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스로를 매우 흔한 성폭력 경험자로 여긴다. 내 기억 속에는 은밀히 파고드는 손길, 교묘한 눈속임, 아닌 척하는 말들, 거절할 수 없는 부탁, 순간적인 접촉 같은 것들이 있는데, 다른 여성들도 다들 비슷한 기억을 지녔음을 매일 확인한다. 그래서 먼저 우리들의 내면이 어떤 모습인지, 그 때문에 몸에 어떠한 신체적, 정서적, 감정적 어려움이 있는지 바라본다. --- p.6~7
그러나 나에게도 깊숙이 내재된 자기검열, 가만히 있기, ‘조신하게’와 같은 습성들을 떨쳐버리고 싶다는 열망이 더 컸다. 그래서 자꾸 되새겼다. 내 삶이 단 하나뿐인 동시에 무수한 평범과 보편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자꾸 말해주었다. 내 삶과 만나는 무수한 다른 삶, 그리고 이시대의 보편적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 p.8
나는 확신한다. 한국 사회, 아니 이 지구상의 거의 모든 여성이 살면서 다양한 성폭력과 여성혐오 공격의 피해자가 되는 경험을 한다고. 속한 인종, 문화, 종교, 사는 지역과 직업, 소득 수준 등에 따라 여성들 각자의 경험은 서로 다르지만, 성차별에 의한 부당한 폭력 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어림잡아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다수의 사람이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온 이거대한 사회 현상. 여기엔 ‘아무나, 누구나의 법칙’이 작동한다. --- p.20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성공적으로 길들였는가? 우리가 청소년기에 압도적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던 학교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나?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었을까, 월요일 아침 조회 시간에 전교생이 함께 봤던 성폭력 예방 비디오가 생각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못된 것투성인 교육 자료다. 또 재현 드라마라는 형식은 만들기는 쉽지만 역효과가 더 클 수도 있는 안이한 관습이다. 시청자에게 불필요한 공포감과 이미지 각인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방 교육이 아니라 사고 후 수습 교육이라는 제목이 차라리 걸맞다. --- p.35~36
심리치료를 하기로 결정한, 이미 용기 있고 지혜로운 사람에게 몇 마디 건네는 것이 무례한 일이 아니라면, 치료에서 머물지 말고 치유로 확장하자는 말을 하고 싶다. 나의 치료사는 언젠가 그랬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꼭 필요한 세 가지가 있는데, 그건 트라 우마로부터 일정한 거리 두기, 생활 속에서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되는 활동들을 하는 것 (뜨거운 목욕, 음악 듣기, 산책, 요가 등)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들을 맺어 나가는 거라고 했다. 이 말에 따르면 치료사가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사실 첫 번째, 거리 두기(트라우마를 다른 관점에서 대하며 언어와 사고를 통해 재경 험하는 것)밖에 없다. --- p.143
치유는 총체적 행위가 되어야 하고 될 수밖에 없다. 논리와 이성, 정서와 감정, 본능과 직관, 의식과 무의식, 잠재의식까지 함께 회복을 갈구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몸이 마음과 조응하는 방식, 몸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기능과 에너지를 분배하는 고유의 방식마저 달라질지 모른다. 일, 사랑, 여가, 잉여(?) 등 삶의 모든 부분이 지각 변동을 겪을 수 있다. --- p.144
여자들은 아이 때부터 이미 부모와 가족, 보육시설, 지역 커뮤니티에서 사뭇 다른 기대를 받는다. 사람들은 여자아이가 신체적으로 움직임이 크고 활달한 경우보다는 섬세하고 차분할 때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감정 노동에 능숙할 것이라는 기대 또한 받는다. (…) 대신 에둘러 표현하고, 은근히 달래고, 미인계로 유혹하면서 ‘역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가정에서, 연애에서, 직장에서 여성들의 언어(말투, 어조, 표현 등)는 질문형 제안 (~하면 어떨까요?), 추측형 자기주장(~인 것 같아요), 그리고 잦은 부탁과 사과로 점철된다. --- p.203~204
이 좋은 월경컵이 왜 이렇게 대중화가 안 될까?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아는 다국적 위생용품 기업들이 생리대와 탐폰 시장도 장악하고 있고, 그 제품들이 일회용품과 간편용품으로 반복적인 소비를 유도하는 자본주의 원리에 잘 맞아 떨어진다. 바쁜 일상에서 당장 떨어지는 월경혈을 받아내야 하는 여성 소비자들은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주류 제품을 사게 된다. 시중의 생리대와 탐폰이 안 좋은 화학 물질 덩어리에 가격도 너무 비싸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리대와 탐폰을 높은 가격으로라도 사서 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생리대 광고는 일회용 월경용품의 단점은 가리고 이미지를 곱게 분칠한다. --- p.236
예쁜 것이 외모의 고정된 상태라면, 예뻐 보이는 것은 좀 더 엄격한 잣대로서 얼굴과 몸 생김에 더해 표정, 몸짓, 언어, 상대방에 대한 태도, 그리고 꾸밈새까지 포괄 한다. 바라봄의 대상, 여성들은 이렇게 촘촘한 시선의 포위망에 갇혀 있다. 태어나서부터 단 한 번도 이 포위망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여자 들은 따라서 일생 대부분에 걸쳐 예뻐 보이기 위한 전략을 열심히 익히고 연마하고 수행한다. 바로 소비를 통해서. 시간과 노력, 돈을 비롯한 각종 자원의 소비. --- p.296~297
오늘날 유아교육학에서는 10세 이하의 남아, 여아 모두 스스로 성기를 만지며 그 감각을 즐기는 경향이 있다는 게 정설이다. 성감을 찾아내고 거기서 오는 감각을 음미하는 것, 즉 자위는 그만큼 자연스러운 행위다. 자위, 특히 여성의 자위를 나쁜 것, 열등한 것, 잘못된 것이라 퍼뜨리는 오랜 성 담론이야 말로 남성중심 이데올로기이자 자연을 거스르는 왜곡이다.
--- p.327~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