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죽는다. 이것은 생의 본질이다. 어떤 시점이 되면 삶은 끝나지만, 이 책은 그 순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그 순간에 도달하기까지의 이야기이다.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가장 기본적인 두려움, 즉 죽는다는 두려움을 치유하는 이야기이다. 오직 이 두려움을 치유한 뒤에, 그리고 그것에 수반되는 다른 두려움들-고통의 두려움, 상실의 두려움, 변화의 두려움, 충분하지 못하다는 두려움, 사랑받지 못한다는 두려움-을 치유한 뒤에야 살아갈 수 있는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들어가는 말」중에서
쉬운 말로 하자면 식도 아래쪽에 암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순간 나는 내 삶이 이제까지와 결코 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난 이것이 아주 안 좋은 암이라는 걸 잘 알았다. 이 진단을 받고 살아난 환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 순간 나는 불안하지도 않고 동요하지도 않았다. 내가 느낀 차분함은 뜻밖이다 못해 거의 충격적이었다. 나는 나무들을 응시하며 평화로이 앉아 있었고, 내가 왜 동요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나는 쉰두 살이었고, 방금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을 바꿔버린 샌드위치」중에서
수년간 나는 “오늘은 죽기에 좋은 날”이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전쟁터에서 가끔 쓰던 표현이다. 이것은 “오늘 나는 명예로운 일을 위해 죽는다”는 뜻이지만, 날마다 온전히 충실하게, 후회 없이, 사랑하고 봉사하며 산다면 어느 날 죽더라도 괜찮다는 뜻도 된다. 그 순간까지 내 삶은 사랑, 웃음, 멋진 음악, 배움, 가르침으로 가득했다. 내가 사랑하고 경탄하는 아내가 있고, 함께여서 자랑스러운 아이들이 있다. 나는 영성spirituality과, 나보다 훨씬 거대한 그 무엇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가슴 깊이 느꼈다. 오늘 죽더라도 만족하고도 남을 만큼 이미 누렸다. ---「두 의사, 죽음의 계곡에 들어서다」중에서
가장 중요하게는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존재로 사느냐가 핵심이란 걸 조금씩 알 듯했다. 불교에서도 말한다. “깨닫기 전에는 나무를 하고 물을 길어라. 깨닫고 나거든 나무를 하고 물을 길어라.” 나는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맑은 정신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고, 그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고 진실한 자신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했다. 나는 훌륭한 의사가 되는 법이 아니라, 의학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면서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관건임을 깨달았다. 나는 영혼의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무너져 내릴 때」중에서
나는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내가 거의 제어할 수 없다는 점과, 때로는 저주가 축복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서서히 배워나갔다. 나는 역경이나 시련에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내가 즐거움, 기쁨, 재미를 찾는다면 즐거움, 기쁨, 재미를 발견할 터였다. 문제, 스트레스, 아픔을 찾는다면 나는 그것들을 발견할 터였다.…… 나는 스트레스 요인들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내면의 평화를 발견했다. 내 신경-상상의 세계는 훨씬 넓어졌다. 이것은 25년 뒤에 내가 암에 대처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무너져 내릴 때」중에서
나는 삶이 이번 생에 시작한 것도 이번 생에 끝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생은 퍼즐, 신비, 모험의 일부에 불과했다. 이렇게 느끼니 이번 생에 다가올 죽음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것은 그저 여행의 일부분이니까. ---「상자에 갇힐 필요가 있을까?」중에서
생존의 뇌에게 죽음은 궁극의 도전이다. 따라서 그것은 죽음을 무의식적으로 쉴 새 없이 감시한다. 게다가 죽은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사람들이 대부분 모른다는 점까지 더해지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죽음을 더욱더 두려워하게 된다. 죽음에 관해 모를수록 죽음을 더 많이 두려워하기 쉽다. 평화로운 죽음을 목격하는 사람들이나 죽음이 자연스러운 사건으로 간주되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죽음을 덜 두려워한다. 이것은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 천국이 있다는 믿음이 왜 사람들에게 일종의 평화를 선사하는지 설명해 준다. ---「우리 스스로 만드는 세상」중에서
일을 줄이거나 심하면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 깊은 차원에서 위협을 느꼈다. “나는 곧 내가 하는 일이다”라는 내 중대한 신념이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내가 실제로 죽어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정말로 받아들인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던 일이 나와 함께 죽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내가 서서히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었다. ---「가장 아픈 환자가 때론 가장 건강한 사람이다」중에서
나는 죽어가고 있었지만 온전히 자유롭다고, 온전히 살아있다고 느꼈다. 온전히 살아있다고 느끼는 것은 알고 보니 병에 걸렸느냐 아니냐와는 무관했다. 현재의 의료 시스템은 온전히 살아있으려면 병이 없어야 한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입하지만, 우리는 모두 병을 피하기란 불가능한 일이고 누구나 때가 되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쉽게 말해서 현재의 의료 시스템은 불가피한 일에 맞서 싸우도록, 질 수밖에 없는 싸움에 뛰어들도록 만들어져 있다. 현재의 의료 시스템은 우리가 모두 패배자라고 믿게 만들려고 한다. ---「가장 아픈 환자가 때론 가장 건강한 사람이다」중에서
나는 아직도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나게 만들고 낮에도 마음속으로 침투하는 이 분노가 내게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그것이 암이 발병한 원인이 되었다고, 혹은 그것이 면역 체계를 약화시켜 암이 발병했을 때 면역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제 나는 그 분노를 피하지 말고 해결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그 안에 푹 잠길 필요가 있었다. 먼저 나는 암세포들과 분노가 함께 나타나도록 ‘내면의 여행’을 했다. 그러자 나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 통제를 벗어나 있었기에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어둠 속을 파 내려가며」중에서
얼마 후 나는 명상중에 가슴이 쪼개져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더니 검정색 나방들이 모조리 가슴에서 나와 검은 천사가 되었다. 나는 분노와 암이 풀려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내면의 의사’에게는 이 말이 꽤 뉴에이지스럽게 들리겠지만 이 간단한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당신도 이 방법을 시도해 볼 수 있다. 누군가에게 화가 나 있다면, 그 사람을 하나의 캐릭터로 만든 다음 그 캐릭터로 하여금 공중에 비눗방울을 불어 날리게 해보라. 우습게 들리겠지만 분노를 웃음으로 바꿀 수 있다면 상당한 변화와 치유가 일어난다. ---「어둠 속을 파 내려가며」중에서
방사선 치료 도중에 나는 자주 이렇게 말한다. “나는 고통을 느끼지만 고통이 아니다.” 이것은 어떤 고통스러운 경험이든 그 강도를 약하게 하는 데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이다. 육체와 감정과 생각을 초월하는, 더 포괄적인 개념의 자아 정의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영적인 자아, 혹은 ‘하나인 자아one-self’라고 생각하고 싶다. 이 자기는 영성의 감각, 우리가 타인과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에 맞닿아 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는 무아selfless이다. 자연 속을 걸으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기도하면서, 명상하면서 ‘하나인 자아’를 느낄 수도 있다. 그 순간 우리는 세속적인 정의의 자아를 잃어버린다. 평소에 존재하던 경계선이 사라지고, 일순간 우리는 하나가 된다. ---「진정한 나」중에서
사람들 대부분에게 통제는 곧 안전을 뜻한다. 동굴에 살던 조상들과 천둥을 다시 떠올려보라.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으면 통제도 할 수 있다. 통제할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를 해치지 못하게 막을 수도 있다. 우리는 건강에 관해서도 이런 마법 같은 생각을 적용한다.-‘위험 요인들을 다 통제할 수 있으면 나는 병에 걸리지 않을 거야.’ 불행히도 이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하지만 긴장을 풀고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통제가 안 된다는 생각에서 오히려 해방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면 경이와 호기심이 깨어난다. 게다가 죽음의 두려움도 줄어든다. 죽음은 우리 통제를 벗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궁극적인 미지의 영역이다. 그저 삶을 살아가고, 최선을 다하고, 다가오는 순간순간을 즐기면 된다. ---「하늘에서 온 동전」중에서
내 생각에 우리는 모두 감사할 줄 아는 자질을 타고났지만 우리 스스로 그 길을 가로막을 때가 많다. 그 흔한 예가 비관주의와 완벽주의다. 비관주의자와 완벽주의자는 삶에서 감사할 일들이 있더라도 왜 그것이 적절하지 않은지, 완벽하지 않은지, 아니면 어떻게 더 나을 수 있었는지 등등을 재빨리 찾아낸다. 이들의 신경-상상 마음은 어딘가에 실수나 잘못이 없나 찾아다닌다. 그러다 보니 잠시 잠깐도 감사함을 누리지 못하고 곧바로 부정적인 면으로 넘어가 버린다. “그건 그래. 하지만……” 이것이 그들의 말투다. 그들은 마요네즈가 너무 많아서, 상추가 너무 적어서, 빵이 너무 딱딱하거나 말랑해서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지 못한다. ---「주주의 꽃잎」중에서
나는 이제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 목록’이 없다. 내 삶에는 사랑이 있다. 이것은 피라미드를 보고, 산에 오르고, 태국에 가서 그곳 음식을 먹고, 그 외에 재미있을 법한 다른 활동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나는 사랑받았고 사랑했다. 내 목록은 다 지워졌다. ---「주주의 꽃잎」중에서
감사하기 연습은 현실을 마주보고, 자신의 여러 면(내적 자아, 하나인 자아, 하위 인격들, 주변 사람들」중에서을 인식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자신의 그림자를 이해하고 포용한다는 의미이다. 자신과 타인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다는 뜻이고, 우리를 해친 사람에게 연민을 품는다는 뜻이며, 삶의 힘겨운 면을 인식하면서도 눈 내리는 어두컴컴한 날 다리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작고 순수한 꽃잎을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감사함은 희망의 궁극적인 표현이다. ---「주주의 꽃잎」중에서
내게 엄청나게 도움이 된 간단한 방법이 있다. 하트매스라는 단체에서 개발한 것으로, 퀵 코히어런스Quick Coherence라고 부르는 방법이다. 이 방법의 핵심은 아주 깊고 느리게 숨을 쉬면서 긍정적인 감정을 떠올리는 데 있다. 호흡법을 ‘바꿔서’ 길고 느린 숨이 들어와 심장 주위를 감싸듯이 숨을 쉰다. 동시에 긍정적인 감정을 ‘활성화한다.’…… 암에 대처할 때 이 단순한 방법은 큰 효과를 발휘했다. 화학요법을 받느라 거지 같은 기분으로 여섯 시간 동안 앉아 있으면서, 나는 화학요법이 내 암세포를 죽이고 있다고 상상하는 쪽으로 초점을 바꾸고, 치료를 대하는 내 태도를 바꾼다. 방사선 치료 테이블에 누워 있는 동안에도 이 방법을 활용하여 호흡을 ‘바꾸고’ 암세포가 점차 줄어들어 사라지는 영상을 ‘활성화한다.’ 고통이 희망이 된다. ---「주주의 꽃잎」중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우리는 전에는 결코 하지 않았을 법한 대화도 했다. 우리는 웃으며 내 장례식을 계획했고, 나는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들려줄 추도 연설을 적었다. 우리 계획은 친구 로나가 기타로 ?히트 더 로드 잭Hit the Road Jack?(?떠나게, 잭?이란 뜻-옮긴이)을 연주하는 동안 모두들 줄을 서서 데킬라 샷을 마신 다음, 펑크 밴드가 연주하는 동안 모두들 술에 취해 춤을 추는 것이었다. 가야 한다면, 멋스럽게 가는 거다. ---「사랑 수프」중에서
다가온 죽음과, 화학요법과, 방사선 치료에 직면하려니, 그리고 특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려니, 지금 이 순간이 내 삶에서 가장 힘겨운 시간이 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감사하고 더 자유롭고 더 평화롭고 더 살아있다고 느낀다. 언젠가는 당신도 죽음을 마주보게 될 것이다. 그 순간 당신 삶을 돌아보며 잘 살아왔다고, 후회가 남아 있지 않다고, 넉넉히 사랑했다고 느끼기를 바란다. 그 날이, 당신에게 죽기에 좋은 날이기를 바란다.
---「상자 밖에서 사랑하고 죽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