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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1부 너도바람꽃 - 11 여수에서 - 12 눈이 멀다 - 14 오른쪽 어깨에는 각이 살고 있다 - 16 나무에는 사슴이 살고 있다 - 18 역설적 유전자 - 20 우리의 문장은 외따로 존재할 수 없다 - 22 있잖아요, 분홍 - 24 퍼즐, 사람 - 26 차라리와 그래도 사이 - 28 우렁이 - 30 으 에 으흠 어허 - 32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 34 거기에 있지 않은 나와 있는 나 사이를 줍는다 - 36 접속사 - 38 제2부 어둔 계열 - 43 너를 인용한다 - 44 우리 틀래? - 46 나는 어디에 - 48 아버지의 한 연구 3 - 50 코 파기처럼, 마치 - 52 영하 17도 날씨가 계속되었다 - 54 사전을 찾는 이유 - 56 어느 한때 - 58 물기 - 60 점 점 점 - 62 색깔 없는 미술관 - 64 미조항 - 65 나가도(島) - 66 제3부 공간의 시학 - 71 저 강아지풀 같은 간지러움을 - 72 잔디 심으러 갔다 - 74 나는 잔다 - 76 꽃을 그냥 보냈다 - 78 각을 보았다 - 80 꾀죄죄함을 - 81 한 주정뱅이가 쥬라기 지층에, 또 한 가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 - 82 노란 줄 - 84 나 아직 - 86 먼 곳 - 88 바톤 - 90 무한한 변주 - 92 동인천 삼치구이 골목에서 - 94 4등분의 경계와 딸꾹질의 상관관계 - 96 감쪽같다는 말 - 98 제4부 환청 - 101 곡을 탄다 - 102 산길 하나가 마음속에서 빠져나갔다 - 104 유추가 사라졌다 - 106 오후 4시에 사람이 번지고 있었다 - 108 모눈종이 위의 기울기 - 110 배드 ? 민트 공 - 112 요 앞의 일 - 114 노 서비스 에어리어 - 116 저 속 - 118 청주 사직동 - 120 손지식 - 121 떨림은 어디서 오는가? - 124 벌레가 된 날 - 126 도화사거리에서 - 128 해설 이경림 안김과 안음이 뒤섞인 곳에 벚꽃이 휘날리고 눈이 내렸다 - 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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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가닿지 못한 이야기는 다 멀었다
눈에 빠져 죽었다 침묵은 보이지 않는 눈의 언저리를 한 바퀴 돌아갔다 바깥이 되었다 눈이 멀어서 밥이 멀고 내가 멀어서 그림자가 멀었다 어떤 눈이 나를 송두리째 담아 갔다 문득 문이 열리고 306동 불이 켜지고 모퉁이 앵두나무에 앵두가 익어 갔다 세상은 공중인데 내 손은 사무적이었다 몇 발자국 세다 보면 길은 끊어지고 손끝에 닿는 대로 기억이 왔다 눈이 고요하였다 끝이 넓었다 나는 고요를 떠다가 손을 씻었다 아카시아 향기 같은 것이 종일 흔들렸다 마음 하나가 눈언저리에 오래 있다 사라졌다 누가 먼눈을 들여다보랴 눈은 멀리서 볼 수 없던 것을 보고 있다 먼 오후가 가득하였다 아무리 멀어도 더 멀지는 않았다 *** --- 「눈이 멀다」 중에서 나는 어느 생의 방파제에서 떨어졌다 실업이 자꾸 나를 밀었다 어깨를 가만히 세우면 어긋난 각들이 살 속을 파고들었다 떨어진 어깨에 모난 말들이 터를 잡았다 깨진 것들은 왜 타인의 얼굴을 하는가 수박은 박살이 나고 병은 깨지고 그해 여름도 산산이 부서졌다 어깨는 어느 생의 모퉁이였다가 나였다가 떨어진 각을 아는 척했다 팔을 들었다 내릴 때마다 각들이 서로 찌르는 소리가 났다 그동안 너무 오래 서성거렸다 걸음걸이가 세모다 표정이 세모다 가슴 언저리에도 세모가 자라기 시작했다 세모를 걸으며 나는 충분히 무모했다 실업은 질기고 캄캄했다 밤마다 도처에 머물던 각들이 일제히 어깨로 달려와 수런거렸다 나는 말수가 적어졌고 대신 각들이 우두둑 소리를 냈다 떨어진 각도를 지우기 위해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았다 나를 놓친 시간은 까맸다 죽은 숫자들이 우글거리는 달력을 떼어 부채질을 했다 그해 여름의 날짜들이 떨어지며 각이 되었다 *** --- 「오른쪽 어깨에는 각이 살고 있다」 중에서 분홍이라는 말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분홍으로 산다는 건 달콤하게 익어 가는 것 내 눈과 내 낱말들이 누군가의 한 잎 속에서 산다는 것 당신의 한 잎은 온통 숨결이어서 마음을 실어 나르는 수레여서 분홍 잎맥을 따라 스며든 시간들 사이여서 날마다 분홍 안에서 익숙해지는 몸짓 분홍을 입어요, 분홍을 먹어요, 분홍을 춤춰요 분홍은 나를 얼마나 멀리 밀고 가는지 있잖아요, 그거 알아요? 청평이라든지 덕적도 여수 부산 통영 무의도 같은 지명을 여기선 다들 분홍이라 불러요 한여름 배롱나무 산딸기 복숭아 떨어지는 꽃잎도 나는 분홍이라 불러요 분홍에서만 나를 느낄 수 있으니 뒤집혀도 분홍 분홍과 분홍 사이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둥긂이 되었지요 있잖아요 분홍 한 장을 넘기며 가장 낮은 곳 가장 높은 곳에서 울어 본 적 있나요? 한 잎의 분홍 앞에서 웃어 본 적 있나요 오늘은 분홍이 지는 곳까지 걸어가 봤어요 거기까지 가 보니 당신이 진짜 분홍이었어요 오뉴월 복중 같은 사내 하나가 그 속으로 들어가서는 영 나오지 않았어요 *** --- 「있잖아요, 분홍」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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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과 안음이 뒤섞인 곳에 벚꽃이 휘날리고 눈이 내렸다
정진혁 시인은 날카롭고 모난 것들을 부드럽게 휘어 따뜻하고 낭만적인 이미지로 보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실 날카롭고 모난 것들이 부드럽고 낭만적인 것들이 되기는 어렵다. 어쩌면 그것들은 그들이 가진 강렬하고 위험한 이미지를 타고 날아올라 문득 꽃이 되기도 하고 이파리가 되기도 하며 그 말들이 가진 공격성과 상처의 이미지를 순화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이 정진혁 시인이 시도하는 모순어법의 최종 목표가 아닐까 나름 생각해 보기도 한다. 이번 시집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에 이르러 정진혁 시인은 그의 시적 주제를 멀고 아득한 것들, 슬프거나 분홍스런 것에서 모나고 기하학적이고 날카로운 이미지들로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시인이 세계의 내면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읽어도 될 것 같다. 그런 속에서도 정진혁 시인이 보여 주는 그 ‘각’들은 왜 이리 멀고 아름답고 슬픈가.(이상 이경림 시인의 해설 중에서) 정진혁 시인은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났으며, 공주사범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2008년 [내일을 여는 작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간잽이』 『자주 먼 것이 내게 올 때가 있다』를 썼다. 2009년 구상문학상 젊은 작가상, 2014년 천강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은 정진혁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시인의 말 나는 확신이 없는 사람이다 꽃잎 떨어지는 막막함 안에 서서 나를 증명한다 너의 등 뒤에서 숨소리를 듣는다 항상 떠날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나를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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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전제로 하지 않는 삶은 없다. 동시대인은 모두 서로 부대끼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라진다. 시인(詩人)은 시대인(時代人)이다. 그 어느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동태를 살피고 꿈을 엿보고 아픔을 주시하는 사람이다. 정진혁 시인은 가난한 가장이었던 아버지와 그 아버지 때문에 인생의 쓴맛 단맛을 본 가족 얘기를 스쳐 지나가듯이 한다. 고향 청주와 여수와 동인천, 그리고 서해의 여러 섬에 가 보고 시를 쓴다. 그곳의 풍경과 사람 사는 모습을 우리말의 교묘한 배치를 통해 그린 그림이 다 왠지 좀 쓸쓸하다.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나와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우리말의 높낮이와 진폭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그 시절과 이 시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이상하게 울적해져 바다로 떠나고 싶어진다. 삼치구이나 추어탕을 앞에 놓고 소주도 한잔하고 싶어진다.
- 이승하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