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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을 건너서[도강록(渡江錄)] …… 019
구요동기(舊遼東記) / 관제묘기(關帝廟記) ) / 요동백탑기(遼東白塔記)) / 광우사기(廣祐寺記) 성경잡지(盛京雜識) …… 079 속재필담(粟齋筆談) / 상루필담(商樓筆談) / 성경 가람기(盛京伽藍記) / 산천기략(山川記略) 일신수필(馹迅隨筆) …… 141 북진묘기(北鎭廟記) / 차제(車制) / 희대(戱臺) / 시사(市肆) / 점사(店舍) / 교량(橋梁) / 강녀묘기(姜女廟記) / 장대기(將臺記) / 산해관기(山海關記) 관내정사(關內程史) …… 201 이제묘기(夷齊廟記) / 호질(虎叱) 막북행정록(莫北行程錄) …… 248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 270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298 부록 …… 311 |
朴趾源, 호 : 연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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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라하의 크기는 우리나라 임진강과 비슷했다. 홀로 높은 언덕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산은 곱고 물은 맑은데 정경이 탁 트이고 나무는 하늘에 닿을 듯했다. 그리고 그 속에 큰 마을이 자리 잡고 있어 개, 닭소리가 들리는 듯하며 땅이 기름져 개간해도 좋을 듯했다. 패강(浿江) 서쪽과 압록강 동쪽에는 이에 비할 만한 곳이 없으나 너, 나가 모두 이를 버려두고 빈 땅이 되었다. 어떤 이는 ‘고구려 때 이곳에 도읍한 일이 있었다’고 하니 이는 이른바 국내성이다.
--- p.25 책문 안을 바라보니 숱한 민가들은 모두 들보가 높이 솟아 있고 띠 이엉을 덮고 있었다. 등성마루가 훤칠했고 문호는 가지런했다. 네거리가 쭉 곧아 마치 먹줄을 친 것 같았다. 또 담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사람이 탄 수레와 화물 실은 수레가 길에 가득했다. 벌여 놓은 그릇들은 모두 그림을 그려 구운 도자기들이었다. 어느 구석을 보아도 시골티가 조금도 나지 않았다. --- p.32~33 살펴보니 대체 집을 지음에 있어 온통 벽돌만이 사용됐다. 벽돌의 길이는 한 자, 너비는 다섯 치여서 둘을 가지런히 놓으면 이가 꽉 물리고 두께는 두 치이다. 쌓는 법은 한 개는 세로, 한 개는 가로로 놓아, 저절로 감(坎) 이(離), 괘가 이룩된다. --- p.41 진실로 오랑캐를 물리치려면 중화가 끼친 법을 모두 배워 우리나라의 유치한 문화와 풍속을 고쳐야 한다. 밭갈기, 누에치기, 그릇 굽기, 풀무질 등으로부터 공업, 상업에 이르기까지도 배워야 한다. 남이 열을 한다면 우리는 백을 하여 먼저 우리의 백성을 이롭게 한 뒤 그들로 하여금 회초리를 마련하게끔 하여 저들의 굳은 갑옷, 날카로운 무기에 매질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중국에는 아무런 볼 만한 장관이 없더라고 말해야 한다. --- p.146 수레 제도는 무엇보다도 궤도를 똑같이 해야만 한다. 궤도를 똑같이 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두 바퀴 사이의 일정한 본을 어기지 않음이다. 그렇게 되면 수레가 천이고 만이고 간에 그 바퀴자리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니 이른바 [중용] 등의 서책에 나오는 거동궤(車同軌)는 곧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두 바퀴 사이를 마음대로 넓히고 마음대로 좁힌다면 길 가운데 바퀴 자리가 한 틀에 들 수 있을 것인가? --- p.154 연경이 차츰 가까워지자 거마(車馬)의 울림이 메마른 하늘의 우레 같았다. 길 양쪽에 부호들의 묘가 있는데 담을 두르고 해자를 파 여염집처럼 보였다. 해자 가의 갈대 숲 사이에 꽁깍지 같은 작은 배들이 매어 있고 돌다리는 모두 무지개처럼 공중에 떠 있었다. --- p.235 며칠 산골길만 다니다가 열하로 들어서니 우선 궁궐의 장려함에 놀라게 된다. 시전이 좌우로 10리에 뻗쳐 북쪽 변방의 큰 도회지임을 실감케 된다. 서쪽에는 봉추산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마치 다듬잇방망이 같이 생겼는데 높이가 백여 길이나 된다. 꼿꼿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데 석양이 옆으로 비치어 찬란한 금빛을 뿜고 있다. 강희제가 이름을 ‘경추산’이라 고쳤다고 한다. 열하성은 높이가 세 길이 넘고 둘레는 30리이다. 강희 52년(1713)에 돌을 섞어 얼음무늬로 쌓아 올렸다. 이를 가요문(哥窯?)이라 한다. 민가의 담도 모두 이 방법을 썼다. (*가요문:이리 저리 가늘게 갈라진 금이 보이는 무늬) --- p.268 내가 찬술을 달래서 넉 냥쭝을 큰 잔에 다 부어 단숨에 들이마신 것은 저들을 두렵게 하기 위해 일부러 대담한 체한 것이다. 그러니 실로 겁쟁이 짓이지 용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찬술을 달랄 때부터 여러 되놈들이 놀랐고 그것을 큰 잔으로 단숨에 마시자 모두들 나를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 p.280 |
호쾌한 문장과 섬세한 표현, 문체와 사상의 혁명
《열하일기》는 18세기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통찰한 여행 기록으로 시대를 앞서간 조선 실학자의 혜안이 담겨 있다. 연암 박지원은 “천하를 위하여 일하는 자는 진실로 백성들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실학사상을 가진 학자였다. 따라서 백성들에게 필요하다면, 당시 조선 사대부들에게 오랑캐라 일컬어지던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북학 사상을 이 책에 고스란히 담았다. 매사에 이용후생을 추구했던 연암은 집을 지을 때 벽돌을 쌓는 법, 온돌을 놓는 법, 수레의 바퀴, 해운시설, 상업적 환경 등 청나라의 실용적인 기술과 문명을 세세하게 관찰하여 조선에 전하고자 했다. 조선 정조 시대 문체반정의 표적이 되다 《열하일기》는 조선시대 일반 민중들이 쓰는 용어나 세속적인 표현, 비유와 우화적인 묘사, 소설을 삽입하는 등 새로운 스타일로 구성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대부들의 반응도 극단적이어서 열렬한 지지를 보낸 반면, 전통적인 기풍과 풍속을 해친다 하여 질책을 받았다. 그러나 연암의 문체를 따라 하는 풍조가 유행하자 정조가 실시한 문체반정의 표적이 되었다. 정조는 당시 유행하던 소설체 문장을 패관문학이라 배척하고 전통적인 고문을 문장의 모범으로 삼도록 신하와 선비들에게 명하고 패관소설과 잡서의 수입을 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계층과 실학자들 사이에 엄청난 양이 필사되어 세간에서 읽혔다. 통쾌한 즐거움을 주는 해학 넘치는 글쓰기 열하까지의 여행길에서 연암은 문화적으로 전혀 다른 중국인의 생활과 모습을 대면하며 다양한 사건을 겪는다. 그러나 자신의 실수담이나 부끄러운 면모를 전혀 숨기지 않는 호쾌하고 대담한 선비의 자세를 견지하고, 풍자와 해학으로 사회적 모순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보여준다. 청나라의 꽤나 번화한 마을에서 연암은 기세 좋게 필법을 자랑하고 싶어서 전당포에 걸어둘 휘호로 ‘欺霜賽雪(기상새설)’ 넉 자를 써주었다. 그러나 기실 ‘그 넉 자는 심지가 밝고 깨끗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가루가 서릿발처럼 가늘고 눈보다 흰, 그것으로 만든 국수를 자랑하는 뜻이었다.’(135~136쪽) 장신구 파는 집에 국수가게를 위한 글자를 써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기도 하고 중국인들의 기세에 눌리지 않기 위해 큰 잔에 중국의 작은 술잔 여러 개를 부어 단숨에 들이키며 허세를 부렸던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호랑이의 입을 빌어 이야기하는 [호질]에서의 해학적인 문체는 《열하일기》 특유의 재미를 더해준다. “대체로 제 것이 아닌 것을 취하는 게 도(盜)이고 남을 못살게 굴고 그 생명을 빼앗는 것을 적(賊)이라 한다. 너희들이 밤낮없이 쏘다니며 팔을 걷어붙이며 눈을 부릅뜨고, 함부로 착취하고 훔쳐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228쪽) 대목은 양반 계층의 탐욕과 부도덕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연암의 시대정신이 녹아들어 있어, 한바탕 신명나는 악극을 보는 듯 통쾌함을 자아낸다. 현대적인 문체로 생생한 재미를 되살린 《열하일기》 원전 《열하일기》는 본래 26권 10책으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이다. 이 책은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연암만의 독특한 문체와 실용주의적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내용을 선별했으며, 생생한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현대적인 문체로 풀어 썼다. 사절단의 이동경로를 그린 지도를 수록해 한양에서 열하까지 연암의 여정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했다. 부록으로는 연암의 일생과 사상, 정조가 문체반정을 시행한 시대적 배경 등도 정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