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쉬면서 겨우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은, 애쓰는 만큼 쉼은 수렁에 빠진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마음의 많은 문제는 애쓰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일을 더 잘하려고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좋은 사람이려 사람들에게 웃음 짓고, 잘 살아보겠다고 애쓰며 속이 썩어갔는데 쉼마저도 잘 해보자고 애쓰고 있다니. 애쓰며 살아가는 마음가짐이 습관이 되고 관성이 되어서 어느 순간 애쓰지 않아도 될 쉼마저도 쥐어짜고 있었다.
--- p.8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제가 좋아하는 스크래쳐 위에 앉아 졸고 있었다. 녀석은 등 따숩고 배부르면 행복하여 가르릉가르릉 소리를 낸다. 고양이는 더 나은 고양이가 되려 애쓰지 않는다. 나에게 사랑받기 위해 애교를 연습하지 않는다. 다시 열심히 놀기 위해 재충전하지도 않는다. 놀고 싶을 때 놀고, 쉬고 싶을 때 쉰다. 쉼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그저 고양이다. 고양이의 쉼은 그저 쉼이다.
--- p.30
세상에 단호한 말은 너무나 많고 명쾌한 말들도 역시 많다. 그래서 섬세하고 사려 깊은 말을 바란다. 전체를 싸잡는 말보다 작고 약한 부분을 더듬는 말을 바란다. 상투적인 규정보다 두루뭉술하더라도 상처주지 않는 말들이 좋다.
--- p.51
한참을 쉬면 나아진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다시 괴롭다. 마음은 늘 뱅글뱅글 제자리를 도는 것 같았다. 오늘은 어제 같고, 어제는 오늘 같다. 하지만 훌쩍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면 결코 제자리가 아니다. 과정은 모기향처럼 동글동글 이어지는 나선이었다. 빙빙 돌다가 뒤를 돌아보면 같은 풍경 같은 자리인 것 같지만, 나는 조금이나마 원래의 자리에서 멀어져 있다. 동글동글 나선처럼, 찬찬히 나는 움직이고 있었다.
--- p.67
“어쩌면 좋냐. 쟤 인생 조졌네.”
내 친구 아무개는 인생 조졌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는다. (……) 나는 그 말이 싫어서 들을 때마다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야, 세상에 조진 인생이 어디 있냐.”
내가 ‘걔 인생 조졌네’라는 말을 싫어하는 까닭은 그 말이 옳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사건 하나로 한 사람을 규정하고 이후의 인생을 여생으로 규정하는 태도를 나는 온당치 못하다 여긴다. 그리고 이 이유는 표면적인 논리이다. 진정 그 말을 싫어하는 까닭은, 내가 내 인생을 망칠까 봐 늘 두려워하며 살기 때문이다. 녀석의 그 말이 나의 두려움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쫄보다.
--- p.90
누군가가 얘기했다. 몸의 중심은 심장이나 뇌가 아닌, 아픈 곳이라고. 손톱이 아프면 손톱에 온 신경이 쏠리고, 위가 쓰리면 위의 통증만 명징하게 느껴지듯이. 용마산을 걸으며 나의 중심이 몸의 구석구석으로 움직인다. 복잡한 생각들은 흩어지고 몸의 감각이 진해진다.
--- p.107
나는 울 수 있게 되었다. 좋은 징조이다. 나에게 있어 울음은 거대한 진보이다.
그동안 나는 제대로 울 줄도 몰랐다. 눈물을 보이는 사람은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라 여겼고, 상황을 이성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 없이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어 남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 앞에서 울 수 없었고, 나 홀로 방구석에 있을 때도 그러했다.
--- p.120
백수의 시간을 보내며 나는 내 안에 뿌리박힌 ‘위하여’에 저항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적이 언제였을까. 무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흘려보냈던 시간이 얼마나 되었나. 허송세월. 목적 없는 쉼. 그것이 내 백수생활의 마음가짐이었다.
--- p.126
백수의 시간은 여유의 농도가 다르다. 시간이 부드럽게 흘러간다. 어제도 할 일이 없었고 내일도 급한 일이 없는 가운데, 여러 번 우려낸 티백 둥굴레차 같은 일상. 회사와 연봉과 안정된 미래를 포기하고, 겨우 얻어낸 화요일 오후다.
--- p.136
언젠가 사전에서 외로움이란 단어를 찾아보고, 그 반대말은 무엇인지 곰곰이 고민한 적이 있다. 사전은 ‘번거롭다’, ‘번잡하다’를 반의어라고 일러주지만, 외롭지 않은 느낌과 딱 맞아떨어지는 단어는 아닌 듯싶다. 유대감? 공감? 교감? 연대감? 비슷한 언저리의 단어들은 있지만, 딱 반대되는 말은 없었다. 결론은, 외로움의 반대말은 없다. 외로움이란 단어는 그 의미처럼 외롭게 홀로 있다.
--- p.162
“힘내라.” 말을 들으니, 역시나 힘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 생각이 흐르다가 그 말을 건넨 녀석의 마음과 의도를 떠올린다. (……) 그거면 되었다. 그 허망한 말은 누군가의 마음과 나를 잇는 다리. 낡을 대로 낡았지만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기 위해 의지해야 하는 길. 그 정도면 되었다. 그 말에 힘은 없지만, 그 말 너머에 사람이 있다. ‘힘내’라는 말보다 ‘힘내’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서 힘을 얻는다.
--- p.236
지금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지금을 견뎌야 하는 순간으로 만들지 않는 것.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최선을 다해 좋은 것을 주고, 좋은 것을 보여주고, 좋은 걸 누리게 하는 것. 지금의 나를 위한 나의 공간을 가꾸는 것. 나는 그렇게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어찌될지 모르는 나의 미래가 현재를 착취하지 않도록, 미래에 대한 불안이 현재를 갉아먹지 않도록 나는 지금 나의 공간을 만들어간다.
--- p.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