는 방대한 시리즈이다. 실록을 처음 읽는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문 번역 과정을 친절하게 담았고, 실록에 등장하는 인물?사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또한 기존 번역물의 오류를 바로잡고 저자의 새로운 해석을 담아냈다. 번역본과 함께 한문 원문을 책에 실었고, 독자들에게 한문 읽기의 묘미를 전하고자 ‘원문 읽기를 위한 도움말’을 통해 저자만의 번역 노하우를 소개한다.

기존의 공식 번역은 한자어가 너무 많고 문투도 낡았다. 게다가 역주가 거의 없어 불친절하다. 전문가도 주(註)가 없으면 정확히 읽을 수 없는 것이 실록이다. 특히 실록의 뛰어난 문체가 기존 번역 과정에서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을 개선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 _본문 중에서

고위 공직자들의 논문 표절과 무단인용 문제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저자는 최근 연구부정행위검증 민간기관인 연구진실성검증센터에서 실시한 논문표절 예비검증에서 모범 사례로 꼽혔다. 특히 인용문 번역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번역에 대한 저자의 철학과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결과다.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태종에 대한 탐구를 넘어『조선왕조실록』을 편집?요약본만으로 읽어온 독자들과 기존 공식 번역에 아쉬움을 느껴온 독자들 모두에게 실록을 깊이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역사의 진면목이 살아 숨 쉬는 우리 고전을 만나다

“음양의 설이 비록 충분히 믿을 것은 못 되나 ‘왕씨 500년 뒤에 이씨가 나라를 얻어 한경에 도읍한다’라고 했는데, 우리 집안이 과연 그 설에 부합했으니 어찌 허황한 말이냐? 왕이 한경으로 환도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상 왕의 마음이 아니라 하늘이 시켜서 그러한 것이다.” _본문 중에서

한양 천도를 마침내 이뤄낸 태종을 보며 태조는 천도를 왕의 뜻이 아닌 하늘의 명으로 해석하여 그 정당성을 부여한다. 계절과 날씨의 변화를 하늘의 분노로 인식하고 왕의 덕이 부족함을 염려했을 정도로 태종을 비롯한 당시 사람들에게 하늘의 명은 그만큼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천명에 의지한 천도 후 관제를 고치고 인재 등용의 원칙을 새로이 다잡는 등 태종의 정사는 더욱 무르익어갔다. 군주의 덕목은 동서양을 막론한 수많은 고전 속에 담겨 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시기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한우의 태종실록』은 우리의 고전에 담긴 선조들의 살아 있는 정신을 발견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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