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쁜 가게에서 가장 특별한 건 뭐니 뭐니 해도 로잘리가 만든 소원 카드다. 출입문 오른쪽에 세워둔 회전진열대에 꽂혀 있는데, 루나루나에서 가장 의미 있는 제품이다. 드라공 거리에서 여러 해 동안 가게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소원 카드 덕분이었다. 루나루나의 소원 카드는 그 어떤 곳에서도 살 수 없는 유일무이한 제품으로, 손님들의 사연을 담아 주인이 직접 만들어준다는 소문이 금세 나기 시작했다.
저녁에 가게를 닫고 나면 로잘리는 밤늦게까지 창가의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소원 카드를 만든다. 수작업으로 직접 뜬 종이라 끝이 매끄럽지 않은 정감 있는 카드에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모든 카드의 사연이 다 이뤄지길 바라면서 수채화 물감으로 채색을 한다.
‘날 잊지 마!’라는 파란 글씨가 적힌 카드엔 여행용 캐리어 두 개 사이에 선 자그마한 여인이 상대에게 큼지막한 물망초 꽃다발을 건네고 있다. ‘구름 뒤에도 태양은 있다’라고 적힌 카드엔 귀여운 여자아이가 빨간 우산을 쓰고 잿빛 하늘아래 빗속을 걸어간다. 카드 맨 윗부분에선 작은 천사가 태양을 공 삼아 놀고 있다. 또 다른 카드엔‘난 아주 어릴 때부터 네가 여기 있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빌었어’라고 적혀 있고, 들판 한가운데 놓인 침대 위에서 작은 인형이 민들레 홀씨를 불고 있다. 흩날리는 씨들은 낱글자가 되고, 그 글자를 모아보면 ‘그리움’이란 단어가 된다. --- p.28~29
지난 몇 년간 로잘리는 창의적이고 멋진 문구가 있는 카드를 수없이 그렸다. 지금까지 그녀가 만든 소원 카드에 모든 손님이 만족했고, 사랑하는 사람의 심장에 큐피드의 화살이 꽂히는 소원을 이룬 고객도 많았다. 하지만 소원 카드를 그려주는 로잘리 자신의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해마다 생일이 되면 로잘리는 직접 그린 카드를 들고 에펠탑에 오른다. 704개의 계단을 올라가(그녀는 산을 좋아하는 부류
는 절대 아니다) 두근거리는 맘으로 소원이 적힌 카드를 공중에 날린다. 소박한 희망으로 치르는 그녀만의 의식으로, 르네도 몰랐다. 로잘리는 작은 의식처럼 반복되는 자기만의 행동을 굉장히 중요시했다. 그런 작은 의식들은 일상생활에 분명한
틀을 만들고 마음속의 혼돈을 정리해주며 삶의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 p.30
“소, 손님이 막스 마르셰라고요? 그, 그 막스 마르셰《자두코 토끼》와《작은 얼음요정》을 쓴”
“맞아요, 바로 그 막스 마르셰.”
노신사가 말하며 미소 지었다.
“혹시 새로 출간될 내 동화책에 그림을 그릴 생각 있어요, 마드무아젤 로랑”
막스 마르셰는 그녀의 어린 시절 영웅이었다. 로잘리는 그가 쓴 책을 한 권도 빠짐없이 열광하며 읽었다.《작은 얼음요정》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었고《자두코 토끼》도 줄줄 욀 정도였다. 여행을 갈 때도 가져갔고 저녁마다 침대에 들고 갔던 터라 책들 곳곳엔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다. 책장 끝이 접혀 있는 곳도 많고, 갈라지거나 접힌 흔적도 있고, 초콜릿 자국도 여러 군데 있는 이 책들은 아직도 옛날 방 책장에 꽂혀 있다. 그 막스 마르셰를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게다가 그의 책에 그림을 그리게 되다니……. 맞다, 이건 기적이었다. --- p.64
로잘리는《파란 호랑이》가 진열돼 있는 쇼윈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쥘 베른에 갔던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어느새 3주도 더 지났다. 바보 같은 자물쇠를 받는 일은 평생 없을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오늘은 온 세상이 잘 정돈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날이었다.
가게 밖에 어떤 남자가 투덜거리면서 신발을 닦아내고 있었다. 불만 가득한 표정에 키가 아주 컸고 약간 어두운 금발에 얇은 파란색 니트 티셔츠와 모랫빛 가죽재킷 차림이었다. 남자는 이제 천천히 걸으면서 루나루나의 쇼윈도를 흘낏 봤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다시 돌아와서 쇼윈도 앞에 서더니《파란 호랑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로잘리가 지금까지 봐왔던 사람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남자의 눈은 깨끗한 터키블루로 빛났다. 로잘리는 남자의 눈에 사로잡혀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남자가 쇼윈도 안의 책에 매료돼 시선을 떼지 않는 것처럼, 로잘리도 남자의 눈에 매료됐다.
나쁘지 않은걸. 마음속에 확실히 기분 좋은 동요가 생기는 걸 그녀는 감지했다. 쇼윈도 안을 들여다보던 남자가 눈썹을 찡그리자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매우 놀란, 아니 거의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순간 로잘리는 있으면 안 될 것, 예를 들면 커다란 거미나 죽은 쥐 같은 게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그때 개가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윌리엄 모리스가 잠들어 있는 바구니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쇼윈도를 봤을 때 남자는 사리지고 없었다. 어쩐지 실망스러웠다.
15분 뒤 그토록 멋진 남자와 격하게 싸우게 될 거라고 누군가가 귀띔해줬다면, 그녀는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 p.119~120
남자는 계속 책을 읽고 있었다. 갑자기 남자가 큰소리가 나게 책을 탁 덮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책이 맘에 안 드시나요?”
스토리든 그림이든 무엇이 맘에 안 드는지 알고 싶었다. 로버트 셔먼이 로잘리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눈엔 분노가 가득했다.
“마드무아젤…… 로랑.”
남자가 천천히 말했다.
“이 얘기는 맘에 들어요. 기가 막히게 맘에 들어요. 난 이 얘기를 굉장히 좋아해요. 이유를 밝히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아무튼 여러 가지 이유로 나한테는 아주 중요한 얘기예요. 그런데 어이없는 건 내가 이 얘기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거죠.”
“무슨…… 말씀이신가요?”
“말했듯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얘기라고요. 정확히 말하면 다섯 살 때부터요. 다시 말하면, 이 책의 얘기는 내 거예요.”
--- p.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