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혁명을 시발점으로 하는 주기는 이제 종착역에 다다랐다 해도, 혁명에 대한 역사적 필연성은 100년 전보다 오히려 더 높다. 기상이변으로 여실히 드러난 생태계 파괴는 물론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열강 사이의 줄타기와도 같은 위험한 각축, 그 각축과 직결된 시리아와 우크라이나 동부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대리전, 그리고 끝이 안 보이는 세계 경제의 장기 침체는, 자본주의의 내재적 한계와 사회주의로의 이동의 필연성을 너무나 명확히 보여준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명제가 가장 시의적절한 때는 바로 지금이다.--- p.33~34
러시아 혁명에 대한 활발한 논의를 통해 혁명에 대해 부인할 수 없는 새로운 시각이 확립되었다. 그것은 러시아 혁명이 단일체가 아니라 여러 혁명의 복합체였다는 사실이다. 볼로부예프에 따르면 러시아 혁명 속에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농민혁명, 반전혁명, 민족 해방혁명” 등 여러 혁명이 공존했으며 이들은 상호작용하고 서로 영향을 미쳤다. 소련 학자들은 점차 10월 혁명은 경제적 성숙에 따라 합법칙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국민경제와 국가구조의 붕괴, 대중의 곤궁 등이 중첩된 파국적 비상시국의 부산물이라고 보기 시작했다.--- p.110
레닌은 혁명에 성공함으로써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미답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지점에서 좌초되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해체 이후, 이런 레닌의 실패를 가지고 그의 성공까지 싸잡아 비판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하지만 레닌의 이 기회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레닌의 실패는 레닌의 성공이 가져다준 것이었다.--- p. 137~38
처음에 노동의무제는 인민 전체가 아닌 과거의 특권층에 국한되어 적용되었다. 지난날 특권을 누리던 계급 구성원이 노동의무제의 적용 대상이 되어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육체노동을 하는 광경은 사회의 지배 세력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사회 전체에 과시하는 의례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노동의무제는 극심한 노동력 부족 현상을 이겨내려고 노동 계급을 동원하는 방편으로서 이용되는 일이 잦아졌다. 윤리와 선전의 차원에 머무르던 노동의무제는 마침내 1920년에 전면적 노동 동원을 위한 강압책으로 바뀌었다. --- p.200
포스트사회주의 시기 이후 현대 좌파 정치의 위기는 러시아 혁명과 현실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반성적 성찰 없이 역사적 진실에 대한 접근을 거부하고 정치적 신념에 따라 이를 왜곡, 과장, 은폐해온 데 기인한다. 그중에서도 현실사회주의 체제를 모종의 자본주의로 규정하기 위해 그 변질의 시점을 스탈린 시기부터로 만들고 레닌 시기를 절대하하려는 무리수로 인해, 현실사회주의 체제의 문제에 대한 실질적 접근이 차단되어온 것은 학술적으로는 물론 사회변혁적 관점에서 보아도 심각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p. 207
1923년 시점의 트로츠키의 주된 불만, 즉 스탈린을 비롯한 정치국 주류와 트로츠키를 갈라놓은 것은 그의 경제 이념의 관철 여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당 중앙위원회, 특히 정치국에서 자신이 배제되었다는 매우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트로츠키는 당시 3인방이라 불리던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즉 ‘정치국 주류’가 공식 회의 전 비공식 회동을 통해 아젠다를 미리 정해서 온다고 생각했으며, 그 결과 자신이 무력해졌다고 느꼈다. 또한 그들이 서기국을 거점으로 당내 인사를 좌우하면서 권력이 그들에게 편중되고 있다고 믿었다.--- p.265~66
만약, 새로운 사회의 기반 위에서 진정 새로운 인간을 형성하고자 한다면, 문화와 일상, 습관의 영역, 즉 무의식에 대한 개입은 필수불가결하다. 이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문화정치학의 기획은 공상에 불과하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트로츠키는 이 점을 직감하고 있었고, 글쓰기를 통해 뚜렷이 제시하고자 했다. 이것이 그의 ‘이상한 나날들’을 생겨나게 한 배경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문화혁명을 노정하는 문화정치학의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 p. 327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새로운 국가 건설을 시작하게 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그들의 앞에는 차르 정부의 규제주의 정책에 의해 별도의 신분집단을 형성한 전업 성판매자와 부족한 임금을 메우기 위해 성판매를 부업으로 선택하곤 했던 도시 하층 계급 여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혁명 이전에는 누구도 던지지 않았던 질문에 볼셰비키는 답해야 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성매매는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 완전고용과 성평등이 달성된다면 성매매는 사멸할 것인가?--- p. 340
1930년대 초 아방가르드의 숙청과 19세기적 리얼리즘 감각으로의 회귀야말로 러시아 혁명이 혁명이 아니라 역사적 ‘반동’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징후적으로 드러내주는 사건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는 생산관계, 혹은 그것의 법적 형태를 바꾸는 것으로 혁명이 충분하다고 하는 믿음이 지극히 안이한 것임을 뜻한다. 그것은 예술에서 혁명적 과정이 정지된다면, 같은 말이겠지만 감각의 혁명의 반복이 정지된다면 사회혁명은 계속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다. 감각 내지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러시아 구축주의가 시도했던 것을 이해하고, 또한 그것이 좌절되는 지점이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p. 390
구성주의자들을 포함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활동이 대중과 소통하지 않는 지식인들의 난해한 형식 실험에 그쳤다는 평가는 일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국내외의 정치경제적 상황 변화와 맞물려 예술과 문화 활동의 흐름도 변화할 수밖에 없으며, [……] 아방가르드 스스로도 진화해나갔다는 점을 함께 고려할 경우,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당대 사회 속에서 이루어낸 예술적 성과를 ‘실패’로 단정하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특히 1920~21년을 기점으로 내부 논쟁을 통해서 다양하게 분화되어나간 구성주의 운동의 변화 과정에 대해서는 좀더 정밀한 평가가 필요하다.
--- p. 456~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