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출간일 | 2003년 07월 15일 |
---|---|
쪽수, 무게, 크기 | 311쪽 | 427g | 132*224*30mm |
ISBN13 | 9788937460814 |
ISBN10 | 8937460815 |
출간일 | 2003년 07월 15일 |
---|---|
쪽수, 무게, 크기 | 311쪽 | 427g | 132*224*30mm |
ISBN13 | 9788937460814 |
ISBN10 | 8937460815 |
20세기 미국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윌리엄 포크너의 문제작. 미국 남부의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한 시골 아낙의 죽음과 그녀의 가족이 겪는 슬프면서도 기묘한 장례 여행을 통해 삶과 죽음, 선과 악, 운명과 욕망에 대한 무거운 성찰을 담고 있는 포크너의 초기 걸작 중 하나이다. 포크너는 미시시피에서 일생을 보내며 이 지역을 거의 모든 자기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다. ‘요크나파토파’라는 가상의 마을을 설정하고, 이곳에서 남부인의 몰락해 가는 운명과 정서를 심도 깊게 파헤친 그의 작품은 흔히 요크나파토파 연작이라고 불릴 정도로 이 지역의 자연과 전통 사회의 탐구에 집중되어 있다. 이 작품 또한 남부의 뿌리 깊은 지방색을 짙게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일개 보고문학이나 세태소설에 그치지 않고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주제에 도달한다. 미시적으로 탐구하되 거시적으로 보편성을 획득하는 포크너 문학의 원동력은, 역설적이게도 기존의 문학 형식을 극복하려는 강렬한 실험 정신에서 비롯된다. 이 작품은 59개의 장을 열다섯 명의 내면 독백으로만 구성하는 독특한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장마다 다양한 서술 기법이 동원되었다. 겉으로는 단조롭고 투박한 인물의 언행 이면을 심층적으로 파고드는 의식의 흐름 기법, 상투성에서 벗어난 고도의 상징과 은유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으며 주제를 확장하고 공감의 폭을 넓힌다. |
윌리엄 포크너는 미국 모더니즘 문학의 개척자로서 전통적인 소설 형식을 파괴하고 소설 문법에 혁신을 가져온 작가로 높게 평가 받는다.
그의 소설 가운데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는 각 장마다 화자가 모두 다른 매우 독특한 형식을 띠고 있다. 그래서 작품을 읽을 때 상황과 줄거리 파악이 쉽지 않다. 그런데, 각 장의 제목인 화자를 염두에 두고 읽으면 각 인물의 내면의 심리를 알 수 있어서 작품을 읽는 묘미와 깊이를 더한다.
미국 남부의 농촌마을, 가난하고 열악한 상황 속에 한 가족이 있고 그들의 엄마가 어느 날 죽음을 맞는다. 그런데, 그 죽음 앞에 가족들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보인다.
무책임하고 무능한 가장인 앤스 번드런은 아내의 유언이라며, 죽은 아내를 이곳에서 무려 40마일이나 떨어진 그녀의 친정 제퍼슨에 묻어야 한다고 공언한다. 그렇게 앤스 번드런과 그의 자녀 다섯은 무더운 여름날, 무리한 장례 여행을 떠난다. 그녀의 다섯 남매가 그녀의 죽음을 애 닳아 하는 것도 아님에도 이 여행에 반대하는 자식은 또 한명도 없다.
어쨌든 이들은 모두 각자의 임무에만 몰두하면서 함께 여행을 이어간다.
목수인 큰 아들 “캐시”는 엄마의 관을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더니, 엄마가 죽은 후에는 자신의 목공 도구에만 집착을 한다. 둘째 아들 “달”은 자신은 엄마가 없다고 생각하고, 셋째 아들 “주얼”은 자신이 일한 돈으로 마련한 말에만 집착을 한다. 외동딸 “듀이 델”은 아무에게도 말 할 수 없는 비밀로 고민에 싸이고, 너무 어린 막내아들 “바더만”은 물고기의 죽음과 엄마의 죽음을 동일시 하며 현실을 부정한다.
무더운 날씨와 쏟아 붓는 비 때문에 이들은 여행 도중에 크게 다치기도 하고, 부패되는 시체의 고약한 냄새 때문에 이웃들에게 민폐만 끼친다. 그러면서 쥬얼이 혼외 자식임이 밝혀지기도 하고, 달은 자신도 모를 분노가 폭발하며 방화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행은 이어지고, 마침내 제퍼슨에 도착한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그들의 엄마 애디 번드런을 매장한다. 그리고 소설은 아버지 앤스 번드런이 모두의 뒷통수를 때리는 반전으로 마무리 된다.
소설을 읽는 내내 불편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무능한 가장이 이끄는 가정이 얼마나 황폐화 될 수 있는지 그 민낯을 보게 된 것 같아 몹시 안타까웠다.
그 속에서 아내와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피폐해지고, 서로 원망하며 갈등하게 된다. 물리적으로 함께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파편화 되어 가는 한 가족의 불행을 속속들이 알게 되는 과정은 참으로 불편했다. 그들 주변의 인물들은 그나마 모두 상식적인 생각과 판단을 하였다. 그들의 등장이 그나마 숨통을 트여주었으나, 주변사람들의 조언은 들은 체도 않는 앤스네 가족들의 태도에 또 한 번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보면, 큰 일이 닥쳤을 때 내 자신도 늘 이성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한다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의 대부분의 일에 비이성적, 불합리적으로 대처하며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발자국 만 떨어져서 생각하면 답이 보이는 일인데도, 막상 눈앞에 닥쳐 내 일이 되면 허둥거리면서 엉뚱한 것에만 매달려 일을 그르치고 만다.
책의 제목이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임을 생각할 때 죽은 자인 “에디”가 주인공일 것 같은데, 막상 에디의 이야기는 책 전체에서 딱 한 챕터만 등장한다. 어려서부터 평범하지 못했던 시절을 겪었던 그녀는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는 오랫동안 죽어 있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는 그녀 아버지의 말을 오랫동안 부정하면서 살았지만, 결국, 그녀도 그 말에 따라 죽음을 맞이 한 것으로 보인다. 애디는 어쩌면 타고난 우울증 같은 것에 시달리다 남편과 아이들과 멀어지고, 결국 죽음을 맞은 것이 아닐까? 그로인해 아이들도 하나같이 정상적인 정서를 갖지 못해 보인다. 아버지와 남편에 대해 깊은 증오같은 것도 느껴지고, 사람들의 위선에 대해서도 애디는 인정할 수 없었다. 특히,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들에 대해, 그것을 진짜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말”의 유희에 아주 큰 거부감을 나타낸다.
|
애디의 챕터가 결국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아이들이 태어난다고 부부가 저절로 부모가 되는 것도 아니며, 아이들을 낳고 모유를 준다고 저절로 모성애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가족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서로를 돌보며 의무를 다 해야 완전한 모습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느 가족이나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다. 그런 문제와 갈등을 현명하게 풀어내고 극복해내는 데에 삶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내 옆에는 누가 남아 있을까? 그들은 나에 대해 뭐라고 얘기 할까? 난 어떤 사람으로 내 주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야 할까?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그들이 나의 죽음에 신경이나 쓸까? 인간이란 살아서나, 죽어서나 고독한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죽음을 맞을 때 좀 의연해 질 수 있으려나?
책을 덮으며 마음이 많이 무거워진다.
<내가 죽어 누워있을때>를 읽고
한 가족이 있다.
엄마가 누워있는 침대옆 창문 밖에서 관을 짜는 캐시, 그 곁에서 부채질을 하는 딸 듀이 델, 3달러를 벌기위해 떠난 달과 주얼, 막내 바더만.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남편 앤스.
열흘 동안 누워있으면서 애디는 가족들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애디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가족들이 예상한대로 애디는 죽었다. 그리고 그녀의 유언대로 그녀를 묻기위해 제퍼슨으로 향했다. 비가 억수로 퍼부어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모두 물에 잠기고 끊어지는 바람에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거리가 열흘이 걸리는 긴 여정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가족들은 아무도 그 여정을 멈추자고 말하지 않는다. 제각각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적을 슬픔 아래에 감추고 썩어가는 엄마를 마차에 싣고 말똥가리의 배웅을 받으며 가족들은 끝까지 임무를 완수해낸다.
엄마의 죽음앞에서 가족들의 모습은 죽음을 애도하는 슬픔에 찬 모습만은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위해 발버둥치는 우리들의 온갖 궁상스런 모습을 가지가지로 보여주고 있다. 죽음을 슬퍼하는 듯 하면서 우리는 뒤로 딴생각을 품는다. 왜냐면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아직 살아내야할 남은 생이 있으니까...
내가 죽어 누워 있을때
나는 죽어가고 있다. 그래서 아들 캐시는 관을 준비한다. 나는 이제 곧 그 관에 들어갈 것이다
나는 죽었다. 나는 내가 태어난 곳에 묻히고 싶어. 내가 죽으면 태어난 곳에 묻어달라고 가족에게 말했었지. 남편과 나의 아이들은 아마도 그 소원을 들어 줄거야.
애디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온 가족들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히 애디의 장례로 할일이 많아졌다. 애디의 소원대로 제퍼슨에 장례를 치르러 가야 하니까.
그런데 하필 비가오고 다리가 무너지고 불이난다. 그 여정은 험난하다.
고난의 행군이었다.
그 제퍼슨에 묻기위해서 가는 동안 그들은 그 가는 동안에 자신이 그곳에 가야하는 이유들을 찾고 있었다. 마치 겸사겸사 .가는 날이 장날이듯. 하지만 제퍼슨에 가는 이유는 애디를 묻기 위해서다.
각 단락의 이야기가 여러 화자들의 1인칭 시점으로 되어있어 그들의 상황도 그들의 생각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무수한 사연이 있었다. 왜 제퍼슨에 묻어 달라고 했는지도 왜 재퍼슨에 가는 길이 험난 한데도 포기하지 않는지 알 듯하다.
그들에게도 제퍼슨으로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죽음과 삶은 별개지만 또 같은 듯한 양면이 존재했다.
죽음이 하나의 계기도 만들어주고 죽음이 치유도 했다가 해방의 이유도 되었다.
슬프다는 마음보다 때로는 장례를 잘 치르는 행사에 짜여진 극본대로 움직이고 있는 듯하다.
마지막에 아이의 돈을 갈취해 새의치를하고 새엄마를 데려오는 아빠에게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새엄마가 가져오는 축음기에 반해버리고 만 아이를 보며 어쩌면 이리 현실을 잘 그렸을까 생각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라는 말이 되새겨진다.
나도 모르게 이상한 아집으로 이상한 관념으로 살아가는건 아닐까 반문하게 한다.
내 사는 모습은 책을 읽는 나는 어떤 사람이지.
제퍼슨에 묻어달라는 사람
제퍼슨에 묻으로 가는 사람
인생에 정답은 없겠지만
이 책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무리한 부탁도 무모한 판단도 많은 이들의 수고로움을 동반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