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개방병동에 있던 박사장 아저씨 기억하시나요? 네, 호텔 운영한다는 그 도박중독자 아저씨 말이에요. 아저씨네 호텔에서 캐셔를 구한다길래 〈먼데이서울〉 관둔 다음 날부터 거기로 출근했어요. 저도 안다고요, 정신병자들끼리 연애하다간 어떤 재앙이 벌어지는지. 병원 있을 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어요. 그런데 그 아저씨 애인 있어요. 돈은 많이 안 줘요. 뭐, 캐셔로 일해서 큰돈 벌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아는 운동권’이 악독한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아는 도박중독자’ 사업주도 만만치 않더라고요. 24시간 교대로 일하고 새벽에 세 시간쯤 자는데요, 옛 동지들이 계산기 두들겨보더니 최저임금 위반 사업장이라고 난립니다. 빨갱이들이 하는 말이니 아마 맞을 거예요. 늘 그렇듯, 아는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며칠 전에는 저를 사무실로 따로 부르더니 청소 노동자들이 저의 ‘다나까체’에 당황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다나까체 아시죠? 합니다, 합니까, 이런 군대식 존대법 말이에요. 그러면서 ‘가족 같은 분위기’를 깨지 말아달래요. 그래서 아부지 같은 분들한테 딸처럼 살갑게 청소를 시키라는, 별 개같은 미션이 하나 더 추가됐습니다. 가족이라니. 넌 니 가족들도 최저임금 안 주고 부려먹냐 묻고 싶었지만, 차 키도 제대로 못 받는 무능한 노동자가 할 말이 아니라서 그냥 삼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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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주의한 불륜남들이 중년의 로맨스에 종지부를 찍고 빤스 바람으로 집에서 쫓겨나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카드 영수증이나 내역서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내연녀와 뜨거운 불장난을 즐기고 돌아온 남자가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 TV를 켜놓고 자울자울 졸다가, 문득 바지 주머니 안에 뭔가 이물질이 부스럭거리는 것을 감지한다. 주차 티켓인가. 주유소 영수증이겠지. 그는 TV에 눈길을 고정한 채 종이 조각을 꺼내 꼬깃꼬깃 접었다가, 손가락 끝으로 이리저리 공굴려도 보았다가, 이내 소파 뒤로 퉁? 튕긴다. 그게 무슨 코딱지인 양. 불행하게도 그것은 코딱지가 아니므로, 며칠 뒤 그의 아내는 청소기를 돌리다가 누가 봐도 구겨진 호텔 영수증같이 생긴 종이 쪼가리를 주워서 펴본다. ‘아라비안모텔’이라는 상호명이 선명하게 찍힌. 그것도 대낮에 삼만 원이 결제돼서 출장 숙박료라고 발뺌하기도 어려운. 모텔 대실 영수증을. 남자는 좌우 싸대기를 연타로 맞고 석 달을 집에 못 들어간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각서를 한 장 쓴 뒤에야 그는 귀가를 윤허받는데 그의 자리는 더 이상 가장이 아니다. 불가촉천민이다. 얄궂은 것은 한국의 슬픈 현실인데, 똑같은 상황에서 성별이 바뀌면 곧장 가정법원행이거나 최악의 경우 칼부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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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재는 나 때문에 죽은 게 맞아요.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았을 때 돌아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언덕, 그게 나였기 때문에 리재는 죽은 것이지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 하나밖에 남지 않았을 때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그 아이를 벼랑 끝으로 내몬 것은 나예요. 그리고 내가 리재를 죽이고, 내 배로 낳은 내 아이가 죽었는데, 내가 죽어버리는 건요. 너무 쉬워요. 너무 쉽고, 가볍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게 리재를 위하는 길이 맞아요. 당신들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면 리재를 잊을 거예요. 그건 자연스러운 겁니다. 죄스러워하지 말아요. 하지만 나는 그 아이를 기억해야지요. 기억하고 슬퍼할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 리재가 덜 가엾지 않겠어요. 그래서 난 그냥 살기로 했어요. 명이 씨는 명이 씨 몫의 삶을 살아요. 리재의 몫 따윈 신경쓰지 말아요. 자기 몫의 삶을 제대로 사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다하다 저엉 안 되면, 그냥 대충 살아요. 그러면 또 어떤가요. 나는 이제야 그걸 깨달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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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그러니까 아버지가 지금의 내 나이만 했을 때다. 다람쥐 같은 자식새끼 낳고 다정한 아버지로 살던 그에게 중년의 위기가 찾아왔다. 아버지는 모텔에서 여자 손을 잡고 나오다가 엄마의 친구와 맞닥뜨렸다. 그 뒤로 3년이 넘도록 아버지의 외도가 이어졌다. 읍내 곳곳에 포진한 엄마의 정의로운 친구들이 제보를 계속했고, 엄마는 아버지가 들어간 여관을 급습하느라 바빴다. 3년의 공개된 외도 끝에 아버지는 갑자기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갔다. 열두 살짜리 아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포스트모던한 반전이었다. 어느 날 새벽, 아버지가 밤손님처럼 집으로 찾아들었다. 조지훈의 시 「승무」에 나오는 ‘파르라니 깎은 머리’를 그렇게 지근거리에서 목격하기는 처음이었다. 잠이 덜 깬 눈으로 멍하니 쳐다보는 내게 아버지는 “언젠가 아빠를 이해하게 될 거야”라고, 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남기고는 떠났다. 아버지는 읍내에서 한참 떨어진 복숭아밭을 사서 절을 지었다. 그곳에서 새벽마다 참배를 올리고, 텃밭을 가꾸고, 볕 잘 드는 거실에서 대금을 불었다. 나는 오랜 세월 아버지의 멱살을 흔들고 싶은 심정으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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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다가오던 지난 6월 말에 박사장은 또 하나의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내놨어요. 팥빙수였습니다. 로비에 팥빙수 셀프 서비스 테이블을 만들래요. 저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머릿속이 화르르 타버릴 지경이었어요. 지금도 카운터에 아이스크림이랑 토스트가 상시 비치되어 있는데, 손님들이 테이블에 흘려놓은 아이스크림이며 딸기잼이며 식빵 부스러기를 삼십 분마다 닦아내야 되는데 뭐, 파앝비잉수우? 팥빙수를 개시한다는 건 호텔 캐셔에게 무엇을 의미하냐면요. 빙삭기 아래엔 늘 물이 고이고, 손님이란 인간들은 손모가지가 다들 고자인지 팥이며 시럽을 질질 흘리고, 달달한 것이 상온에 나와 있으니 날파리가 늘 꼬이는데, 그런 것들이 잠깐이라도 치워져 있지 않으면 사장새끼는 잔소릴 퍼붓고, 그런 와중에 서울 시내 대학들이 일제히 방학에 돌입해서, 돈 없는 대학생 거지새끼들이 무한 대실로 결제해서 들어오고, 이 돈 없는 거지새끼들이 한 시간에 한 번씩 팥빙수를 갈아먹으러 내려오는 것을 의미하죠. 심지어 손이 문드러지고 발모가지가 썩어진 게 분명한 마초 불륜남 새끼가 카운터로 전화해서 “1102호에 팥빙수 두 개” 뭐 이런 십장생 같은 소릴 할 때 불행히도 카운터에 사장이 서 있다면 “야, 더럽지만 그냥 니가 한 그릇 말아서 갖다 줘라” 뭐 이런 수박씨발라먹을 소릴 하는 걸 의미해요. 네. 팥빙수는 그런 수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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