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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층의 하이쎈스

없는 층의 하이쎈스

김멜라 | 창비 | 2023년 05월 3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4 리뷰 5건 | 판매지수 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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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5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32쪽 | 372g | 128*188*30mm
ISBN13 9788936439088
ISBN10 8936439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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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로라가 보기에 ‘미(美)’ 자가 붙은 말치고 사람을 우습게 만들지 않는 말이 없었다. 청순미, 볼륨미, 과즙미. 그러나 본인이 깨닫지 못하는 아세로라의 미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비장미였다.
--- p.46

아세로라는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동생을 칭퉁이라 불렀다. 그애는 큰 벌이 나오는 동화책을 읽어주면 까르르 웃었으니까. 칭퉁이는 섹스의 결과가 아닌 그 주변을 맴도는 웃음 같았다. 아세로라는 한번도 동생이란 존재를 꿈꾸지 않았지만 칭퉁이 앞에선 어떤 가면도 쓰지 않고 웃을 수 있었다. 그애도 그렇게 웃어줬으니까. 그런데 왜 그애는 웃지 못하고 아파해야 했을까.
--- p.51

하지만 단지 그애가 원하는 건 다른 사람들처럼 초콜릿과 라면을 먹는 것이었다. 아이스크림과 젤리를 먹을 수 있는 평범한 몸이었다. 편의점 앞을 지날 때면 테이블에 앉아 컵라면을 먹는 사람을 넋 놓고 바라봤다.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들고 지나가는 아이는 단지 손에 흘러내린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을 뿐이었지만, 칭퉁이는 가슴에 총을 맞았다. 총알이 심장을 뚫고 간 것처럼 멈춰 섰다.
--- p.55

아세로라는 자동 센서가 꺼진 주차장 바닥에 웅크려 앉았다. 돌아갈 곳이 없었다. 아세로라의 집은 점보다 더 작아졌다. 칭퉁이가 떠나고 그애의 몸이 화장장에서 사라졌을 때 아세로라의 집도 같이 불탔다.
--- p.59

아세로라가 빳빳하게 코팅된 노란 종이를 집어 들었다. 테두리가 갈색으로 빛바랜 종이는 네모나게 접힌 자국이 있었다. ‘남산 보고’라는 붉은 글자 아래 ‘신문보도안’이라는 문구가 보였다. 뒷장에는 노트를 찢은 종이가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가로획이 길고 오른쪽으로 날아가는 듯한 필체. 동거인의 글씨였다. 아세로라는 노란 종이를 앞뒤로 보며 글자들을 비교했다. 동거인이 쓴 글자는 앞의 한자를 한글로 풀이해놓은 것이었다. (…) 하이쎈스. 동거인의 필명 하이쎈스. 신문보도안에는 하이쎈스 사씨의 죄목이 이어졌다.
--- pp.94~95

“하숙생들이 당신을 뭐라 부르는 줄 알아?”
어느 날 마주앉아 양말을 개던 남편이 사귀자에게 말했다.
“하이쎈스래. 당신더러.”
(…) 사귀자는 코를 벌름거리며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그 학생이 참 매너가 굿이야.”
사귀자는 복주머니처럼 잘 접은 양말들을 바구니에 넣으며 말했다.
“오케바리, 나이스바리.”
일 맛의 가락을 타며 사귀자가 바구니를 들고 마루로 나갔다. 그런데 ‘하이’는 뭔 뜻일까. 하이, 안녕, 그런 건가? 사귀자는 속으로 생각하며 차례차례 양말 주인들의 방문을 두들겼다.
--- pp.115~116

사귀자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루주 뚜껑을 열었다. 작달막한 통을 돌리자 해당화처럼 환한 자줏빛 루주가 꽃향을 내며 부드럽게 솟아올랐다. 척 봐도 브랜드 달린 고급 루주 같았다. 사귀자는 주책맞게 이러면 안 된다 싶으면서도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눈앞이 뿌예졌다. 그 루주가 그런 일을 불러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순영 학생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을 때 전에 써줬던 것보다 큰 종이가 바닥에 깔려 있어 내심 놀라긴 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순영 학생은 사귀자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한자가 가득한 종이를 손으로 짚어가며 똑같이 따라 써달라고 했다. 사귀자는 한획 한획 정성을 들여 썼다. 그 글자 중에 ‘김일성 만세’가 있는 줄도 모르고.
--- p.133

“아주머니, 앞으로는 아는 글자만 쓰시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글자 따라 쓰지 말고, 아주머니가 진짜로 아는 것만 쓰고 살아요.”
그 남자가 그런 말을 했을 때 사귀자는 되묻고 싶었다. 제가 아는 게 뭔가요. 진짜로 아는 거, 좋은 게 뭔가요.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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