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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1월 11일
쪽수, 무게, 크기 412쪽 | 612g | 140*210*24mm
ISBN13 9791185851211
ISBN10 11858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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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고 있다. 어떤 이야기의 첫 문장으로 쓰기에 조금 암울한 말이긴 하지만, 나는 이 소식도 반창고를 떼어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짧고 퉁명스럽게, 잠시 따끔거리다 이내 사라져버리는 통증. 상황 종료. 주치의는 나에게 검사 결과들을 보여주고 혈구계수와 CEA 수치, 작은 레몬만 한 종양이 보이는 MRI를 언급하며, 이 소식을 전달하는 것에 대해 몹시 조심스러워했다. 짧은 두 문장이면 정리될 이야기를 질질 끌며 말하고 있었다.
“말기입니다. 석 달 남았습니다.”
나는 슬퍼야 한다. 감정에 북받쳐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휴대전화 버튼을 누르고 모든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절망적이고 암울한 전화를 걸어야 한다. 하긴, 내겐 친구가 없지. 그리고 가족…… 가족도 없다.
--- p.9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우리 곁에 있던 사람이 떠나고 나서야 그 사람에 대해 알게 되는 것들이라니. 우리의 정신이 모든 단서에 대한 변명을 멈추고 나서야 그 사람에 대해 알게 되는 것들이라니. 상담사는 그 단서들(그의 바람기, 술주정, 거짓말들)이 남편의 구조 요청 신호였다고 말했다. “남편은 거기에 서서 자신의 행동을 통해 당신에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겁니다.” 상담사가 설명했다. “남편은 도움을 간청하고 있었던 거예요.”
헛소리였다. 남편은 캡틴 모르간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케이트가 아니라. 이름 뒤에 온갖 화려한 직함과 이력을 달고 다니는 그 상담사라는 여자. 다 안다는 웃음과 거들먹거리는 말투로 일관하던 그 여자는 진짜 사람, 진짜 문제, 진짜 관계에 대해서는 쥐뿔도 아는 게 없었다.
--- pp.32~33

케이트가 인상적인 현관문으로부터 뒤로 물러섰다. 초인종 위에 ‘벨을 울리지 마시오!’라고 쓴 신경질적인 메시지가 붙어있는 것을 보아하니 헬레나 로스의 집이 확실해 보인다. 그 작은 쪽지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문 정중앙에 줄줄이 리스트가 붙어있다. 감히 여기까지 찾아온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규칙 리스트다. 케이트는 불안한 마음 한편에, 이 리스트가 자신이 받았던 규칙 리스트만큼이나 길고 터무니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 리스트를 읽는 사람은 이 집에 어떤 괴물이 살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린아이들을 잡아먹고, 누가 농담을 하면 정색하는 괴물이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리스트를 쓴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하늘을 날 듯이 사랑에 미치도록 빠지는 에바와 마이크 커플을 탄생시킨 손가락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헬레나의 내면에는 유머 감각과 경이로움이 있다. 문제는 그것이 사람과 소통할 때는 숨어있다가 소설에서만 드러나기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 p.49

바보 같은 짓이다. 헬레나는 케이트의 갑작스런 방문을 괜찮아할 사람이 아니다. 케이트는 돌아가야 한다. 렌트까지 해서 몰고 온 캠리로 돌아가서, 다시 세 시간을 달려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끔찍한 일은 애초에 일어난 적 없다는 듯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케이트는 잠시 멈췄다. 대리인의 삶에는 자신의 작가들을 위해 자신을 불살라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헬레나의 조기 은퇴 선언은 분명히 그런 순간에 해당한다. 자신의 차 옆에 멈춰 선 채로 이 층짜리 빅토리아풍 저택을 바라보았다. 집이 슬퍼 보인다. 이 저택의 다른 삶을 갈망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케이트에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에 잠시 빠져있던 케이트는 차 문을 열려다 말고 순간 멈추었다.
방금 죽음 그 자체를 목격한 것 같았다.
저 여자, 거의 뼈 밖에 남아있지 않다. 가죽이 앙상한 뼈들을 둘러싸고 있다. 검은 두 눈은 움푹 파여 있고, 혈색 없는 입술은 다 갈라져 있다.
--- pp.51~52

지금, 촉촉해지고 있는 저 두 눈, 벌린 입으로 들이마시는 숨, 갑자기 흘러내리는 눈물은 케이트 전남편의 책임은 아니겠지. 내 커리어를 진두지휘하고, 내 소설을 위해 싸우고, 뉴욕의 고약한 출판사들과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나의 대리인이 지금 울고 있다. 그녀에 대한 나의 생각에서 바람이 쭉 빠진다. 나는 그녀가 입술을 적시고 나를 향해 조심스레 한 걸음 내딛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헬레나?”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나에게는 써야 할 시간이 턱없이 모자란 이야기가 있다. 나에게는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썰렁한 집이 있다. 나에겐 친구가 없고, 가족이 없고, 도움을 청할 누구도 없다. 나는 죽어가고 있고, 그것은 아주 오랜만에 내게 일어난 최고의 일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종양이 생겼어요. 온 몸으로 다 퍼졌고요. 의사가 세 달 남았다고 하네요.”
케이트가 휘청였다. 기절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내 몸 하나 건사해 집 안으로 들어가기도 힘든 마당에 쓰러진 케이트까지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다. 나는 한숨을 내쉰다. “집에 들어올래요?”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가락으로 속눈썹 아래를 빠르게 비벼 닦았다. “네. 그러면 정말 좋겠어요.”
--- pp.54~55

분노가 사람이라면 그것은 헬레나 로스다. 그리고 그녀에게 무기가 있었다면 그의 다음 단계는 죽음이다. 헬레나가 폭력적으로 문을 열어젖힌다. 콧구멍이 벌름거리고 눈에서 불이 이글거린다. 헬레나가 작은 주먹을 뻗어 그의 팔목을 내리쳐 현관 벨을 더는 못 누르게 했다.
“그만 해요. 그만, 그만, 그만, 그만!” 이 말들은 구호처럼 외쳐지고, 그녀의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비쩍 마른 가슴이 긴소매 면티셔츠 안에서 고통스레 들썩였다. 이토록 작은 몸에서 이토록 어마어마한 분노라니. 그는 사실 더 나이 많은 여자를 예상했었다. 자신과 비슷한 연배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가는 테 안경을 쓴 여자를. 어깨는 지나치게 뒤로 빼고,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고루한 스타일의 팬티를 입을 것 같은 여자를. 그런데 거식증에 걸린 듯 이 앙상한 팔꿈치며 귀하며…… 나이도 기껏해야 서른 조금 넘었을 것 같다. 이토록 작은 것이 거의 10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그를 야단쳐온 사람이라 생각하니……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싶어진다.
--- p.91

그 비명 소리는 마치 동물이 죽으며 내는 소리 같았다. 몸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려지는 소리. 절망으로 가득해 듣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무릎을 꿇게 만드는 소리. 남아있는 삶의 매 순간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소리. 그런 비명이 문을 통해 진동했다. 그는 잠긴 문손잡이를 당겨보았다. 그녀의 이름을 외치며 문을 두드렸다. 그녀를 이렇게 혼자 둘 수 없다. 저런 소리를 내는데 괜찮을 리 없다.
“헬레나!” 그가 무릎을 꿇고 한쪽 귀를 바닥에 갖다 댔다. 또 한차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감정 때문에 미치도록 괴로워하는 소리. 그것은 마치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다. 소리가 멎고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뒤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문에 무언가 계속 달그락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1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 소리는 헬레나의 흔들리는 어깨가 문에 부딪쳐 나는 소리, 무너진 그녀의 몸이 떨리며 나는 소리라는 것을.
“헬레나.” 그가 속삭였다. “제발 문 열어요.”
--- p.312

“천국을 믿어요?” 그녀는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겨 두 주먹 위를 덮었다.
“믿소. 엘렌이 지금 거기에 있소. 내 못생긴 엉덩이를 기다리고 있을 거요.” 그가 미소 지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렸다. “그런 상상을 하곤 해요. 아내가 나를 혼내야 할 리스트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상상을.” 예를 들어 음주운전 같은 것. 그는 음주운전 때문에 카운티 구치소에 하룻밤 수감됐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내내 아내의 실망 가득한 목소리를 쉼 없이 들어야 했다. 그 수치심 하나면 충분했다. 그 수치심 때문에 그는 술병을 내려놓고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었다.
“내가 베서니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러웠다.
“만날 거라는 걸 알아요. 아이와 영원히 함께 할 거요.”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의 온 마음을 담고 믿음을 담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 아주 잠시 그녀의 입꼬리가 떨리며 살짝 올라갔다. 그녀에게 있어 그것은 입이 귀에 걸릴 정도의 웃음 만큼이나 큰 웃음이었을 것이다. 그도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 pp.390~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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