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6년 06월 24일 |
---|---|
쪽수, 무게, 크기 | 688쪽 | 1034g | 152*228*35mm |
ISBN13 | 9788934974727 |
ISBN10 | 8934974729 |
발행일 | 2016년 06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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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688쪽 | 1034g | 152*228*35mm |
ISBN13 | 9788934974727 |
ISBN10 | 8934974729 |
들어가는 글 1. 동심의 글쓰기 : 천하의 명문은 반드시 동심에서 나온다 18세기 조선을 강타한 무목적의 글쓰기 _이덕무 유교반도의 운명, “내 책을 불사르고 감추어라” _이탁오 작은 어른에서 완벽한 인간으로, 어린이의 발견 _루소 낙타의 굴종, 사자의 투쟁, 아이의 창조 _니체 2. 소품의 글쓰기 : 반 페니 은화처럼 작고 반짝거리는 글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벼룩과 성호의 이 _이익 찰나의 미학에 사로잡힌 패트론 상인들 _바쇼 인간 장사에 대한 노여움에서 서호의 몽환적 풍경까지 _장대 모든 혁신은 갓 태어난 흉한 새끼이다 _프란시스 베이컨 3. 풍자의 글쓰기 : 성인이 되느니 차라리 광대로 살고자 한다 시대와 불화했던 최고 문장가의 풍자 전략 _박지원 유자들의 외전에 청나라 지식인의 타락상을 담다 _오경재 고양이의 눈으로 본 학벌과 금전의 야합 _나쓰메 소세키 인류 전체의 탐욕을 폭로한 최초의 문학 _조너선 스위프트 4. 기궤첨신의 글쓰기 :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 스승 이익을 넘어 문단을 지배한 권력 _이용휴와 이가환 조닌 계급의 애욕과 삶의 철학을 대변하다 _이하라 사이카쿠 이탁오의 후예들, 조선 선비들을 매료시키다 _공안파 앙시앙 레짐에 던져진 최초의 폭탄 _볼테르 5. 웅혼의 글쓰기 : 사마천의 문장은 광활한 세상으로부터 나왔다 천애지기의 만남과 북벌에서 북학으로의 대전환 _홍대용 신세계를 향해 떠난 광사狂士의 60만 자 일기 _서하객 대항해시대의 시작점이 된 뜨거운 욕망과 심원한 포부 _마르코폴로 대문호의 재생을 이끌어낸 고대 로마와의 조우 _괴테 6. 차이와 다양성의 글쓰기 : 수천의 존재가 탄생하는 수천 겹의 주름 붉을 홍 한 글자로 꽃을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_박제가 조선을 사랑한 유일한 17세기 일본 지식인 _아메노모리 호슈 암흑과 절망의 목도, “하지만 절망은 희망처럼 허망하다” _노신 천 개의 눈으로 좇은 천 개의 주름과 창조 _니체 7. 일상의 글쓰기 : 수숫대 속 벌레가 노니는 소요유 문체반정이 지워버린 19세기 조선의 문학 천재 _이옥 불교적 무상과 생에 대한 애정의 잔잔한 충돌 _요시다 겐코 책과 글과 꽃과 나비와 구름과 바람과 물소리의 글 _장조 평범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것 속의 조화로운 삶 _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8. 자의식의 글쓰기 :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조선 호모 스크립투스의 참된 자아 찾기 _심노숭 문화대혁명으로 사그라진 계급 혁명의 뜨거운 불꽃 _곽말약 근대 문명국가 일본의 뒤틀리고 일그러진 자화상 _후쿠자와 유키치 자유를 향한 여정 끝에 만난 그리스인 조르바 _니코스 카잔차키스 9. 자득의 글쓰기 : 한 자루의 비를 들고 온 땅의 덤불을 쓸어버리다 수만 권의 독서가 온축된 살아 숨 쉬는 문장 _홍길주 옛사람을 업신여긴 한 은둔자의 적자지심赤子之心 _원매 문장에서 한학까지를 통섭한 대방가의 깨달음 _사토 잇사이 인간은 언제 돌에서 별이 되어 빛나는가? _쇼펜하우어 미주 참고 문헌 찾아보기 |
글처럼 사람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것이 있을까.
말만큼이나 글은 사람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으로
오래 전부터 사용된 표현의 방법이다.
글로 우리는 생각을 정리하고 전달한다.
그리고 이런 글의 중요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가치를 높여간다.
글쓰기 특강, 작문 실력 등은
예나지금이나 우리 일상에 가깝게 다가온다.
이 책은 글쓰기 방법에 대한 책은 아니다.
글쓰기 전략을 구체적으로 세워주지도 않는다.
다만 동서양 최고의 문장가들이라고 손 꼽히는 위인들의
글을 읽어보고
그들이 글을 쓰는 핵심적인 전략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인문학적으로 그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글쓰기 관점에서는 그들의 문장을 통해
어떻게 글을 써야하는지 조금씩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준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한 가지 더 당부의 말씀을 드린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문장가들의 글쓰기에 대한 견해를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특수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봐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의 글쓰기는 시대적 산물, 즉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시각과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_ 9쪽 들어가는 글
작가의 이러한 내용에는 적극 공감하는 바이다.
글에는 정답이 없다.
글은 사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정답인 사람이냐는 질문에 답이 없듯이
글에도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정답이 없기 때문에
나만의 정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함께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39명의 글쓰기 천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구성은 총 9장으로 되어있다.
1장. 동심의 글쓰기 - 천하의 명문은 반드시 동심에서 나온다.
2장. 소품의 글쓰기 - 반 페니 은화처럼 작고 반짝거리는 글들
3장. 풍자의 글쓰기 - 성인이 되느니 차라리 광대로 살고자 한다.
4장. 기궤첨신의 글쓰기 -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
5장. 웅혼의 글쓰기 - 사마천의 문장은 광활한 세상으로부터 나왔다.
6장. 차이와 다양성의 글쓰기 - 수천의 존재가 탄생하는 수천 겹의 주름
7장. 일상의 글쓰기 - 수숫대 속 벌레나 노니는 소요유
8장. 자의식의 글쓰기 -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9장. 자득의 글쓰기 - 한 자루의 비를 들고 온 땅의 덤불을 쓸어버리다.
필자가 분류한 9장의 이야기를
온전한 분류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게 분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글을 접하기보다는
필자가 분류한 기준에 맞춰서 글을 보면
조금은 쉽게 39명의 글쓰기 천재들의 문장을 만날 수 있다.
이탁오는 앞서 이덕무가 지적한 것처럼 대개 사람들이 글을 잘 지으려고 쌓는 견문과 지식이나 인위적인 경험과 작용이 오히려 동심을 가리고 해쳐서 최초의 본심, 곧 진실한 마음을 잃게 만든다고 역설한다. 천진함과 순수한 진정은 앞서도 강조했듯이, 많이 보고 듣고 배운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 힘쓰고 노력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견문과 지식이 쌓이고,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이 깊어지고 넓어져도 동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만약 동심은 잃어버린 책 견문과 지식을 쌓고 이른바 성현의 가르침, 곧 도리와 의리를 알아 말을 하고 글을 짓게 된다면, 그러한 말과 글은 자신의 참된 감정과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말과 글을 옮겨 적은 거짓된 말과 글에 불과할 뿐이다. _ 33쪽 1장 동심의 글쓰기 - 이탁오
동심에 대한 이탁오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인위적인 경험과 작용이 오히려 동심을 가린다는 말.
글에서 마음이 느껴져야하는데
있어보이는 듯한 표현으로 진짜 내 마음을 숨겨버리는 글들을 볼 때
동심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된다.
"크레타가 자신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아주 긴급하고 위태로운 시기에 크레타인으로 태어났다는 우연을 통해서, 나는 오래전 어린 시절로 거슬러올라가서부터 이 세상에는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고, 행복보다 더 달콤한 자유라는 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크레타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자유인의 자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는 고백이다. 크레타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자부심을 어떻게 이보다 더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_ 8장 자의식의 글쓰기 - 니코스 카잔차키스
자유를 향한 여정 끝에 만난 그리스인 조르바와 관련된 내용이다.
조금은 낯설 수 있지만 동서양의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다보면
내가 글에 대해서 갖고 있지 못하던 많은 관점들을
하나하나 새롭게 경험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홍대용과 서하객의 글쓰기가 여행의 견문과 경험을 생생하고 생동감 넘치게 묘사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면, 마르코폴로의 글쓰기는 여행을 통해 습득한 지식과 정보를 충실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점은 반대의 경우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물론 양자를 절충해 각각의 단점을 넘어선 글쓰기도 존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홍대용은 <을병연행록>에서는 주관적인 감성을 앞세워 생생하고 생동감 넘치는 묘사의 글쓰기를 취했다면, <연기>에서는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며 지식과 정보를 충실하게 전달하는 글쓰기 방식을 택했다. _ 342쪽 5장 웅혼의 글쓰기 - 마르코폴로
이 책은 동서양 모두를 다루고 있다보니
이렇게 동양과 서양의 글쓰기를 즉각적으로 비교해보는 기회도
마련하고 있다.
실제 이들의 글을 예시로 들어두고
그 글에 대한 해설을 달아두니
생각의 차이가 어떻게 글에서 나타나는지 확인할 수 있고
이들의 글쓰기가 독자로 하여금 어떤 생각을 갖게 하는지도 알 수 있다.
이덕무부터 쇼펜하우어까지 최고 문장가들의 핵심 전략과
그들의 삶을 알아가면서 배우는 인문학까지.
글쓰기 동서대전을 통해서는
단순히 글쓰기에 대한 지식과 기술만 익히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도 함께 쌓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동서고금을 초월해 일가를 이룬 문장가들이 모두
그들 자신만의 독보적인 글을 썼던 것처럼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던 것처럼
이 책을 통해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글쓰기. 한 번도 글쓰기가 쉬웠던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 글을 읽는 것에 비해 글 쓰는 것은 참 어려웠다. 나만 읽고 보는 일기를 제외하고 독후감, 숙제, 과제는 말할 것도 없고
때로는 편지를 쓰는 것까지 글쓰기 앞에 고민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글은 대학에 입학할 때 '논술 시험'을 준비했을 때였다. 그때는 이 시험만 끝나면 글쓰기의 어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대입 논술'은 글쓰기 세계의 서막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뒤에 대학생활 내내 리포트 걱정을 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과목마다, 교수님마다 다른 방법으로 글을 썼지만, 쓰면 쓸수록 자신감보다 요령만 점점 늘어났다. 리포트라는 험준한 벽을 넘고 나니, 요즘엔 "자기소개서"의 세계 앞에 서있다. 나와 같이 느끼는 학생들이 많기 때문인지, 중고등학생을 위한 논술학원, 대학교에선 글쓰기 수업, 사설 학원에서 자기소개서를 봐준다고 한다. 10년도 넘게 글쓰기를 해왔음에도 글쓰기 앞에서 막막해진다.
왜 이렇게 글쓰기가 어려운 것일까?
그냥 '글쓰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좋은 글을 쓰는 것이 참 어렵다. 좋은 글은 나의 생각을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된 글이다. 좋은 글은 마음에 와닿는 글이다. 좋은 글은 논리가 탄탄한 글이다. 좋은 글은 하나의 선율처럼 읽히는 글이다. 좋은 글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생각들도 많고,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잘 알지만, 막상 글쓰기 앞에만 서면 자신이 없어진다. 그럴 땐 글 잘 쓰는 사람에게 한 수 배우는 게 필요하다. 좋은 글이란 글에 따라 다를 수 있고,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으니, 글쓰기 스타일마다 스승을 두면 더없이 완벽하다.
"이 책은 18세기를 중심으로 멀게는 14세기부터 가깝게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을 비롯해 중국, 일본 그리고 서양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장가 혹은 작가들이 선보인 글쓰기의 미학과 방법을 교차 비교해 살펴보면서 "어떻게 글을 써야 할까?"라는 문제에 대해 필자 나름대로 접근해 본 작업의 결과물입니다."
박지원, 이덕무, 니체, 나쓰메 소세키, 박제가, 괴테, 볼테르, 조너선 스위프트, 심노승 등..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시대를 넘나드는 글쓰기 천재를 단 한 권의 책으로 만날 수 있다. 바로, 『글쓰기 동서대전』에서. 글쓰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빠지지 않는 것이 "다독, 다작, 다상량"이라고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것만큼 글쓰기 실력을 키워주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 동서대전』은 다작을 제외한 모든 것을 채울 수 있는 책이다. 동서양의 지식인의 글을 모았을 뿐만 아니라, 그 글 속에 숨은
의미를 저자 나름대로 분석한다. 이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이끌어낸다. 막상 그 결과물을 책에서 확인해보면, 뻔한
내용이라며 볼멘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글쓰기 천재들은 말한다. 글쓰기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글을 쓰는 것이고 그 글을 쓰기
위해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해야 한다고 말이다. 어느 하나가 빠지면, 좋은 글쓰기 자체는 나올 수 없다고 말이다.
이탁오는 동심이란 곧 진심이라고
말한다.
동심을 잃게
되면 진심을 잃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말과 글은
이미
순수함과 진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거짓일 뿐이다.
『글쓰기 동서대전』은 총 9개 주제마다
동양과 서양의 지식인 4명을 선정해 주제를 관통하는 글쓰기 철학을 풀어내고 있다. 36명의 동서양 지식인들의 글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저자는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각각의 주제에 부합하는 저서에서 글쓰기를 하는 와중에 마주했던 고민까지 유추해낸다. 이 책에는 논술을 잘하는 비법,
리포트를 잘 쓸 수 있는 방법, 뽑히는 자기소개서와 같은 비결은 없다. 오히려 글쓰기의 기술적인 면모보다, 글쓰기의 미학을 다루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간직한 글쓰기, 정치적 사회적 목적의 글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글쓰기, 나를 탐구해나가는
글쓰기, 정치적 신념을 표현한 글쓰기 등. 각 글마다 동서양 지식인들은 비슷한 듯, 다른 자신의 글쓰기 결과물이다. 이 사실은 역사적 사실로
두고, 저자는 이 글들과 동시대에 비슷한 글에서 주제 의식을 찾아낸다.
예를 들어 "17~18세기에 만약 극도로 압축적인 묘사와 함축적인 표현 속에 자신의 감성과 생각과 마음과 뜻을 담았던 '하이쿠'라는 시의 미학이 일본에 있었다면, 조선에는 극도로 간략한 묘사와 절제된 표현 속에 자신의 감성과 생각과 마음과 뜻을 담았던 '소품문'이라는 산문의 미학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라는 말처럼. 우리나라와 일본 모두 풍미했던 소품문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하 구체적인 예시와 저자의 깊은 분석을 통해 집어준다. 그 외에도 풍자 문학에 있어서 조선의 '박지원',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 영국의 '조나선 스위프트'의 글을 통해 풍자 문학이 왜 그 시대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가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 이중적인 시대, 곧 '위선의 시대'"라는 사실을 함께 말한다.
대작과
걸작은 그러한 담대한 정신과 거대한 열정이 있어야
비로소
생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니체는 더 이상 진리를 '인식'하는 자에 머무르지 않는다.
『글쓰기 동서대전』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자의식의 글쓰기' 부분이었다. 자의식의 글쓰기를 대표하는 작가들이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외에 낯선 이름들이었기에
어려웠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 '나'란 존재에 대한 깊은 고민과 사유가 녹아진 글들을 읽는 과정이 어려워서 더 기억에 남았다. 나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난 뒤에 적은 글들은 꼼꼼히 들여다볼 가치가 있었고, 천천히 생각을 이어나갈 필요가 있었다. 자신의 삶과 그 순간순간의 궤적을
스스로 돌아보고 기록하는 자서전은 특별하다. 일기나, 평전과 달리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 인식의 변화까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서전은 다른 사람은 결코 쓸 수 없는 내용을 담을 수 있지만 동시에 왜곡될 여지가 많다. 이에 대해 "'진실성'과 '진정성'이야말로
'글은 나의 삶이자 나 자신'이라는 자의식의 미학에서 가장 중시해야 할 가치다. 만약 이 두 가지가 빠져 있다면 그러한 글은 자기 포장이자 자기
홍보 일 뿐이다."라는 당부도 빠트리지 않는다.
진실로 나의 영혼을 처음으로 뒤흔들어놓은 것은 두려움이나 고통도 아니었고, 쾌락과 오락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자유를 향한 갈망이었다. 나는 자유를 쟁취해야 했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그리고 누구로부터 자유를 찾는다는 것인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나는 거칠고 불친절한 자유의 오르막길에 천천히 올라갔다.
36명의 지식인들의 글이 모두 좋은 건
아니다. 나 역시 어떤 작가의 글은 내 마음에 쏙 들었지만, 어떤 작가의 글은 읽어도 읽어도 어렵기만 했다. 『글쓰기 동서대전』을 통해 36명의
작가를 읽고 나서도 여전히 난 글쓰기가 어렵다. 36명의 비결 아닌 비결을, 그들의 글쓰기 통찰력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가 『글쓰기
동서대전』을 통해서 배운 건 글쓰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인 사실을 받아들이는 방법이었다. 모든 글이 어려웠다. 특히 시대가 급격하게
바뀌는 시대에 글을 쓴다는 건 쉽지만 동시에 쉬울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윤동주 시인의 시가 쉽게 쓰일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36명의 글과 그 글들이 만들어졌던
시대상을 함께 배우며 18세기 이후로 전 세계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였고 글도 그 변화의 흐름 속에서 변화했음을 알 수 있었다. 새로운 글이
태어나는 건 어떤 천재의 선구안과 같은 판단력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당대에 필요한 글을 용기 있게 쓴
지식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9개의 글의 갈래의 중심에는 시대의 변화가 놓여 있었고, 글에 대한 새로운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18세기보다 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글쓰기가 어려운 건 당연하다. 우리 시대에도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글쓰기
동서대전』 속 36명의 동서양 지식인을 만난 건 잘한 선택이었다. 홍길주의 글에서 배울 수 있듯이 "글쓰기에서 자득의 묘리란 다양한 길과 방법을
통해 찾을 수 있고 또한 구할 수 있다." 36명 모두에게 혹은 몇 명에게 혹은 책이 아닌 다른 경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나만의 좋은 글'을 위해선 결국 다독, 다상량, 다작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아침을 거른다. 애들을 등교 시키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침을 먹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혼장 있으니 억지로 챙겨 먹는 것이 보통이 아니다. 가끔씩 삶은 고구마와 커피를 드립해 간단히 해결 한다. 속도 편하고 시간도 걸리지 않으니 일석이조다.
오늘도 전에 사둔 책을 꺼내 읽는다. 이름은 <글쓰기 동서대전>이다. 이름이 특이하기도하고, 두께감에 기가 눌러 정복하고자 말겠다는 깡다구 생긴 책이다. 그런 우격다짐은 며칠 만에 사그러지고 말았다. 이 책은 그후로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체 잊혀져 갔다. 아마도 작년 여름에 샀을 것이다. 혹시나 메모가 되어 있는 가 싶어 찾아보니 2016년 9월 14일 강진 우리서점이다.
이 책을 왜 샀던가? 글을 잘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표지에 "동서양 글쓰기 천재들의 핵심 비결!"이란 강열한 문구에 속고 말았다. 결국 난 이 무지막지한 책을 샀고 몇 페이지를 읽다 포기했다. 아니 포기는 아니다 급한 원고를 써야할 일이 갑자기 밀려 들어오면서 자연스레 잊힌 책이다. 이제 책속으로 들어가보자.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이 책은 18세기를 중심으로 멀게는 14세기부터 가깝게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을 비롯해 중국, 일본, 그리고 서양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장 혹은 작가들이 선보인 글쓰기의 미학과 방법을 교차 비교해 살펴 보면서 "어떻게 글을 써야할까?"라는 문제에 대한 필자 나름대로 접근해 본 작업의 결과물이다."(5쪽)
난 이 책에 그리 신빙성을 가지 않는다. 왜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숨어 쓰는 프리랜서 글쟁이긴 하지만 글이란 당대의 언어를 만지는 작업이다. 원리를 알 수 있어도 실제적인 방법은 얻기 힘들다. 그래서 글쓰기란 지금 활동하는 작가들의 글을 연구해야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의 원리나 관점 등은 당대가 아닌 대가들에게 배워야 옳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원리를 따라 당대가 아닌 명문자가와 작가들의 글을 통해 글쓰기의 핵심을 찾아가려 한다. 모두 9가지로 분류했다. 1.동심의 글쓰기, 2.소품의 글쓰기, 3.풍자의 글쓰기, 4.기궤첨신의 글쓰기, 5.웅혼의 글쓰기, 6.차이와 다양성의 글쓰기, 7.일상의 글쓰기, 8.자의식의 글쓰기, 9.자득의 글쓰기. 700쪽에 가까운 책을 단지 몇 문장으로 요약하기를 불가능할 같다. 필자의 관심가는 부분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1장 동심의 글쓰기로 들어가'보자.
동심은 말그대로 순수한 마음의 글쓰기다. 어린아이의 마음을 동심의 세례라하지 않던가. 그럼 동심의 글쓰기는 무엇일까? 저자의 말을 그대로 끌고 오면 이렇다.
"따라서 '동심의 미학'이란 어린아이의 천진하고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을 바탕 삼아 문장을 지어야 한다는 글쓰기 철학이라 할 수 있다."(17쪽)
순수한 마음의 글쓰기. 언뜻 이해가 되면서도 모호한 표현이다. 저자는 이덕무의 '영처고'란 글에서 가져온다. 영처는 어린아이 영과 처녀이 처다. 둘다 순수하고 어리다는 뜻을 내포한다.
"예전에 내가 <영처고>의 책 첫머리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글을 짓는 것이 어찌 어린아이가 장난치며 즐기는 것과 다르겠는가? 글을 짓는 사람은 마땅히 처녀처럼 부끄러워하며 자신을 감출 줄 알아야 한다.] -- 어린아이가 장난치며 즐기는 것은 '천진 그대로이며, 처녀가 부끄러어 감추는 것은 '순수한 진정' 그대로인데, 이것이 어찌 억지로 힘쓴다고 되는 것이겠는가?"
저자는 '목적 없는 글쓰기'를 동심의 글쓰기로 상정한다. '목적있는 글쓰기'를 의도적인, 뭔가를 이루려는 악한 의도를 가진 것으로 몰아간다. 왜? 동심이 아니라면 의도적이고, 꾸민 것이고, 거짓의 글쓰기가 되기 때문이다. 일리있는 말이다. 그렇다고 목적있는 글쓰기가 다 나쁠까? 이덕무의 글쓰기는 소위 일상의 글쓰기며, 딴짓거리다. 즉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있는 그대로를 받는 것. 이것이 동심의 글쓰기다. 저자가 이덕무를 소개하며 글이 제목을 '18세기 조선을 강타한 무목적이 글쓰기'로 정한 이유는 바로 이런 일상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닐까?
그는 더 나아가 이탁오의 명문장 비판, 루소의 <에밀>을 통해 인간의 불수한 의도가 첨가되지 않은 순수함이야말로 진정한 동심의 글쓰기라 말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명문을 베끼고 모방하려는 것의 잘못을 지적하고, '어린아이가 주사위 놀이를 하듯 글을 쓰는 이는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감성과 마음과 생각을 글로 묘사하고 표현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진짜 놀이를 하는 것처럼 글을 쓰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63쪽)
결국 동심의 글쓰기는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것이 아닌 자신만의 순수함을 표현하는 것이라 하겠다. 글의 힘은 진실성에 있는데, 진실성에 순수성이 더해지면 가장 위대한 글이 될 것이다.
결론은 내려보자. 이 책은 글쓰기의 방법이기 전에 글쓰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런 점에서 특이한 책이다.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