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7년 06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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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12쪽 | 524g | 145*225*30mm |
ISBN13 | 9788965962205 |
ISBN10 | 896596220X |
발행일 | 2017년 06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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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12쪽 | 524g | 145*225*30mm |
ISBN13 | 9788965962205 |
ISBN10 | 896596220X |
서문 Lectio 1 내 안의 위대한 유치함(Magna puerilitas que est in me) Lectio 2 첫 수업은 휴강입니다(Prima schola alba est) Lectio 3 라틴어의 고상함(De Elegantiis Linguae Latinae) Lectio 4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배운다(Non scholae sed vitae discimus) Lectio 5 단점과 장점(Defectus et Meritum) Lectio 6 각자 자기를 위한 ‘숨마 쿰 라우데’(Summa cum laude pro se quisque) Lectio 7 나는 공부하는 노동자입니다(Ego sum operarius studens) Lectio 8 캐사르의 것은 캐사르에게 돌리고 신의 것은 신에게 돌려 드려라 (Quae sunt Caesaris Caesari et quae sunt Dei Deo) Lectio 9 만일 신이 없더라도(Etsi Deus non daretur) Lectio10 네가 주기 때문에 내가 준다(Do ut Des) Lectio 11 시간은 가장 훌륭한 재판관이다(Tempus est optimus iudex) Lectio 12 모든 동물은 성교 후에 우울하다(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est) Lectio 13 당신이 잘 계신다면, 잘 되었네요. 나는 잘 지냅니다(Si vales bene est, ego valeo) Lectio 14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Hodie mihi, Cras tibi) Lectio 15 오늘 하루를 즐겨라(Carpe Diem) Lectio 16 로마인의 욕설(Improperia Romanorum) Lectio 17 로마인의 나이(Aetates Romanorum) Lectio 18 로마인의 음식(Cibi Romanorum) Lectio 19 로마인의 놀이(Ludi Romanorum) Lectio 20 아는 만큼 본다(Tantum videmus quantum scimus) Lectio 21 나는 욕망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Desidero ergo sum) Lectio 22 한국 사람입니까?(Coreanus esne?) Lectio 23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Verumtamen oportet me hodie et cras et sequenti die ambulare) Lectio 24 진리에 복종하라!(Oboedire Veritati!) Lectio 25 모든 사람은 상처만 주다가 종국에는 죽는다(Vulnerant omnes, ultima necat) Lectio 26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Dilige et fac quod vis) Lectio 27 이 또한 지나가리라!(Hoc quoque transibit!) Lectio 28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Dum vita est, spes est) 감사의 글 : ‘삶의 책장’을 세우는 라틴어 수업을 기억하며 - 제자들의 편지 |
2017년에 읽고 리뷰를 남겼던 책이다. 필사 이벤트를 보면서 가장 먼저 생각났던 책이었다. 생소한 라틴어 문장들은 어렵게 느껴졌지만 저자를 따라 읽어내려 가면서 그 문장들이 가지는 의미를 여러번 곱씹어 보았었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에' 대한 품격있는 응답이라는 띠지에 적힌 말처럼 살아가는 자세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었다. 어떤 곳을 펼쳐 읽어도 나에게 울림을 주는 글들. 뭔가 위로의 말이 필요하고, 나는 잘 살고 있는걸까라는 물음이 들때 펼쳐보면 좋을 책이다.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리뷰를 올렸을 때, 블로그 지인께서 한동일 교수의 『라틴어 수업』도 괜찮은 책이라고 필독을 권하셨다. 아마 '~어 수업'이란 단어의 연상에 의해 추천하신 게 아닐까 그렇게 이해했다. 그런데 '예스블로그 2018 올해의 책' 이벤트에 올라오는 포스팅을 보니 이 책이 더러 보였다. 특히 28개의 Lectio(강의) 중 어느 부분을 봐도 좋다는 말에 마음이 끌렸다... 2월 말 국외 출장이 있었고, 여정의 자투리 시간에 읽을 요량으로 이 책을 가방에 넣었다.
참 만족스러운 책이다. 2010년 2학기부터 2016년 1학기까지 서강대학교에서 강의했던 '초급·중급 라틴어' 수업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는 이 책의 특징으로 '진솔함'을 꼽고 싶다. 라틴어 명언을 자기 자신의 성찰로부터 잔잔하게 풀어내는데, 그 솔직함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아 좋았다. 그러면서도 삶의 전 영역에 걸쳐 은근한 지적 포스를 뿜어내고 있다.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이란 부제에 어울리는 문장에서 진정한 고수의 품격이 느껴졌다.
Si vales bene est, ego valeo (시발레스 베네 에스트, 에고 발레오) 당신이 잘 있다면 다행이네요. 저도 잘 있습니다…. 로마인들이 편지의 처음 부분에 서로의 안부를 물을 때 주로 썼다고 하는 이 표현이 의외로 가슴에 콕! 박혔다. 종이가 귀한 시대라 주로 ‘Si vales bene valeo ’ 또는 S.V.B.E.E.V"(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로 줄여 썼다고 하는데, 이런 상대 배려의 관점이 세월의 더께와 어울려 인연의 소중함으로 와 닿은 것이다.
대학에서의 학문 탐구에 대한 개념도 후학들에게 전해줄 만한 문장이다. "사실 언어 공부를 비롯해서 대학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양적으로 늘리는 것이 아니라 '틀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학문을 하는 틀이자 인간과 세상을 보는 틀을 세우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향후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고, 그것을 빼서 쓸 수 있도록 지식을 분류해 꽃을 책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27~28쪽)
지금 우리 사회 청년들이 더 힘든 것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한 공부를 나눌 줄 모르고 사회를 위해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주머니를 불리는 일에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착취당하며 사회구조적으로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는 무신경해요.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과 자기 가족을 위해서는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의 신음소리는 모른 척하기 일쑤입니다.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들여 공부를 한 머리만 있고 따뜻한 가슴이 없기 때문에 그 공부가 무기가 아니라 흉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56쪽)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갈등과 긴장과 불안의 연속 가운데서 일상을 추구하게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평안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삶이기도 하고요. 결국 고통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음의 표시입니다. 산 사람, 살아 있는 사람만이 고통을 느끼는데 이 고통이 없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모순이 있는 소망이겠지요. 존재하기에 피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공부하고 일하며 살아갑니다. (87쪽)
새들을 각자 저마다의 비행법과 날갯짓으로 하늘을 납니다. 인간도 같은 나이라 해서 모두 같은 일을 하지 않고 같은 방향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저마다의 걸음걸이가 있고 저마다의 날갯짓이 있어요. 나는 내 길을 가야하고 이때 중요한 것은 ‘어제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은 정확히 모르는 내 걸음의 속도와 몸짓을 파악해나가는 겁니다.(174쪽)
지금의 고통과 절망이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어디엔가 끝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마침표가 찍히기를 원하지만 야속하게도 그게 언제쯤인지는 알 수 없어요. 다만 분명한 것은 언젠가 끝이 날 거라는 겁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그러니 오늘의 절망을, 지금 당장 주저앉거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끝 모를 분노를 내일로 잠시 미뤄두는 겁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에 나를 괴롭혔던 그 순간이, 그 일들이 지나가고 있음을, 지나가버렸음을 알게 될 겁니다. (274쪽)
세네카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배운다(NON SCHOLAE, SED VITAE DISCIMUS. 논 스콜래, 세드 비태 디쉬무스)"라고 했다. 인성이 사라지는 시대에 학습의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잠언임을 새삼 깨닫는다. 지금 많이 공부해서 결과가 안 나타나도, 언젠가는 나타난다(Non efficitur ut nunc student multum, sed postea ad effectum veniet.)고 했으니... 우리 모두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보는 수밖에….
흔히 우리는 자신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하곤 한다. 이 말이 Tantum videmus quantum scimus (탄툼 비데무스 콴툼 쉬무스)란다. '아는 사람은 그만큼을 보겠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성찰하는 사람은 알고, 보는 것을 넘어 깨달을 수 있습니다.'라는 말의 후렴은 뭘까?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 (Dilige, et fac quod vis 딜리제, 에트 팍 쿼드 비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 서간 강해'의 문장이 퍼뜩 떠올라 이어진다.
너무 좋은 말씀이 많아 다 언급하기도 어려운 책... 올곧은 자기 성찰이 돋보이는 책... 정말 필독을 권할만한 책... 그런 느낌을 받은 책읽기였다...
저자 한동일 교수는 동아시아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Rota Romana)가 설립된 이래, 700년 역사상 930번째로 선서한 변호인이다. 로타 로마나의 변호사가 되려면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법을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라틴어는 물론 기타 유럽어를 잘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라틴어로 진행하는 사법연수원 3년 과정을 수료해야 하고 이 과정을 다 마쳐도 실제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하는 비율은 5~6%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로마를 오가며 이탈리아 법무법인에서 일했고, 2010년 2학기부터 2016년 1학기까지 서강대학교에서 ‘초급·중급 라틴어’ 강의를 맡아 진행했다. 첫해 수업에는 24명의 학생이 수강 신청을 하였지만, 두 번째 강의부터는 수강을 허락해달라는 학생들의 메일이 밀려 들어와 67명의 학생이 수강하였으며, 이후 매 학기 서강대를 넘어, 연세대, 이화여대, 심지어 일반 청강생, 학점 교류가 안 되는 다른 학교의 학생들까지 찾아오며 200명 이상의 수강생을 기록한 수업이다. 이 책은 한동일 교수의 6년간의 강의 노트를 28개의 장으로 정리한 책이다.
초급과 중급의 외국어 수업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수강생이 학교 밖에서까지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수강하려고 매달리게 된 것일까? 그것도 죽은 언어인 라틴어 학습이 목적인 수업인데, 취업에 바쁜 ‘청년 실업’의 시대에 실상 자격증이나 소위 스펙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 강의에 대학생을 넘어 일반인까지 열광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책 마지막 수강생들의 ‘감사의 글’을 통해 충분히 엿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상처가 어떤 것이었고 수업을 통해 어찌 치유되었는지가 한동일 교수에 대한 감사의 내용 상당수를 포함하고 있다. 특별한 삶의 목적의식 없이 남들이 다 대학을 위해 달려가기에 멋모르고 달려갔던 청년들에게 자기 현주소 파악을 위한 훌륭한 인문학적 예시를 이 수업이 제공하였던 것이다. 신부(神父)의 신분인 한동일 교수가 가진, 라틴어와 성경에 기반한 높은 삶의 지혜와 포용력 또한 중고등학교를 지나 대학까지 이어져 온, 지식과 암기 위주의 평가 방식에 신물이 넘어오는 수강생들에게 정말 신선한 청량제의 역할을 하였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수업은 새로운 단어나 문장이 등장하면 단어의 어원을 설명하고 이 단어나 문장이 로마 시대에 어떤 경우에 사용되었는지 그 활용 예시를 제시하였다. 그다음 이를 강의자 본인이 직접 겪은 일화나 생각을 곁들여 설명해주고 마지막에는 수강생들이 스스로 문장에 대해 생각해볼 질문을 던졌다. 굴절어로서 라틴어의 복잡한 문법 체계와 변화를 일방적 주입이나 암기식으로 접근하지 않고 경험과 대화를 통해 접근하여 학생 자기 삶의 일부분이 될 수 있도록 유도하였던 것이다. 강의 평가 방식도 주목할만하다. ‘나의 인생에 대하여(De mea vita)’를 주제로 A4 한 장 분량을 적어내는 것이 중간고사의 과제인데 이는 첫 수업에 미리 알려, 수업과 평가의 방식을 짐작하게 만든다. 단답형의 정답 선택에만 익숙해 온 학생들에게 던져진 이 과제는 처음에는 그저 막막함을 느끼게 하지만 수업을 듣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연속성 안에서 자신을 파악하는 자기성찰적 기회를 제공한다. 수업을 통해 그들은 단련되며 ‘두려워 마라(Nolite timere!)’라는 한동일 교수의 가르침처럼 자신의 자아를 자신의 이성으로 비로소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의 마지막 표지를 넘기며 드는 두 가지 생각 중 첫 번째는 읽는 진도가 참 빠르다고 느낄 정도로 쉽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감사의 글’에 실린 성인(成人)들, 속된 말로 ‘인 서울(in Seoul)’ 대학 중에서도 상위권에 해당하는 청년들이 왜 이 수업을 듣고서야 이런 감상과 자각을 느끼게 되었느냐는 점이다. 왜 이 세칭 우수한 재원들의 중고등학교 시절에 이 정도의 수업과 화두를 던져줄 수 있던 수업은, 또 교사는 없었느냐는 점에 나는 아쉬움을 넘어 탄식을 느낀다.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타인은 나에게 목적인가 수단인가?’, ‘나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소유냐 존재냐?’와 같은 인문학적 소양을 배양해 줄 수 있는 계기는 왜 없었느냐는 말이다. 그들의 반응은 마치 이런 유형의 수업을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쪽에 가깝다는 점에 나는 “대체 우리나라 공교육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느냐?”를 묻고, 또 강하게 질책하고 싶다. 중고등학교에서 다루기에는 어렵고 아이들의 인지 수준에 비해 버거운 질문이라고 당신이 반응한다면 당신은 중고등학교의 존재 이유를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저 입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한 교육으로 교육의 수준을 천박하게 낮추어 보고 있는 학부모, 교사의 문제는 아니라 말할 수 있을까? 그저 무슨 과목에서 몇 점을 받았는지만 확인하는 것, 몇 등인지 물어보는 것, 친구 누구보다 앞섰냐는 것만을 확인하는 것이 중등교육의 원래 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느냐 나는 묻고 싶은 것이다.
취미와 적성에 맞춘 진로가 아니라 부모의 강요와 사회적 압박으로 선택되었던 진로였기에, 진학 후 뒤늦게 찾아온 허무와 무기력감에 취한 청년들의 실존적 허기를 한동일 교수의 이 인문학 교양수업이 채워 주었던 것이 높은 수업 인기를 낳은 배경이 아니었을까? 속칭 SKY 대학의 인기 높은 학과에 입학하고서도 의대, 치대, 수의대, 약대를 위해 재수와 반수를 거듭하는 이유가 인문학의 부재에 있지는 않을까? 조국 교수의 딸 조민 양의 의과대학 입학 과정에는 막상 분노의 감정을 공식적으로 표출하던 명문대생들이 정작 분노해야 할 사안인, 서른도 넘지 않은 한 국회의원 아들의 ‘50억 퇴직금’ 소동에는 침묵하는 이유의 원인도, 기득권층, 특권층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의 공정성에는 분노하지만, 그 불공정한 특권에 소속되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에는 너그러울 수밖에 없던 것이 진짜 이유가 아니었을까? 이 모든 배경 뒤에, 교양과 인문학의 부재가 공교육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고교학점제를 통해 철학, 교육학, 심리학, 논리학, 환경 등 많은 교양과목이 개설되었지만 대부분 3학년 과목으로 편성되어 실제 자습으로만 이어지고 있는 학교 현실은 공교육 스스로 자신을 부정하는 결과를 생산하고 있다. 이 과목들을 자습으로만 대체한다면 학교 현장에서 교과 수업을 진행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저 진학이 교육의 목적이라면, 1교시부터 7교시까지 자습으로 구성하는 것이 더 훌륭한 결과를 만들지 않을까? 교육기본법 제2조의 핵심 단어 3가지는 “홍익인간, 인성교육, 민주시민”으로 교육의 목표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대학 진학과 입시는 그저 교육의 방편, 뗏목일 뿐이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교육의 본래적 목적을 고민하게 만드는 양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