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모든 것 가운데
도서1팀 박숙경 (beblue84@yes24.com)
2013-08-07
언제나 떠올려 보면 ㅂ 의 얼굴은 유난히 밝았다. 반듯하긴 했지만 특별하게 예쁜 얼굴은 아니었고, 늘 웃고만 있던 것도 아닌데, 그녀와 함께 있으면 늘 기분이 환해졌다. 나를 비롯한 또래 대부분이 비슷한 생활 환경에서 고만고만한 고민 사이에 있었으니 특출난 구김살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그녀의 밝음은 분명 특별한 존재감을 가진 것이었다. 아직 평준화가 되기 전, 입학하기까지도 절차가 많았고, 입학 후에도 무엇보다 성적이 중요했던 분위기 속에서 나는 참 칙칙했다. 그렇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대부분 나랑 비슷했기 때문에 별스런 일로 여기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그 와중에 또렷이 빛나는 ㅂ 은, 정말 부럽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한 친구였다. 그때는 ㅂ 이 다른 존재이기만 했지, 그게 왜일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이 없다.
ㅂ 이 공부를 하는 이유는 수학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였다. 눈에 띄게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시험이든 준비나 결과에 대한 원인과 분석은 대부분 선생님이 되기 위해, 로 초점이 맞춰졌다. 실습을 왔던 교생 선생님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은 것도 그녀가 유일했고, 봉사활동으로는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가끔 모르는 문제를 들고 가면 당시 우리 학년을 맡고 있던 세 명의 수학 선생님의 성대모사를 번갈아가며 해주는 재주꾼이기도 했다. ㅂ 을 아는 누구든, 그녀가 선생님이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에 한해서는 ‘어느 대학’에 가느냐는 것이 이미 논외의 문제였다. 대학에 가기 위해, 더 정확히 말하면 학교에서 목표한 몇 개의 간판 대학에 안착하기 위해 지겨워도, 힘들어도,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학생들 모두가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중 몇 명쯤은 자신이 그리는 그럴듯한 미래가 있었을 것이고, 어렸을 때부터 꿈꿔온 목표를 가지고 있었겠지. 하지만 당시 겨우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ㅂ 과 같이 지속적으로, 일상적으로 자신의 목표를 삶과 같이 두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겨우 고등학생이라서’는 아닌 것 같다. 그 후로 십 몇 년, 더 많은 사람들을 겪어온 지금에 와서도 돌이켜보면 그렇게 자신의 되고 싶은 ‘무엇’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온 경우는 흔하지 않더라.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혹은 좋다, 나쁘다를 말하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꿈이, 꼭 ‘무엇’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한 우물을 파는 것'이 미련하다고 말해지고, 한 두 가지 장기가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멀티형 인재를 바라는 분위기 속에서, 사실 하나만 잘 하기도 힘들었던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삶의 정조를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흐르도록 하는 ㅂ 에게서, 말하자면 '퓌시스'의 몇몇 순간들을 목격한 것이다. 당연히 그 순간 우리는 그게 뭔지 몰랐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게 정말 가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한 순간의 반짝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각각의 단계에 알맞은 충분한 노력을 들이고 실패도 과정의 일부로 만들어 결국은 원하는 바를 성취해 냈다는 데 있다.
지원했던 대학에 마지막 추가 합격 하기까지의 떨리던 나날들, 우리가 졸업한 학교에서 교생실습을 하게 됬다던 들뜬 목소리, 임용고시가 쉽지 않았고, 그래서 한 때는 '가르치는 것'만이 자기의 몫이라고 생각해 입시 학원에서 일했던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선생님'이 할 수 있는 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결국은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기까지. 한 때 옆에서 지켜봤고, 이제는 간간히 주고 받는 소식으로만 듣는 ㅂ 의 이야기는 여전히 빛나던 그 때의 얼굴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한다.
하지만 그 빛나는 얼굴을 기억하는건 여기서 나뿐일테고(당연히). 마치 잘 다듬은 위인전처럼 줄기만 뽑아낸 ㅂ 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엄친아, 엄친딸의 자기 계발(자랑) 스토리와 별다를 바 없이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 물론 이건 글쓴이의 탓이 크겠지만 - 대신 『모든 것은 빛난다』를 읽어봐도 좋을 듯싶다. 꽤 재미있는 조합의 이 두 저자는 불안과 무기력이 넘쳐나는 이 시대, 호메로스가 보여주는 신들의 세계가 보여주는 삶의 성스러움은 물론, 아가페적 사랑을 통해 세계를 드러내는 예수적 방식, 혹은 자신의 욕망을 충분히 단련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이를 조율할 수 있다고 믿었던 단테적 방식을 통해서도 세상은 열려 있음을 보여준다.
중세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한 사람의 정체성은 신을 통해 결정되었다. 이것은 누군가 입증해낸 신념 체계도 아니고, 한 인간으로서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믿음도 아니었다. 하지만 햄릿이 "사느냐 죽느냐"를 문제로 삼았던 1600년경, 그리고 그로부터 대략 한 세대쯤 지나 데카르트가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을 때, 더 이상 실존의 문제는 중세적 믿음들 만으로는 답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신이 죽었다'고 말한 니체를 거쳐 온 현대인들은, 실존의 기본 문제들에 대해 이미 답을 가지고 있었던 문화와는 너무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실존적 물음에 처해 있다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모던타임즈 이래로 더 이상 놀랍지도 않은 '개인의 부품화', '인간의 수단화'는 결국 그러한 실존적 물음을 통해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뭐 꼭 그렇게 거창한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는 충분히 어제 같은 오늘을 살았고, 오늘 같은 내일을 살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실존’의 의미들을 하나로 축소하거나 어느 쪽으로 편향되게 하지 않는다는 데서 주목할만한 이 책은 다신주의polytheism를 내포한다(물론 여기서 ‘다신’이라고 하는 용어가 종교적으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개인 중심, 주체 중심을 경계하고 '신'으로 표현되는 타자 내지 자연과 함께 다수의 주체가 어우러지는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고 믿고 있다. 타인을 위해 망설임 없이 위험을 무릅쓰는 행동, 경기장에서 하나가 되어 환호하는 기쁨, 정성스럽게 내린 커피를 마신 즐거움, 그리고 한 소녀가 자신의 꿈을 따라 가는 여정까지, 세상의 의미 있는 것들은 이미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고 있다. 단지 우리가 스스로를 자율적인 주체라 믿고 이들의 부름으로부터 자신을 닫아버림으써 ‘신들이 사라진 언덕’에 내던져진 것이다. 추방된 것은 ‘우리’가 아닌 ‘신’들 이기에, 아마도 지금 필요한 물음은 ‘신이 왜 인간을 저버렸는지’가 아니라 ‘왜 인간은 신으로부터 등을 돌렸는가’가 아닐까. 다시금 무수한 ‘신’들이 던지는 성스러운 순간을 발견할 때, 우리는 빛나는 모든 것들 가운데 자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