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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판 ] 정세랑 컬렉션이동
정세랑 | 창비 | 2021년 08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5 리뷰 116건 | 판매지수 2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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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8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488쪽 | 446g | 128*188*21mm
ISBN13 9788936434540
ISBN10 8936434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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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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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도넛 샀으니까, 다음에 극장 문 열면 영화 보여주실래요?”
“네.”
천재소녀가 두번째 데이트를 제안했다. 혁현은 천재소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큼 대답했다. 그 빠름이 좀 민망할 정도였다. 사실 혁현은 도넛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 그대로 멈춰 평생 도넛만 먹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데이트겠지? 이거, 데이트겠지?
“데이트예요.”
혁현의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천재소녀가 말했다. 뒤늦게 카페인이 몸에 도는지 귀가 울렸다. 천재소녀가, 채원이 수술이 있다며 먼저 병원으로 돌아갔다. 병원까지 쫄래쫄래 따라가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도넛 가게의 화장실에서 앞발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그럴 만한 날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깨달았다. 알고 있었어, 내가 좋아한다는 걸. 내가 내내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언제부터 알았을까?
아마도, 눈만 보고.
--- p.122

“언제부터 공부 잘하면 의사 될 수 있어요?”
“되고 싶어?”
“네, 근데 공부 잘 못해요.”
“공부도 잘해야 하고 운도 좀 좋아야 해.”
아이는 운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운이 좋았던 적이 있어야 이해할 것이다. 큰 파도를 타는 것과 비슷했다. 파도가 부서질 줄 알았는데 계속되었다. 평생 그랬다. 유학생 출신답게 호 선생은 생각했다. ‘그레이트 라이드’였다고. 그 좋았던 라이드가 이제 끝나간다. 그렇다면 나눠줘도 좋을 것이다.
“내가 운을 좀 나눠줄게. 악수.”
아이가 피식 웃으며 악수에 응했다. 싱거운 할아버지라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집에 돌아오니 문밖에서부터 구운 생선 냄새가 났다. 여전히 생선은 맛있다. 어릴 때 먹었던 만큼 맛있다. 충분히 먹었다는 생각이 든다. 호 선생은 별로 욕심이 나지 않는다. 발밑에서 큰 파도가 다 부서져도 좋다. 지금껏 너무 많이 가졌다. 잃어도 좋다.
--- p.144~45

“무료해. 무료해서 죽을 것 같아.”
친구가 말했을 때 한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정말?”
“너는 안 그래?”
“나야 책만 있어도 잘 지내니까.”
“아, 나 요즘 좀 덜 읽었나. 재밌는 것 좀 추천해봐.”
한나는 고전에서 한권, 신간에서 한권, 만화책 한권, 과학책 한권을 친구에게 추천해주었다. 권과 권 사이에는 고민의 시간이 있었지만 그리 길지 않았다.
얼마 후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사는 게 무료하다는 건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 덕분에 재밌게 읽었어.”
그렇게 말하는 친구의 목소리에 생기가 느껴져서 기뻤다. 며칠 후 책을 세심하게 골라 몇 박스를 병원에 가져갔다. 시험 참가자들이 손쉽게 골라 읽을 수 있을 만큼 가볍고 속도가 빠른 책들이었다.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뛰어다니는 그런 책들, 뭔지 모를 알약을 삼켜야 하는 두려움을 한참 밀어낼 수 있을 만큼 흥미진진한 책들을.
시험이 끝나고 참가자가 책을 돌려주며 말했다.
“원래 책 잘 안 읽는데 하룻밤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네요.”
가끔 오는 직장인이었다, 불편한 양복을 입고 시험에 참가하는.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도 한나가 사서인 걸 모르지만 한나는 사서로 살 것이다. 앞으로 또 어떤 직업을 갖게 될지 몰라도 비밀리에는 사서일 것이다.
--- p.264~65

호감. 가벼운 호감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일들이 시작되는지. 좋아해서 지키고 싶었던 거리감을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나서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는데, 어쩌면 더 좋은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몰랐다.
--- p.308

“여자는 똑같은 전문직이어도 가사와 육아를 떠맡잖아요. 그래도 계속 일하고 싶으니까 파트타임이어도 하고 돈 조금 줘도 하는 거지. 그게 선배가 평소에 그렇게 좋아하는 시장의 형성이잖아. 마음에 안 들면 여자도 풀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사회를 좀 만들어봐요.”
“흥, 페미니스트 납셨네.”
“페미니스트를 욕으로 쓰는 것도 교양이 부족하다는 증거예요.”
--- p.324

하품이 옮는 것처럼 강인함도 옮는다. 지지 않는 마음, 꺾이지 않는 마음, 그런 태도가 해바라기의 튼튼한 줄기처럼 옮겨 심겼다.
--- p.325~26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
--- p.3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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