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바야시는 냉동고가 설치된 실험실 구석으로 향했다. 문에는 잠금장치가 있고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다. 장갑 낀 손가락으로 신중히 번호를 눌렀다. 열렸음을 알리는 초록색 램프를 확인하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내부는 몇 개의 칸으로 나뉘어 있는데 현재는 병원체 한 종류만이 보관되어 있다. 그 병원체가 잘 보관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게 구리바야시의 목적이다. 안을 들여다보던 구리바야시는 흠칫 놀랐다. 다섯 개여야 할 케이스가 세 개밖에 없다. 즉 두 개가 사라진 것이다. 발밑을 봤다. 혹시 누가 떨어뜨려 깨뜨렸나 싶었다. 하지만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냉동고 안을 샅샅이 조사했으나 어디에도 없었다.
--- pp.27~28
다이호대학 의과학연구소 소장 도고 마사오미 귀하. 귀하에게 심각한 사태가 일어났기에 연락한다. 연구소의 가장 중요한 물품이 두 개 없어졌을 것이다. 거짓말 같으면 직원에게 확인하게 해보라. 귀하가 직접 보는 것도 좋겠지.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유실물은 내가 가지고 있다. 두 개를 하나의 케이스에 옮겼다. 알고 있겠지만 총량은 200그램이다. 다만 휴대하기는 어려우므로 어떤 장소에 보관했다. 첨부한 사진을 보면 어떻게 조치했는지 알 것이다. 참고로 알려주는데 케이스는 얇은 원통 유리 케이스로, 영하로 얼린 에보나이트 뚜껑으로 막아놓았다. 내 계산에 따르면 기온이 섭씨 10도 이상이 되면 에보나이트의 팽창으로 유리 케이스는 파손될 것이다.
(…)
그러므로 거래를 제안한다. 내 요구에 따르면 사진의 장소를 밝히고 수신기도 주겠다. 내 요구는 곧 돈이다. 3억 엔을 준비하길 바란다. 귀하의 호주머니 돈으로 마련하든가 소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연구비에서 빼내든가 마음대로 하라.
--- pp.29~30
“어떻게 해야 하냐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짜증스러움이 선명하게 표정에 드러났다.
“물론 대처 방법을 얘기해보자는 거네. 이 말도 안 되는 요구 말이야.”
“그야, 그게, 경찰에 얘기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지 않나요? 이건 명백한 협박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테러죠.”
“하지만 그러면 K-55의 존재를 공표해야 하네.”
“어쩔 수 없지 않나요? 원래 우리가 다뤄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은 도고의 뜻에 맞지 않는 듯했다.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구리바야시, 잘 생각하고 대답하게. 연구원이 무단으로 생물학무기를 만들었고 그것을 가지고 나갔어……. 이 일이 드러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나도 그렇지만 주임연구원인 자네도 그냥 넘어가지는 못할 거야. K-55의 실질적인 관리 책임자는 자네니까.”
구리바야시는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도고의 말이 다 맞다.
--- pp.34~35
“디지털카메라에 들어 있던 사진이야. 어떤 산일 것 같나?” 도고가 말했다.
“글쎄요…….” 구리바야시는 고개를 기울이고 사진을 한 장씩 화면에 표시했다. 열 장 중 세 장은 K-55를 찍은 것이라 장소 추정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단서를 찾자면 그나마 테디베어를 찍은 일곱 장의 사진 쪽에 가능성이 있다. 그 가운데 멀리 능선이 찍힌 게 있었다. 하지만 설산과 인연이 없는 구리바야시로서는 어떤 산인지 알아낼 재주가 없었다. 그러나 그중 한 장은, 장소는 알 수 없었으나 근처에 어떤 시설이 찍혀 있었다.
“소장님, 이 구석에 찍힌 철탑 같은 거 말인데요.” 그 사진의 구석을 가리키며 구리바야시가 말했다. “스키장 리프트 아닌가요?”
--- pp.45~46
시야가 미치는 한 온통 눈밭, 은백색의 세계였다. 20여 년 전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래, 스키장은 이런 곳이었지. 일상과는 다른 차원의 공간이다.
--- p.88
얼마 후 슈토는 멈추고 손을 흔들었다. 여기까지 오라는 소리 같다. 구리바야시는 조심조심 출발했다. 물론 다리를 활짝 벌린 보겐이다. 하지만 예상보다 훨씬 속도가 나 허리를 뒤로 뺄 수밖에 없었다.
“아, 아악, 악!”
하반신이 앞으로 가버려 상체만 남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넘어져 등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멈췄을 때는 어느새 눈이 그치고 맑게 갠 파란 하늘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p.92
구리바야시는 코스 옆으로 이동해 판을 떼고 폴과 함께 눈 위에 놓았다. 그리고 백팩에서 방향 탐지 수신기를 꺼냈다. 만일을 대비해 완충재로 감싼 덕분에 여러 번 굴렀는데도 수신기에 이상은 없는 듯했다. 숲으로 안테나를 향하고 가슴 가득 기대를 안고 스위치를 켰다. 하지만 나란히 놓인 여덟 개의 발광 다이오드는 하나도 켜지지 않았다. 안테나 방향을 조금 바꿔봤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혹시…….
더 깊은 곳으로 가야 할지 모른다고 구리바야시는 생각했다. 수신 범위 300미터라고 해도 이 광대한 산속에서는 대단한 거리가 아니다. 그 사진의 이미지로는 코스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처럼 보였다. 구리바야시는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다른 사람은 없었다. 붉은 로프를 통과해 코스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갑자기 눈이 부드러워졌다. 걸을 때마다 푹푹 스키 부츠가 빠졌다. 게다가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숲 쪽으로 상당한 급경사의 내리막길이었다. 과연 아까 그 장소로 돌아갈 수 있을까 불안해져 걸으면서 뒤를 돌아봤다. 그 순간 오른발이 훅 빠졌다.
으악! 소리쳤을 때는 이미 늦었다. 눈 속에 얼굴부터 쓰러지고 말았다.
--- pp.97~98
속도를 늦춰 다가가며 말했다. “왜 그래?”
그러자 다카노는 아무 말 없이 옆의 나무를 가리켰다.
“응? 뭔데?” 겐타는 그가 가리킨 곳을 봤다. 나무에 못이 박혀 있고 그곳에 기묘한 것이 매달려 있었다. “어라, 왜 이런 곳에…….”
나무에는 작은 테디베어가 매달려 있었다. 의외로 새것처럼 보였다.
“뭐 같냐?” 다카노가 물었다.
“글쎄, 모르겠어. 분실물은 아닌 것 같고.” 겐타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서 누가 죽었나? 교통사고가 일어났을 때 종종 현장에 꽃 같은 걸 놓아두잖아.”
“그건 아닐걸? 이 스키장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엄청 난리가 났을 테고, 패트롤의 순찰이 더 엄격해지지 않은 것도 이상하고.”
“그런가……?” 다카노는 석연치 않은 태도로 중얼거렸다. 겐타는 팔을 뻗어 테디베어를 빼냈다. 자세히 보니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스키복 주머니를 열고 인형을 집어넣었다.
--- pp.112~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