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章)이야기를 탐닉하는 한 뇌의 고백(章)
1990년대 초, 당시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 하나가 있었다. 서울대공원에서 한 여성이 남자 친구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테스트를 해 보겠다며 사자 우리에 손수건을 던진 후, 남자 친구에게 “나를 진정 사랑한다면 저 손수건을 꺼내오라.”는 주문을 한 것이다. 사자는 멀찌감치 떨어져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고, 남자는 용기를 내어 우리 안으로 뛰어들었다.
남자가 철창을 넘어 우리 안으로 들어오자 사자는 순식간에 그를 덮쳤고, 10분간 지속된 사투 끝에 남자는 결국 사자에게 물어 뜯겨 죽고 말았다. 사랑을 테스트해 보겠다며 남자 친구를 사자 우리 안으로 내몬 여성은 사회적인 지탄을 받았고, 그 광경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던 그녀의 고통 또한 사회적 동정을 얻었다.
그런데 내게 이 사건이 각별히 흥미로웠던 것은---시간이 꽤나 지난 후 한 신문에 난 토막 기사에서 본 것인데---사자에게 물려 죽은 남자를 부검한 결과 그의 입속에서 사자털이 잔뜩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사자가 자신을 사정없이 물어뜯는 동안, 그도 사자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했던 것이다. 절대적인 공포 속에서 엄청난 폭력을 당하는 상황에서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생각, 이 살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이 그를 죽기 살기로 저항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생존 본능은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순간, 엄청난 분노와 함께 미친 듯이 덤벼대는 인간의 폭력 성향도 결국 이 생존 본능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명체라면 공히 가지고 있을 이 생존 본능을 우리는 인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로봇에게 생존 본능을 코딩해 자신을 분해하거나 부수려는 존재에게 맞서 분노하게 만드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
소설 #눈먼 시계공##의 아이디어는 20년 전 일어난 이 사건에서 출발했다. 삶의 힘든 순간, 무료한 순간, 혹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순간마다 문득 떠오르는 ‘남자 입속의 사자털’이 나에게는 도무지 풀 수 없는 인생의 화두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과학자인 내게 소설을 써 보고 싶다는 ‘생애 첫 충동’을 일으켰다.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2004년 가을, 대전으로 내려오는 고속 버스 안에서 작은 조각 메모지 4장에 이 소설의 착상을 미친 듯이 써 내려가며 혼자 흥분했던 기억을. 이내 그것을 읽던 책에 조심스럽게 꽂아 수년을 간직했으나, 다시 펼치지 않아도 될 만큼 내 머릿속에 오로지 ‘기억’으로, 아니 ‘소설 같은 이야기’로 간직해 왔다.
술자리에서 종종 영화 감독과 함께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보자며 의기투합하기도 했지만, 술자리 다음 날까지 진지하게 진행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 이야기가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늘보다 넓은 뇌’를 가진 소설가 김탁환 선생을 만난 덕분이었다. 그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이내 소설을 함께 써 보자며 제안했고, 술자리 다음 날부터 더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인문학은 물론 과학에도 관심과 조예가 깊었던 그는 우리 소설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풍성한 이야기로 만들어 주었고, 무엇보다 은석범과 최볼테르, 노민선, 서사라 등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
지난 2년 동안, 소설 속 인물과 사건들, 그리고 ‘2049년 서울’이라는 배경에 대해 매주 각자가 쓴 글을 수정하고 토론하는 ‘공동 창작의 시간’은 과학자에겐 마치 연구 논문을 함께 쓰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대한민국 문학사에서, 아니 세계 문학사에선 흔한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 공기를 마시며 ‘과학적 상상력’을 머리에서 쥐어짜며 한 문장 한 문장을 써내려 갔던 경험은 이야기꾼들의 위대함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시간이었고, 과학자들이 지금 실험실에서 탐구하고 있는 것들이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를 가늠해 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나는 곧 나의 뇌다.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이 몸이라는 생물학적 토대와 살아온 환경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면, 그것이 한데 모여 실질적으로 사고와 행동을 만들어 내는 곳이 ‘뇌’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서 이해가 가장 더딘 이 복잡한 기관에 대한 우리의 탐구가 조금씩 깊어지면서, 인간이 우리 자신에 대해 조금씩 알아 가면서, 그리고 휴머노이드라는 유사 인간을 잉태하고 싶은 욕망을 조금씩 실현하면서, 결국 인간이 겪게 될 사건을 이 소설은 다루고 있다.
평소 호기심의 촉수를 사방으로 뻗으며 양성굴설성(兩性屈說性,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 방향으로 향해 가는 문학적 생명체의 한 특성)을 가진 독자들이라면, 설령 음성굴과성(陰性屈科性, 과학이라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달아나는 인문학적 생명체의 한 특몼) 있는 분들이라도 즐길 수 있도록 성의 있게 작업한 우리 책을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읽어 주시길 진심으로 고대한다.
2049년으로부터 39년 전
봄의 한복판
정재승
---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