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이 아무 말 없이 공배를 하나 메운 순간,
“다섯 집인가요?” 하고 입회자인 오노다(小野田) 6단이 말했다. 매우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명인의 다섯 집 패배가 분명한 탓에 굳이 계가를 하는 수고를 덜어 주려는, 명인에 대한 배려였으리라. --- p.8
나도 내 방으로 돌아와 언뜻 밖을 내다보니, 오타케 7단이 그야말로 눈 깜짝 할 새 부리나케 솜옷으로 갈아입고 정원에 나와 건너편 벤치에 홀로 앉아 있었다. 팔짱을 꽉 낀 채였다. 파리해진 얼굴을 수그리고 있었다. 잔뜩 찌푸린 겨울날 해거름에 제법 쌀쌀하고 널찍한 정원에서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 p.9
그때 대국실로 들어온 야스나가(安永) 4단이 문지방 앞에 두 손을 짚고 진심 어린 절을 했다. 경건한 예배다. 두 명의 기사는 알아채지 못한다. 그리고 명인이나 7단이 자기 쪽으로 시선을 향하는 낌새가 있을 때마다 야스나가는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린다. 정말이지 이런 식으로 예배할밖에 도리가 없다. 귀신들이 맞붙는 처절한 대국이었으리라. --- p.30
이 사진은 비현실적으로도 보이지만, 이는 한 가지 기예에 매달려 현실의 많은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비극적인 결말의 얼굴이기 때문일 테지. 고난을 헤쳐 온 운명의 얼굴을, 나는 사진에 남긴 것이리라. 슈사이 명인의 기예가 은퇴기에서 끝난 것처럼 명인의 생명도 끝난 것 같았다. --- p.35
“시작하지.” 명인이 재촉했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거칠었다. 무얼 꾸물거리고 있나, 라는 식이다. 7단의 태도가 짐짓 연극적이다 싶어 언짢았는지, 아니면 명인의 기운 넘치는 전의(戰意)의 표출일까. 7단은 살짝 눈을 떴지만 다시 눈을 감았다. 훗날 이토의 여관에서도 대국 날 아침에 법화경을 읽은 오타케 7단은 이때도 눈을 감은 채 정신을 가다듬고 무언가를 읊조렸으리라. 이렇게 생각할 틈도 없이 돌소리가 드높이 울렸다. 오전 11시 40분이었다. --- p.37
혼인보 슈사이 명인은 30여 년간, 흑을 잡은 적이 없었다. ‘이인자’가 없는 ‘일인자’였다. 명인이 살아 있는 동안은 후진 가운데 8단도 없었다. 동시대의 상대들을 완전히 눌렀고 다음 시대에는 그 지위에 맞먹는 자가 없었다. 명인의 사후 10년이 되는 지금, 바둑에서 여전히 명인의 지위를 계승할 방도가 마련되지 않는 것도 슈사이 명인의 존재가 그만큼 컸다는 게 한 가지 이유이리라. 예도로서 바둑의 전통이 존중한 ‘명인’은 아마도 이 명인이 마지막일 것이다. --- p.55
그날의 겨우 15, 16수쯤은 굳이 확인할 것도 없이 국면 전체가 늘 기사의 머릿속에 남아, 식사 중이건 수면 중이건 달라붙어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이렇듯 직접 늘어놓아 보지 않고선 납득이 안 되는 까닭은 명인의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 때문인지도 몰랐다. 또한 명인의 허술한 일면인지도 몰랐다. 이처럼 연로한 명인의 재미있는 행동에도, 그리 행복하지 않은 고독한 기질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 p.73
“아아……, 거긴 튀어 오르든가 내뻗든가 두 가지밖에 없는 곳이니까 맞히는 사람이 많겠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절로 명인의 등허리가 꼿꼿이 펴지면서 정좌를 하고 고개가 반듯해졌다. 대국 때의 자세다. 늠름하고 서늘한 위엄이 갖추어졌다. 허공의 대국을 마주하고, 명인은 한동안 무아의 경지에 있었다. --- p.86
흑 69가 공격의 귀수였다면 백 70은 받아치기의 묘수였다고, 입회한 오노다 6단도 감탄했다. 명인은 담담히 위기를 헤쳐 나갔다. 명인은 한 걸음 물러나며 위험을 피했다. 쓰라린 명수(名手)였으리라. 흑이 예리한 노림수로 쳐들어간 기세를, 백은 이 한 수로 늦추었다. 흑은 힘을 쏟은 만큼의 이득을 취했지만, 백은 상처를 떼어 버리고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다. --- p.93
8월 10일은 간밤의 달빛도 환했으나 아침의 강렬한 햇살, 선명한 그림자, 반짝이는 흰 구름, 이 바둑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한여름 날씨였다. 자귀나무도 이파리를 한껏 펼쳤다. 오타케 7단이 걸친 겉옷의 하얀 끈이 유독 눈에 띄었다. --- p.111
“요즘 오타케 씨의 바둑은 어둡군요.”라고 이와모토 6단이 말하는 걸 나는 하코네에서 들은 적이 있다.
“바둑에도 어둡다, 밝다가 있습니까?”
“그럼요, 있고말고요. 바둑 성격의 색깔이지요. 바둑이 우울한 겁니다. 어두운 느낌이 있습니다. 어둡다 밝다, 이건 물론 승패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오타케 씨가 약해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만…….” --- p.142~143
그러나 여기서 백에게 선수가 돌아왔다. 명인은 엄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채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고, 얼굴이 어느새 적동 빛깔로 상기되었다. 볼살이 실룩실룩 움직였다. 바람이 이는 소리, 스님이 북 치며 지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명인은 47분 만에 두었다. 명인이 이토에서 보여 준 단 한 번의 장고였다. --- p.158
평소의 바둑이라면 오타케 7단은 남은 1분으로 백百 수까지도 두는 추격전을 보여 줄 법한데, 이 바둑에서는 7단도 아직 예닐곱 시간의 여유가 있음에도 끝내기에 들어서자 팽팽히 맞선 신경의 급류를 타고 그 속도를 멈추기 어려운 모양이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다그치듯 무심코 바둑통에 손을 넣었다가 퍼뜩 놀라 생각에 잠기는 일이 빈번하다. 명인조차 일단 돌을 잡고 나서 잠시 망설인다.
--- p.181~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