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임진년(1592년, 선조25)/ 17
계사년(1593년, 선조26)/ 41 갑오년/(1594년, 선조27) 91 을미년(1595년, 선조28)/ 161 병신년(1596년, 선조29)/ 211 정유년 1(1597년, 선조30)/ 273 정유년 2(1597년, 선조30)/ 323 무술년(1598년, 선조31)/ 355 부록 --이순신 참전 주요 해전 정리/364 1.옥포해전 2. 당포해전 3. 당항포해전 4. 한산도해전 5.부산포해전 6. 명량해전 7. 노량해전 --난중일기에 대하여/372 난중일기의 체제와 내용/난중일기의 성격과 의미 --임진왜란 이전의 이순신/276 -〈난중일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이순신의 삶 --난중일기로 본 이순신/380 |
李舜臣, 본관 : 덕수(德水), 자 : 여해(汝諧), 시호 : 충무(忠武)
이순신의 다른 상품
김경수의 다른 상품
|
전쟁에 관한 기록들
-임진왜란- 해질 무렵에 영남 우수사 원균의 통지문이 왔는데 “왜선 90여 척이 와서 부산 앞 절영도에 대었다”고 하였다. 이와 함께 경상 좌수사 박홍의 공문이 왔는데 “왜선 350여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는 내용이다. 이에 즉각 임금께 장계를 올리고 순찰사와 병사, 전라 우수사 이억기에게도 공문을 보냈다. 영남 관찰사의 공문도 왔는데 동일한 내용이었다. --- p.33, 임진년(1592, 선조25년) 4월 15일 : 밤 열 시쯤 영남 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했다.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이길 수 없었다. 곧 임금께 장계를 올리고 삼도에도 공문을 보냈다. --- p.33, 임진년(1592, 선조25년) 4월 16일 -명량해전- 맑음.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가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적은 수의 수군으로는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고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하였고, 또 이르되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일망정 용서치 않겠다”고 엄격히 말했다. --- p.332, 정유년(1597, 선조30년) 9월 15일 맑음, 이른 아침에 특별 정찰부대가 보고하기를 “수효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적선이 명량을 거쳐 곧장 우리가 진을 치고 있는 곳을 향해 들어온다고”했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3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대적하는 것이라 스스로 낙심하고 모두 도망갈 꾀만 내는데,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2마장 밖에 나가 있었다. 내가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지자, 현자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니 탄환이 마치 폭풍우처럼 쏟아졌다. 군관들이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했다. 그러나 우리 배가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서 형세가 어찌될지 알 수 없었으므로,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돌아다보며 안색이 질려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되“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는 못할 것이니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하고 명하였다. --- p.332~333, 정유년(1597, 선조30년) 9월 16일 -어머니, 가족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 11일 : 어머니께 가니 아직 주무시고 계셨다. 웅성거리는 바람에 놀라 깨셨다. 기운이 가물가물해 앞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하니, 애달픈 눈물만 흘릴 뿐이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데 착오는 없으셨다. 적을 토벌할 일이 급해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12일 : 맑음.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하고 두세 번 타이르면서도 헤어지는 슬픔을 말하지 않으셨다. 선창에 돌아와서는 몸이 불편한 것 같아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 p.93, 갑오년(1594, 선조 27년) 정월 11~12일 저녁때 천안에서 온 어떤 사람이 편지를 전하는데 미처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겉봉을 대강 뜯고 둘째 아들 열의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자가 씌어 있어 면의 전사를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일이 어디 있을 것이냐.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그 빛이 변했구나. 슬프고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너는 어디로 갔느냐. --- p.339~340, 정유년(1597 선조30) 10월 14일 |
|
임진왜란 당시 치열했던 전장의 분위기를
가장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전달한 사료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과 충무공 이순신의 삶을 조명해 볼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죽으려고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쟁에 임했으며, 단 한 번의 패배도 허락하지 않았던 조선 수군의 명장 충무공 이순신. 탄환에 맞아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강인한 정신력과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그는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의 가슴속에 위대한 영웅으로 남아 있다. 1592년(임진년)부터 1598년(무술년)까지 그가 전장에서 몸소 체험한 일들을 기록한 《난중일기》는 왜군과의 치열한 접전, 긴박했던 전장의 분위기,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략과 전술 등 전란의 상황을 가장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기록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또한 지휘권을 둘러싼 갈등,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흔들리는 조정의 분위기와 그 와중에 전국토를 휩쓴 전란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고통 받는 민중들의 모습까지도 아주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영웅이기 이전에 인간, 이순신의 고뇌와 갈등이 담긴 기록 한편 《난중일기》에는 전란의 기록 외에 인간 이순신의 내면이 진솔하게 기록되어 있어, 성웅으로 추앙받아 온 충무공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난중일기》에서 볼 수 있는 이순신의 모습은 일반의 기대와는 사뭇 다르다. 강철 같은 체력과 정신력을 겸비한 무장이었을 것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거의 매일 과로와 육체적 고통으로 시달리거나, 밤새 식은땀을 흘리는 날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앞날에 대한 불안감을 떨치지 못해 간밤에 꾼 꿈을 풀이하거나 자주 점을 치기도 했다. 전장에서 늘 침착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지만, 사적인 심정을 기록한 일기에서는 인간으로서 쉽사리 물리칠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의 그늘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한 집안의 가장이었던 이순신의 자상하고 애틋한 면모도 잘 드러나 있다. 그는 늘 멀리 있는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했고, 틈날 때마다 어머니의 안부를 묻는 효성 지극한 아들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전해 듣고 오열하는 대목에서는 그 역시 한 국가의 장수이기 전에 뜨거운 부정을 가진 아버지였음을 느낄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부하의 죽음에 애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고생하는 병사들을 위해 술잔치를 벌이는 등 군졸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배려를 잊지 않는 모습에서 그의 넓은 아량과 자애로운 인품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은 뛰어난 공적을 쌓은 대가로 오히려 모함을 당하거나 좌천당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정치적으로 라이벌 관계에 있던 원균과 갈등을 빚으면서 조정대신들의 미움을 받았다. 이에 대해 이순신은 원균을 ‘흉인’‘흉악한 자’라고 거침없이 칭하며 좋지 않은 감정을 자주 드러낸다. 이처럼 사적이고 감정적인 부분까지 솔직하게 기록한 《난중일기》을 통해 충무공 이순신의 인간미 넘치는 모습도 들여다 볼 수 있다. 이 책은 이순신이 직접 쓴 친필 초고본을 바탕으로 하되, 초고본에 빠져 있는 부분은 1795년(정조 19)에 간행된 전서본을 참고하여 한글로 쉽게 풀어쓴 것이다. 보충 설명이 필요한 곳에는 꼼꼼히 주를 달고, 다양한 자료들을 추가하여 《난중일기》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책의 말미에는 《난중일기》 속에 그려진 인간 이순신의 모습을 분석한 편저자의 해설을 수록해 작품을 더욱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