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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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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08월 09일
쪽수, 무게, 크기 148쪽 | 222g | 128*205*20mm
ISBN13 9788932022291
ISBN10 8932022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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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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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을 긁적거리며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배 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이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 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의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여인일 뿐이라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 믿어왔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 보니,로 시작해서 어쩌다 보니,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 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추락하는 나의 친구들:
옛 연인이 살던 집 담장을 뛰어넘다 다친 친구.
옛 동지와 함께 첨탑에 올랐다 떨어져 다친 친구.
그들의 붉은 피가 내 손에 닿으면 검은 물이 되고
그 검은 물은 내 손톱 끝을 적시고
그때 나는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는 듯
인중을 긁적거리며
그들의 슬픔을 손가락의 삶-쓰기로 옮겨 온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3일, 5일, 6일, 9일……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히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
기억 없는 죽음, 무의미한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일랑 잊고서
인중을 긁적거리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뿐인 청혼을 한다.

--- p.12~15


매혹

사랑하는 두 사람
둘 사이에는 언제나 조용한 제삼자가 있다
그는 영묘함 속으로 둘을 이끈다
사랑에는 반드시 둘만의 천사가 있어야 하니까
둘 중 하나가 사라지면
그는 슬픔의 옆자리로 자기 자신을 이끈다
사랑에는 반드시
“잊지 마”라고 속삭이는 천사가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나는 모른다
신이 낮과 밤을 가르는 시간을
두 사람이 신 몰래
서로의 영혼을 황급히 맞바꿔야 했던 시간을

그 시간을 매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매혹 이후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간다

매혹 이후
한 사람의 눈빛은 눈앞에 없는 이에 의해 빚어진다

매혹 이후
한 사람의 눈빛은 눈앞에 없는 이에게 영희 빚진 것이다

그러니 그는 평생에 가장 깊은 주의를 기울이며
“하얀 돌 위에 검은 돌”을 올려놓듯이
사랑과 비밀을 포개놓을 수밖에

나는 어렴풋이 기억한다
목욕을 막 끝낸 여자의 어깨 위에 맺힌 물방울들
남자가 용기를 내 닦아주려 하자
더 작고 더 많은 구슬로 흩어지던 그것들
커튼 사이로 흘러들던 한 줄기 미명과
입술 사이에 물려 있던 한 조각 어둠

그런데
한 눈동자 안에 시작과 끝이 모두 있었던가?

나는 이제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다
거미줄처럼 서로를 이어주던
눈빛과 눈빛의 무수한 교차
그 위를 바삐 오가는 배고픈 거미처럼
새벽녘까지 끝날 줄 모르던 이야기
바로 그날 태곳적부터 지녀온
아침이라는 이름을 잃어버린
환하고 낯선 하나의 세계

--- p.7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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