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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로드
최예지 저 / 살구 그림 | 폴앤니나 | 2020년 01월 3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5 리뷰 4건 | 판매지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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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1월 31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272쪽 | 420g | 127*188*20mm
ISBN13 9791196798727
ISBN10 1196798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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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는 명절날 육전을 부치다 말고 엄마가 누구인가를 물었다. 동태전을 부치던 할머니는 못 들은 척했고 만두피를 밀던 할아버지는 아빠가 날 주웠다고 답했다. 배냇저고리에 든 쪽지엔 아빠가 아빠라고만 적혀 있었다고. 그러므로 엄마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곁에 누워서 전을 부치는 족족 주워먹던 아빠가,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애한테 쓸데없는 거짓말을 한다면서 성질을 냈다. 왜 애를 헷갈리게 하느냐고.
“야야, 아부지가 진실을 알려주마.”
그는 기세등등하게,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나는 그의 똥구멍에서 태어났다. 어느 날 하도 똥이 안 나와서 식은땀이 흐르고 입에서 헉,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힘을 주었는데, 하늘이 노래지고 딱 죽는구나 싶었는데, 이대로 질 수 없단 생각이 들어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고 했다. 학, 합, 하! 그 순간 풍덩 소리와 함께 변기 물에 떨어진 내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가 할아버지에게 화내는 것을 본 일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어서, 어린 나는 그의 말이 사실이겠거니 했다.
--- 「애비로드」 중에서

그는 단언컨대 개새끼였다.
짧은 치마를 입고 구두를 신고 간 날에, 나는 그의 정체를 깨달았다. 핥듯이 할금거리는 시선 탓에 허벅지가 간지러울 무렵, 그가 나를 창고로 불러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꺼내달라고 말했다. 나는 의자를 밟고 올라섰다. 그는 아래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얼굴이 아니라, 정확히는 스커트 안을 보려고 했다.
“어머, 어머, 선생님.”
나는 비틀거리며 그의 어깨에 기대섰다. 얼굴이 시뻘게진 그가 껄껄 웃고.
이후 바깥양반이 점심상에 오른 풋고추를 보면서 야, 고추가 참 실하네, 말하며 은근히 웃으면 나는 어머, 정말 그러네요, 작은 고추는 매워서 싫은데, 답했고 그걸 맛있게 씹어먹었다. 그의 입에서 나긋나긋한 시폰 원피스가 야하다는 말이 나오면 일주일 내내 비슷한 소재의 옷만 골라입고 다녔다. 그는 나의 장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인사 중 한명이었고 개중 가장 다루기 쉬운 축에 속했다. 상대해주는 만큼 챙김 받는단 점에서조차 마나님보다 나았다.
--- 「공과 영의 생존법」 중에서

“왜 하필 여기로 왔어?”
갑자기 네가 묻는 바람에 나는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너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건 넌데, 왜 자꾸 와.”
“언니 여기 여러번 왔어? 이 오빠랑 헤어져서? 언니가 헤어지자고 했어?”
저 계집애가 나를 말려죽이려고 아주 작정한 모양이었다. 차갑게 쏘아보자, 입술을 조그맣게 오므리더니 손바닥으로 턱 덮었다. 그리고는 올라올 때처럼 쪼르르 내려가버렸다. 네 눈가에 희미하게 웃음기가 어렸다. 이 상황이 재미있기보다는 어처구니가 없는 쪽인 것 같았지만.
“모르는 줄 알았어?”
“저기, 난 그냥.”
“그냥?”
“그냥, 예뻐서 그랬어.”
말을 맺은 뒤 나는 곧바로 후회했다. 좀 더 멋진 말을 했더라면 좀 덜 또라이처럼 보였을 텐데, 싶어서였다. 미련이 남아서 그랬다고 하거나, 뭐라도 남기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거나, 아니면 네가 그리워서 그랬다고 하거나. 그럴듯한 알리바이, 거짓이지만 진심인 말들.
--- 「드라이브, 드라이브」 중에서

우리는 등굣길에 마주치는 일이 잦은 편이었다. 그날도 사거리쯤에선가 우연히 만나 학교까지 함께 걸었다. 교문을 지나가려는데 문 앞을 지키고 섰던 선생이 나를 불러 세웠다. 머리 길이 때문이었다.
나는 선생에게 최대한 소상하고 공손하게 나의 죄를 일러바쳤다. 머리를 자르려면 만이천원이 드는데 용돈을 다 써버린 데다 사실은 미용실에 앉아있으면 푸들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 좋지 못하고 바깥이 너무 춥고 그래서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요지는 멋을 내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내버려뒀더니 이렇게 된 거라는 이야기였다.
선생은 그러냐, 하면서 웃었다. 선생이 웃기에 나도 웃었다. 그러자 선생은 미용실에 갈 필요가 없게 해주겠다면서 나를 학생지도실로 끌고 갔다. 내가 끌려가니까 선희는 울상을 해 가지고서 나를 따라왔고 선생은 그날 바리깡을 들었다. 내 뒷머리를 쥐가 파먹은 것처럼 밀어놓은 것이다. 선희는 창백한 낯빛으로 일련의 광경을 지켜보다가 선생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세요?”
선생이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다. 그녀는 반복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냐고요.”
선희는 다음날부터 민머리로 학교에 왔다. 머리카락이 길면 자꾸 잡생각이 나서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 「이건 아마도」 중에서

레미가 차드와 병원에서 만난 다음 날, 두 사람은 PC방에서 또 만났다. 둘의 꼴을 보고 초등학생 두엇이 슬금슬금 피하는 걸 보며 가게가 떠나가도록 웃어젖힐 때였다. 차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가 길어질수록 그럴 리가 없다는 말만 반복하며 사색이 되어가던 차드가, 전화를 끊더니 레미의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중얼거렸다.
“경찰선데, 내가 차 사이드미러를 박살냈다는데?”
“야, 그거 걷어차서 니 다리 깨진 거네.”
그런가보다고 차드가 대답했다. 레미는 낄낄거렸다.
“다리값은 어제 냈고, 차값도 물어주면 되는 걸 왜 오버야.”
“그게…… 스물두대라는데?”
이젠 거의 울상이 되다시피 한 표정으로 차드가 말했다. 레미는 웃던 것도, 하던 게임도 멈추고 차드가 앉은 쪽을 봤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차드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레미는 탄식했다.
“좆됐네, 너.”
--- 「넌 항상 바깥에 있고」 중에서

“예전 회사 부장님 기억나?”
“그 사람을 어떻게 잊어버리겠냐.”
개새낀데, 라고 덧붙이려다가 말았는데, 그녀는 내 뒷말을 짐작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더니 자기는 그 사람을 진짜 존경했다고 말했다. 한두 군데 이상한 점이야 있었어도 전체적으로 유능하고 호인이니 밑에서 잘 배워서 닮고 싶었다고.
그래서 그가 그녀에게 연애 감정 비슷한 것을 털어놓던 순간에도, 그에게 화가 나기보다 자기를 의심하게 되더라고 했다. 그녀는 귀하의 댁에 계신 사모님이 무탈하고 안녕하신지를 여쭙는 식으로 거절을 대신했다. 그러자 부장은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되어서 화를 냈다. 먼저 여지를 줘 놓고서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고 그녀를 비난했는데 부장처럼 처신에 능한 사람이 저렇게 억울해할 정도면 정말로 내 쪽에 뭔가 잘못이 있는 게 아닌가, 싶더라고.
“존경하고 연애 감정을 헷갈리는 쪽이 등신이지.”
그녀는 마른세수를 몇 번 하더니 자기도 그런 줄 알았다고 말했다.
--- 「당신을 위한 스물한번」 중에서

예컨대 특정 패턴과 색상의 복색이 유행하면 우리는 그것을 입거나 입지 않았다. 옷장에 처박아버리거나 쓰레기통에 넣었고 가끔은 의도적이라고 말해야 좋을 수준으로 열렬히 입었다. 중요한 것은, 입거나 입지 않는 것이 아니라 패션으로 자기의 무엇을 주장해보겠다는 깜찍한 발상 자체를 비웃는 일이었으므로.
비싼 가방을 들지 않았다. 비싼 가방을 드는 여자라는 이미지가 싫었으므로. 비싼 가방을 들었다. 비싼 가방을 들지 않는 부류로 분류되느니 차라리 속된 인간처럼 보이는 게 낫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으므로. 화장을 하지 않거나 했고 잡지를 읽으면서 호들갑을 떨거나 만화책을 읽거나 가끔은 베개로 쓰면 알맞을 두꺼운 책에 관심을 두었다. 강남을 신촌을 홍대를 합정을 상수를, 북촌과 이태원과 가로수길과 한남동마저도, 싫어했고 그러나 모든 곳에 갔고 사사건건 반대하는 일에 몰두하는가 하면 어느 날은 모두와 모든 것에 열과 성을 다한 찬사를 바쳤다. 이런 까닭에 우리의 취미는 매사 어영부영한 수준을 유지하게 마련이었으나 멋대로 살아왔다는 자부심만큼은 뿌리깊었다.
--- 「딸과 여신과 아이돌의 역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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