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떻게…….’
늑대의 공격을 받는 순간, 재빨리 방어할 무기를 찾아낸 일이나, 윗저고리를 벗어 팔을 감싼 것도 그렇고, 비록 달아나긴 했지만, 놈들과 맞서 싸운 일이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또 다른 누군가 몸에 들어와 그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인 기분이었달까.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무서워졌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너, 넌 누구지?’
설아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물었다. 그러나 대답할 리 없었다. 설아는 한동안 답도 없는 물음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평소의 설아는 밥 짓고 나물 캐거나 할아버지의 옷을 꿰매고 틈틈이 할아버지가 구해다 준 소학을 읽었을 뿐이었다. 고작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계집아이가 늑대와 싸웠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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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너는 이제 연길에 가서 살아야 한다. 네 할아버지 뜻이야!”
“그보다는 할아버지의 총을 찾아야 해요!”
설아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백두 대장이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덩달아 까치의 말도 우뚝 섰다. 백두 대장은 설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미간이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그 표정의 의미를 알 수 없어서 설아는 마주 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마치 눈빛으로 혼내는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백두 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무슨 수로 할아버지의 총을 찾겠다는 것이야? 설마 복수라도 하겠다는 뜻이냐?”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백두 대장이 못 박듯 말했다.
“며칠 산막에 머물다가 몸이 온전해지거든 원주댁과 함께 연길로 가거라. 이제 이 산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가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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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했는데, 틀림없구나. 다시 한번 확인하기를 잘했지. 네 그 붉은 머리칼이 아니었으면, 못 알아볼 뻔했어. 그새 많이 컸구나.”
일본말이었다. 그 말이 하나도 막힘없이 귓속에 들어와 박혔다.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사키의 말을 듣는 순간 설아는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로 머리카락에 전혀 신
경 쓰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는, 머리카락의 붉은빛이 밖으로 내비치기 전에 수도 없이 푸른 깻잎과 호두 껍데기 삶은 물로 머리를 감았었는데. 아니, 그건 그렇다고 쳐도 놈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마치 설아를 잘 알고 있다는 어투가 아닌가. 물론 설아는 대꾸할 수 없어서 놈을 노려보기만 했다.
“그 푸른빛이 도는 눈빛도 여전하고……. 그래, 게다가 넌 누구보다 뛰어난 아이였어. 어떻게 너를 잊을 수 있겠느냐?”
사사키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설아는 그 모습이 역겨워 토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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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 대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입을 열었다.
“그럼, 함께 싸우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느냐? 더구나 이번 작전은 알다시피 매우 위험한 일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남으면, 너를 지켜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전까지는 민 포수 영감님의 손녀였지만, 이제부터는 독립군 대원의 일원이 되는 것이야. 우리는 함께 싸우지만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스스로 지키며 싸우겠습니다.”
“알겠다. 그럼, 이제부터 너 자신을 지키고 조선을 지켜라! 너는 두현과 함께 가라! 우리가 무얼 하는지는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자세한 네 임무는 두현에게 들으면 된다. 꼭 살아서 만나자.”
그리고 백두 대장은 설아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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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아야, 내 말 잘 들어. 난 왼편으로 뛰어갈 거야. 그쪽으로 놈들을 유인할 테니, 말굽 소리가 멀어지면 넌 반대편으로 달아나. 알았지?”
“네? 오라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러다가는 둘 다 죽어. 이미 나 때문에 이길조 아저씨와 연민철 아저씨가 죽었어. 너라도 살아야 해.”
두현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하지만 설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어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제발! 너 하나만이라도 살리고 싶어.”
“오라버니!”
“나도 살아서 갈게. 정말이야. 약속할게!”
두현의 목소리는 아주 절실했다. 촉촉이 젖은 눈빛도 외면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마자 두현은 재빨리 일어나 왼편으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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