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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종말

사랑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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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1월 23일
쪽수, 무게, 크기 380쪽 | 458g | 130*205*22mm
ISBN13 9791167900739
ISBN10 116790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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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 반가워요.” 내가 말했다. 이것도 증오의 순간 중 하나였다. “산책 다녀온 거예요?”
“네.”
“날씨가 참 고약한 밤이군요.” 내가 비난조로 말하자 헨리가 걱정된다는 듯이 덧붙였다. “흠뻑 젖었어, 세라. 이러다가 감기에 걸려 죽겠어.”
일반적으로 쓰이는 상투적 표현이 운명의 통고처럼 대화에 끼어드는 수가 있다. 그러나 설사 그가 사실을 얘기했다는 걸 우리가 알았다 해도 우리 둘 중 누가 안달하고 불신하고 증오하면서도 그녀의 파멸을 진실로 불안해했을지 궁금하다. --- p.33

나는 과거의 그때를 그냥 내버려 두고 싶었다. 왜냐하면 1939년의 일을 쓸 때면 나의 모든 증오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증오는 사랑이 작동시키는 분비샘과 동일한 분비샘을 작동시키는 것 같다. 심지어 사랑이 초래하는 행동과 동일한 행동을 초래한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배우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이 질투 많은 유다였는지 아니면 비겁한 베드로였는지 그들의 행동만으로 알 수 있겠는가? --- p.47~48

사람은 행복하기만 하면 어떤 규율도 견뎌 낼 수 있다. 글쓰기 습관을 깨뜨린 것은 바로 불행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다투는지, 내가 얼마나 자주 짜증을 부리며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는지 깨달았을 때 나는 우리의 사랑이 불행한 운명을 맞이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사랑이 시작과 끝이 있는 정사로 변한 것이었다. 나는 사랑이 시작된 그 순간을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사랑이 끝난 마지막 시간을 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 p.60

“나는 사랑이 끊임없이 계속되기를 원했어. 시들어 가는 일 없이……” 나는 세라 말고는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헨리의 대답은 세라의 대답과는 달랐다. 헨리가 말했다. “그건 인간의 본성이 아냐. 우린 만족할 줄 알아야 해……” 세라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빅토리아 공원에서 그렇게 헨리 옆에 앉아 하루가 저물어 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모든 ‘사랑’의 종말을 떠올렸다. --- p.119~120

“그렇다면 기도할 것이 별로 없었을 텐데. 안 그래요?” 나는 세라를 놀렸다. “기적을 바라는 거 말고는.”
“희망이 아주 없을 땐,” 그녀가 말했다. “기적을 바라는 기도를 올릴 수밖에요. 기적은 가련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데,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잖아요.” --- p.128

“알면 놀라실 거예요.” 미스 스마이스가 말했다. “사람들은 희망의 메시지를 간절히 바라고 있거든요.”
“희망?”
“예, 희망.” 리처드 스마이스가 말했다. “만약 온 세상 사람들이 이 지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전부이고 그 밖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안다면, 그 어떤 내세의 보상도 응보도 천벌도 없다는 걸 안다면, 어떤 희망이 생겨날 것인지 당신은 모르겠습니까?” 그의 얼굴은 한쪽 뺨이 눈에 띄지 않으면 무척 고귀해 보였다. “그렇게 되면 우린 이 세상을 천국처럼 만들기 시작할 겁니다.” --- p.145~146

나는 부서진 계단을 올라가서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스테인드글라스 말고는 1944년 그날 밤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일이 시작된 지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세라는 죽은 줄 알았던 내 몸을 보았을 때 종말이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그녀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에 이런저런 억지스러운 이유로 전화를 덜 하게 되었던 것, 사랑이 끝날 것 같은 위험을 알아차렸기에 내가 그녀와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던 것에서부터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이후를 내다보기 시작했으나, 우리가 그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 p.264

이 소설은 사랑과 증오의 이야기인 동시에 신앙의 이야기이다. (…) 작품의 서두에서 화자인 벤드릭스는 이것은 사랑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증오의 기록에 훨씬 더 가깝다고 말한다. 이후 벤드릭스의 의식을 통해 보게 되는 증오의 모습, 질투의 모습은 가히 압권이다. 독자는 작가의 예리한 펜이 이끄는 대로 속절없이 끌려 들어가 우매하고 옹졸하고 변덕스러운 사랑의 민낯을 확인하고는 경악한다. 그러면서도 화자의 모습에서 얼마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씁쓰레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 p.374, 「옮긴이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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