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의 세계에서 놀이는 생활 그 자체다. 그리고 놀이라는 단어도 그 자체로 충분한 단어다. 무엇을 수식하거나 수식받을 이유가 없는 단어다. 조급해하지 말고 어린이를, 어린이의 놀이를 믿어보자. 어린이 스스로 자신의 본능과 생각, 흥미에 따라 놀이의 내용과 방식을 선택할 때 어른들이 좋아하는 그 효과도 시나브로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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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가 놀기 위해서는 단 세 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된다. 시간, 공간, 친구다. 아주 간단한 세 가지이지만 중요한 전제가 있다. ‘자발성’이다. 타인이 지정해주는 장소, 시간, 친구가 아니라 스스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 각자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남는 시간이 아니라 놀고 싶을 때 놀 수 있어야 한다. 공간은 꼭 놀이시설물로 채워진 놀이터일 필요는 없지만 모든 어린이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내지 않아야 하고 장애 어린이들을 포함해 특정한 필요와 요구가 있는 어린이도 환대받는 공간이어야 한다. 또 놀이에는 친구가 필요하다. 물론 혼자서도 놀 수 있지만, 항상 친구 없이 놀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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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우리나라만의 방해 요소도 있다. 그중의 하나가 세대 간의 공간 싸움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놀이터는 법적으로는 도시공원 중의 하나인 어린이공원이다. 어린이공원은 어린이를 위한 공간이지만 동네에 있는 유일한 공원이라 모든 연령자의 활동을 수용해야 할 때가 많다. 주민들은 어린이공원에서 산책도 하고 가벼운 운동도 한다. 그러다 보니 지압보도나 체육시설도 필요하다. 어떤 어린이공원에는 경로당도 있다. 어린이들의 놀이와 어른들의 생활이 행복하게 공존하는 사례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경로당 어르신들이 어린이들의 놀이를 시끄럽게 여기는 경우도 있고, 노인들의 존재로 양육자들이 놀이터를 찾기 꺼리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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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고 싶은 마음(놀이 추동)이 가득한 다섯 살 은호는 옆에 있는 친구 가은이에게 잡기놀이를 하자고 눈빛으로 신호를 보낼 수도 있고, 모래밭에서 모래를 만지작거리며 놀이 시작을 알릴 수 있다(놀이 발신). 다행히도 가은이가 은호의 눈빛을 알아채 준다면 혹은 모래를 만졌는데 모래가 촉촉해 흥미롭다면, 즉 발신한 신호에 회신(놀이 회신)이 오게 되면 놀이는 시작될 수 있다(놀이 흐름). 반면 그 회신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놀이는 시작되지 않는다. 친구의 대응이 충분하지 않다면, 모래가 너무 건조하거나 젖어서 놀기에 적당하지 않다면 말이다. 쉽게 말해서 밀당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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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의 역사를 4s로 끝내려 하니 다소 서글프다. 놀이터의 역사는 어린이의 놀이를 쫓아가려는 추격의 역사였지만, 그 간격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놀이터는 집단 지성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집단 시행착오의 산물인 셈이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놀이터의 뿌리를 캐면서 만난 수많은 글 안에는 어린이에 대한 존중과 사랑, 4s로 채워지는 놀이터에 대한 염려와 어린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해피엔딩으로 결말을 맺을 수 있는 반전의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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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럽게 고백하자면, 일본의 플레이파크를 보면서 혼란스러웠다. 다섯 살 정도 되는 어린이가 몇 개의 구조물을 디뎌 가장 높은 지붕에 올라가 아래로 뛰어내리는 모습은 아찔했고, 공사장에서 나온 듯한 나무판자와 물, 흙이 뒤범벅된 야생의 공간과 주변의 고급 주택가가 이루는 강한 대비는 어색했다. 울타리 쳐진 작은 야생 공간은 동물원의 동물 같이 안쓰러워 보였다. 그나마 그 야생도 특정 계층의 자녀들이 중심이 되어 즐긴다고 하니 씁쓸했다. 플레이파크 옆 일반 놀이터에서 만난 한 엄마와의 대화도 혼란스러움을 더했다. 그녀는 일반 놀이터에서는 공원을 조성하고 관리하는 정부가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지만 플레이파크에서는 아이와 부모가 책임을 져야 하고 보험료도 개인이 지급해야 하는데 자신은 자신이 없다고 했다. 공공놀이터를 주로 디자인하다 보니 특별한 놀이터를 만드는 것보다 놀이터의 보편적 질을 높이는 데 관심을 더 가질 수밖에 없고, 앎을 넘어서 실질적으로 만드는 처지이다 보니 ‘새로운데!’라며 감탄만 하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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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럼틀, 그네, 오르기 시설 등이 개별적으로 툭툭 놀이터에 놓이던 현실을 바꿔보고자 탄생한 조합놀이대, 어린이들의 놀이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뻔한 놀이터의 주범으로 몰리고 있다. 폴 프리드버그의 정신과 실험이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고 확장되기보다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꺼렸던 시설물로 굳어져 전해졌기 때문이다. 조합놀이대는 비판적으로 보더라도 그의 놀이에 관한 탐구와 실험정신은 긍정적으로 바라보자, 이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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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도 뜨거워지지 않는 미끄럼틀, 덥지 않은 놀이터, 비를 맞지 않는 놀이터를 만들어달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듣는다. 미끄럼틀을 그늘막으로 덮고 태양과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며 최선을 다하지만, 우주의 섭리라 어쩔 수 없다. 너무 심하지만 않다면 햇빛도, 비도 놀이가 될 수 있는데 꼭 피해야 하는지 되묻고 싶지만 일사병과 감기라는 극단적 단어가 담긴 답변이 나올 게 뻔해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보다 더 덥고 우리나라보다 더 추운 나라의 놀이터를 다니며 확신하게 되었고 설득의 말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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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어린이들은 어떠한 사회적 해석 없이 환경의 어포던스를 지각하고 반응하여 환경에 잠재적 어포던스를 현실화시킨다. 어른들은 분수대의 경계에서 앉는 정도만으로 잠재된 어포던스를 지각하여 활성화하지만, 어린이들은 다르다. ‘걷기’와 ‘뛰어내리기’, ‘눕기’라는 행위로 모든 잠재적 어포던스를 몸으로 현실화시킨다. 또 어린이들은 어포던스를 있는 그대로 현실화시키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잡기놀이, 술래잡기, 뛰어내리기 경쟁 등으로 끝없이 확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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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다리가 무서운 건 괜찮은데, 다치는 건 안 돼요.” 서울 중랑구의 놀이터를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만난 은호의 발언은 놀이터에서의 안전을 이해하는 데 있어 나침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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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공간의 포장재로 고무포장(푹신한 고무 재질의 바닥포장)과 모래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요? 전문가로서 의견을 주세요!” 놀이터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 놀이시설 안전기준에 따라 바닥은 탄성이 있는 포장재를 깔아야 하는데, 현재 현실적으로 국내에서 사용 가능한 포장재는 모래 아니면 고무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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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의 놀이를 어떻게 유발하고 연결할지를 수백 번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디자인한 내용을 열심히 설명하지만, 참석자들은 장바구니에 물건을 넣듯이 놀이기구를 챙긴다. 놀이는 보이지 않지만, 놀이기구는 보이다 보니 이렇게 놀이기구 중심으로 놀이터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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