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그 비행을 앞두고 나 역시 오랫동안 밤마다 누워 천장을 보면서 내 옆 좌석에 아리따운 여인이 동행하지는 않을까 하는 공상을 하곤 했다. … 그러나 실제로 내 옆 좌석에 앉은 사람은 여드름쟁이 꺽다리였다. 천재 로커라 불린 버디 홀리처럼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볼펜 여러 개를 가지런히 플라스틱 필통에 넣어 웃옷 주머니에 간직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필통에는 ‘오클라호마 그루버스 트루밸류 하드웨어, 없는 것 없이 다 있습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목에는 종기 같은 게 나 있었는데 제대로 치유되지 않은 총알 자국 같아 보였고, 몸에서는 안티푸라민 냄새가 강하게 났다. 그 녀석은 비행하는 내내 성경을 읽었는데, 손가락 끝으로 한 줄 한 줄 짚어가며 소리 내어 읽어서 마치 내 오른쪽 귀에 대고 열렬한 속삭임을 읊어대는 것만 같았다.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을까 자꾸 염려스러워졌다. 왜 종교를 불문하고 광신도들은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모조리 개종시키고자 하는 걸까? 내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프로야구 팀의 광적인 팬이긴 하지만 남들도 팬이 되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단 말이다. --- '1. 북유럽을 가다' 중에서
함메르페스트는 준비 운동치고는 다소 오래 걸린 감이 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할 참이다―나에게 본격적인 여행이란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게 아니라 이동하는 여행을 말한다. 나는 돌아다니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유럽 전역을 떠돌아다니면서 영국에는 도저히 들어오지 않을 영화의 포스터도 구경하고 움라우트(독일어의 특수기호)와 세디유(대개 c 밑에 붙는 s 모양의 기호)가 잔뜩 붙은 각종 상품과 상점 안내문, 그리고 주차금지 표지판 비슷하게 생긴 문자(ø)를 신기한 듯 들여다보고 싶었다. 아무리 너그럽게 생각해도 그 나라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전혀 히트할 가능성이 없는 대중가요도 듣고, 나와는 평생 연이 닿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전화박스 사용법부터 저 식품의 정체가 무엇인지까지 도무지 친숙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국적인 곳에 가고 싶었다. 낯선 곳에서 어리둥절해하는가 하면 매료되기도 하고, 실타래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근사한 대륙의 다양성을 경험하고 싶었다. 기차를 타고 한 시간만 가면 주민들의 말도, 음식도, 업무 시간대도 다르고, 주민들은 한 시간 전에 만났던 사람들과 너무나 다른 삶을 살면서도 묘하게도 비슷한 곳, 나는 이런 근사한 대륙의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먼저 집에 다녀와야 했다. --- '2. 함메르페스트' 중에서
네덜란드 인들은 영국인들과 매우 비슷하다. 모두 좀 칠칠맞지 못하다. 그러나 좋은 의미에서 그렇다. 차를 주차하는 법이나 쓰레기통을 배치하는 방법, 제일 가까운 나무나 난간 등에 자전거를 아무렇게나 던져놓는 모습까지 상당히 유사하다. 독일이나 스위스에서 보는 강박적인 정리정돈은 찾아볼 수가 없다. (독일과 스위스에서는 주택가에 주차된 차들도 자와 측량 기계를 이용해서 세워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암스테르담에서는 차를 운하 주변에 아무렇게나 버려두는데, 물에 굴러 떨어지기 직전인 차들도 종종 눈에 띈다. 이들은 영어 발음도 영국인처럼 해서 나는 당황하곤 한다. 『더 타임스』에서 일할 때 네덜란드 출신의 동료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에게 반 고흐를 ‘반 고’로 발음하는지, ‘반 고흐’로 발음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는 다소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아니, 빈센트 반….”까지 발음하더니 갑자기 나방이라도 목에 걸린 듯이 가래 뱉어내는 소리를 낸다. …중략… 나는 다른 네덜란드 사람들에게도 이런 주문을 해보았다―파티에서 만난 네덜란드 사람과 달리 할 말이 없을 때 심심풀이로 하기 좋은 장난이다. 결과는 늘 똑같다. 모두 가래 뱉는 소리를 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얘기할 때는 가래 뱉는 소리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서 네덜란드 사람들의 발음이 영국인과 비슷하다고 했지만, 사실 어떤 지역의 영어와도 다르고 기묘하다. --- p.135, '8. 암스테르담' 중에서
안네 프랑크 박물관은 유대인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잘 보여주는 곳이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목숨에 위협을 느끼면서 프랑크 일가를 도운 네덜란드 사람들과, 이들 같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는 것이다. 오토 프랑크(안네 프랑크의 아버지)의 비서였던 미프 기스는 식량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배급 체제 속에서 자신과 남편뿐 아니라 매일 8명 분의 식량을 구해야 했다. 위험할 뿐만 아니라 극도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결코 드물지 않았다. 2만 명이나 되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 기간에 유대인들을 숨겨주었다. 이들 역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 pp.145~146, '8. 암스테르담' 중에서
뒤를 돌아보자 한 덴마크 여성이 내 팔뚝을 잡고 즐겁게 재잘대며 말을 건다. 대체 이런 사람들은 내가 도착하는지 어떻게 아는 걸까?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들 사이에는 빌 브라이슨이 온다는 소식을 알리는 회보라도 있는 게 틀림없다. 나는 역 어딘가 벽에 시내 지도가 있지 않을까 두리번거리고 그 여성은 여전히 내 팔을 꼭 잡은 채―실성한 사람들이 꼭 그렇듯이―비밀 얘기를 들려주면서 함께 역사를 배회하고 다녔다. 우리 둘이 좀 이상해 보였는지 회사원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신문 너머로 우리를 살폈다. “모르는 여자예요”라고 여자에게 들리지 않게 말했지만 그는 계속 노려보았다.…중략… 나는 왜 실성한 사람들은 기차역이나 버스 터미널을 그토록 좋아하는 걸까 생각해 보았다. 역이나 터미널은 이들의 사무실과 같다. 아침이면 배우자에게 이렇게 말하겠지. “여보, 나 지금 역으로 가는 길이거든. 가서 쓰레기통도 좀 뒤지고 모르는 사람들한테 말도 걸어야지. 이따가 퇴근 후에 봐!”대체 왜 해변이나 알프스, 아니면 좀 더 쾌적한 곳으로 가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 pp.165~166, '10. 코펜하겐' 중에서
나는 분명 여행의 끝에 와 있었다. 저 반대편이 아시아가 아닌가. 유럽에서 가장 멀리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였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오랫동안 고생만 하고 있는 내 아내는 한 해 걸러 아기를 가졌는데 지금도 임신 중이었다. 아내는 전화 통화에서 아이들 중 어린 두 녀석은 성인 남자만 보면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잔디는 허리까지 자랐고, 목장 울타리는 일부가 쓰러져가고 있었으며, 양들은 물가의 풀밭에, 소들은 옥수수 밭에 아무렇게나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그리고 나도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족이 보고 싶었고, 내 집의 친숙함이 그리웠다. 매일 먹고 자는 일을 걱정하는 것도 지겨웠고, 기차와 버스도, 낯선 사람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도, 끊임없이 당황하고 길을 잃는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라는 사람과의 재미없는 동행이 지겨웠다. 요즘 버스나 기차에 갇혀서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대는 내 모습을 보고 벌떡 일어나 자신을 내팽개치고 도망가고픈 충동을 얼마나 많이 느꼈던가? 동시에, 나는 계속 여행을 하고 싶다는 비이성적인 충동을 강하게 느끼기도 했다. 여행에는 계속 나아가고 싶게 만드는, 멈추고 싶지 않게 하는 타성이 있다. 해협 바로 저편에 아시아가 있다.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저기가 아시아 대륙이라고 생각하자 경이로웠다. 몇 분이면 아시아 땅을 밟을 수 있다. 돈도 아직 남았다. 그리고 내가 가보지 못한 대륙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지 않았다. 대신에 콜라를 한 잔 더 주문하고, 오가는 페리들을 바라보았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아시아에 갔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여행이란 어차피 집으로 향하는 길이니까.
--- '22. 이스탄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