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도시오 마나한이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다. 자피노가 무슨 의미인지는 4년 전에야 알았다. 필리핀인과 일본인 혼혈이라는 의미였다. 처음에는 화가 불끈 치밀었지만 지금은 익숙하다. 그렇게 부르고 싶은 녀석은 부르면 된다. 별로 화도 나지 않는다. 나는 천천히 컵 속의 물을 목구멍으로 흘려 넣었다.
얼굴 같은 것은 기억도 못 하지만, 나는 세 살 때까지 어머니와 마닐라에서 살았다. 10년이나 지난 일이라서 어떤 곳에 살았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내 아버지는 도시오 마쓰모토라는 일본인이다. 어머니가 애를 밴 것을 알자, 그 일본인은 마닐라에서 사라져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일본인을 잊지 못하게 내게 도시오라는 이름을 붙였다. --- p.13
무지개 골짜기에 혼자 사는 호세 만가하스는 리베르타 할머니의 아들이다. 할머니의 나머지 자식들은 딸뿐이니까 아들은 호세밖에 없다. 호세는 옛날에 신인민군 네그로스섬 부대의 부지휘관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12, 3년 전에 신인민군한테서 추방당했고, 그 후 혼자서 무지개 골짜기에서 살고 있다. 경찰이나 군대에서 호세에게 현상금을 건 것 같지만, 자세한 것은 나도 모른다. 호세와 처음 만난 것은 2년 전이다. 그때 그는 지구 변두리에 있는 커다란 바위 옆에 웅크리고 있었다. 해가 뜨고 난 직후였다. 커다란 바위 옆에는 차가운 샘이 솟는다. 나는 물 긷는 것을 깜빡해서 눈 뜨자마자 바로 그곳으로 갔다. 어깨가 넓고 듬직한 체격에 구레나룻이 있는 남자가 배낭을 지고 자동소총을 무릎 위에 껴안은 채 바위 옆에 앉아 있었다. 그가 호세 만가하스였다. 그는 짙은 녹색 셔츠와 바지에 새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그때의 광경은 지금도 똑똑히 떠올릴 수 있다. 왼쪽 장딴지에 총을 맞은 호세는 바지 자락을 걷어 올리고 나이프로 직접 총탄을 꺼내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던 호세가 나를 보았고, 우리는 눈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왼쪽 장딴지에서 피를 잔뜩 흘리고 있었지만, 호세의 눈은 내 온몸을 찌를 것처럼 강렬했다. 뭔가가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아, 뭐라고 하면 좋을까, 묘하게 피가 부르는 느낌이었다. 과장이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 p.95
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우웃 하는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테리가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 마이크도 지미도. 세 사람은 눈물을 흘리면서 계속 울었다. 호세가 거절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해봤을 것이다. 눈물은 분한 탓일까? 아무리 평범한 삶을 살아보라고 해도, 어릴 때부터 게릴라로서 살아왔으니 그렇게 간단히 될 리 없다. 그 불안 때문일까? 어쨌든 안됐다. 받아들여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호세에게는 호세의 방식이 있다. 그리고 세 사람은 게릴라 훈련을 받아왔을지는 모르지만, 아직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을 정도로 경험이 부족하다. 때때로 무지개 골짜기를 빠져나가 경찰서나 군의 주둔지를 습격하는 호세에게 도움이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쓸데없는 말참견을 하지 않기로 했다. 세 사람을 바라보면서 마른 입술을 오른손으로 닦았다. 우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 p.323
무지개가 떴다, 동그란 무지개가. 바깥쪽은 빨갛고, 안쪽은 보라색인 일곱 빛깔 무지개가.
납빛의 하늘을 등지고 야자와 바나나 숲 사이에 동그란 무지개가 떠 있다. 우기도 아닌데 비가 내렸다. 그 탓에 호세 만가하스와 함께 바라보던 무지개가 지금 선명하게 떠 있다. 뭐라고 했더라, 그래, 호주에서 온 식물학자 찰스 스튜어트의 말에 따르면 지상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광륜 현상이라고 했다. 그 동그란 무지개가 지금 나와 메그의 눈에 또렷이 비추고 있다. …… 그때 무지개를 등지고 커다란 새 두 마리가 날았다. 호세의 동굴 옆, 가냘프게 뻗은 몰라브 나무 꼭대기에 둥지를 틀고 있는 필리핀 독수리이다. 열대우림의 감소로 필리핀 독수리는 지금 멸종 직전이라고 하던데, 멸종되지 마, 절대로! 계속해서 새끼를 키우는 거야! 가슴속으로 그렇게 빌었다. 어느 쪽이 수놈이고 어느 쪽이 암놈인지 모르지만 호세는 아사무, 또 한 마리는 다간이라고 불렀다. 타갈로그어로 아사무는 희망, 다간은 긍지를 의미한다. 그 필리핀 독수리 두 마리가 지금 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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