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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관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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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1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200쪽 | 242g | 122*188*12mm
ISBN13 9791190049160
ISBN10 1190049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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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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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지쳤다면 잠시 쉬어 가도 괜찮습니다. 일상과 거리를 두고 나서야 저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제야 제 일상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쉬는 동안 뭘 할지는 각자의 선택입니다. 꿈꿔 왔지만 잠시 접어 둬야 했던 음악을 할 수도, 새로운 언어를 배워 볼 수도, 타지에서 살아 볼 수도 있겠죠. 많은 선택지 중 저는 여행을 택했을 뿐입니다. 쉬어 가지 않아도 자신을 알고 행복한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저는 그렇지 못해 진통을 겪고 멈춰야 했으니까요. --- 「들어가며」 중에서

나는 악화되기 전부터 천천히 환자가 죽음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이 환자에게 해 줄 일은 폐렴 치료뿐 아니라 죽음을 준비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나는 안내자가 되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병에 대한 치료만 어설프게 알고 있었을 뿐, 괴로워하는 환자들의 마음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환자들이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그들 앞에 있는 내 행동과 마음을 보며 깨달았다. 눈앞에 바로 보이는 일만 할 줄 알았지,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상급자가 내게 정해 준 일이 지체되지 않도록 해냈을 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의사로서 능력을 따지기도 전, 시작부터 무언가 잘못돼 있었다. 나를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 「04. 어려운 말을 어렵다고 하지 못한다면」 중에서

운 좋게 원하던 과를 전공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미래만 바라보며 생긴 욕심은 채웠다. 하지만 기쁨은 잠깐이었다. 전공의 생활은 기대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 일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해 보지 않았다. 뚜렷한 목적이 없었고 삶의 방향도 없었으니 재미도 보람도 느끼기 힘들었다. 그래서 항상 병원 밖으로, 즐겁고 짜릿한 것을 쫓아다녔다.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은 결국 이루지 못했다. 나를 다시 돌아봤다. 당장 눈앞의 목표만 이루면 행복할 거라며 참고 노력한다. 한 고비 넘으면 다시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 내고, 행복할 거라던 나는 또다시 희생된다. 정상인 줄 알고 가파른 언덕을 올랐더니 눈앞에 또 다른 정상이 보인다. 그리고 계속 반복. 그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다른 사람들이 옳다고 말하는 길을 따라간다. 결과는 내 전공의 생활에 여실히 드러났다. 내 일의 의미도 모르고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성공만 바라는 의사로.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 못한 사람으로. --- 「05. 미래를 위해 지금을 희생시킨 결과란」 중에서

지금 열심히 살면 좋은 날이 올 거라며 지금의 나를 희생하고 다른 사람들이 옳다고 말하는 길을 따라왔다. 그 길의 끝에는 ‘성공’이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하지만 그 자리에 도착하면 또다시 스스로 착취시킬 목표가 보였다. 일을 내려놓고 쉬기라도 하면 영문도 모른 채 불안했다. 그 시간마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쫓겼다. 내가 어떤 사람이어야 할지 고민한 적 없고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방황하는, 겉모습은 그럴듯해 보여도 속을 들여다보면 비어 버린 내 모습만이 남았다.
“20년 뒤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상상했던 서른 살 나는 분명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어린 날의 나에게 미안했다. 고작 이러려고 그 오랜 시간 고생하게 해서 말이다. 그제야 깨달았다. 현재의 나를 희생해도 미래의 나는 행복하지 않을 것을. 나를 갉아먹으며 가는 길에 성공은 없었다. --- 「07. 일시 정지 하다」 중에서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시간을 억지로 채우지 않았다. 그리고 빈 시간 속에서 드디어 불안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었다. 벗어나려, 이겨 내려 애쓰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불안해하는 모습은 울타리를 벗어난 솔직한 내 자신이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 경쟁, 자기 계발 따위의 말에 시달려 지냈길래 이곳까지 와서 불편해야 할까?’
‘여기서 행복하지 않다면 대체 어디서 행복할 수 있을까?’
낯선 물음 앞에서 도망가지 않았다. 그리고 고민했다. --- 「07. 지금, 여기에 만족하기 - 훈자」 중에서

일은 지루하고 재미없다. 일요일 저녁이 되면 월요병을 앓고 1년에 얼마 되지 않는 휴가만 기다린다. 내가 그랬다. 하지만 일은 가끔 자신을 빛나는 존재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의미 없이 같은 일을 반복하지만 나만이 해낼 수 있는 일도 있다. 조그만 보람을 느낄 때면 나에게 일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가치가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의미와 행복을 잊어버린다. 짧은 일탈, 여행이 주는 새로움은 필요하다. 하지만 주객이 전도되는 순간 어느새 일탈은 새로운 일상이 되고, 곧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여행이든, 일이든 시간이 흘러 무료한 일상이 되는 건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면. 여행이 길어야 1, 2년, 일은 적어도 30, 40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하는 일에서 느끼는 행복은 나의 짧은 일탈, 여행의 그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나의 일, 일상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 --- 「08. 일상의 가치 - 코카서스」 중에서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고 의사로서 내 능력이 좋아질 일은 없다. 오히려 차곡차곡 쌓아 온 지식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뿐이다. 이따금 생기는 부정적인 감정 역시 변함없다. 외적인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생긴 일에 대처하는 생각의 방식이 한층 성숙해진 듯하다.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을 아예 막을 순 없지만 이제 어느 정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 사실을 인식하고 경계심을 갖는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그것이 사람이든 상황이든)을 탓하기보다 나를 먼저 돌아본다. 나의 부족함이 원인은 아닌지 되돌아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생각한다. 그러자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였다. 일시 정지 했던 시간 덕분이다. 나 자신에게 집중했던 시간은 나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 「03. 나만의 부정 조절법」 중에서

내려놓기 위해 감내할 것이 있다. 불확실성이다. 대부분 사람은 확실하고 안정적인 앞날을 원한다. 나 역시 그랬다. 불확실한 미래는 참기 어렵다. 당장 눈앞의 사건, 사고보다 불확실한 미래가 훨씬 더 찜찜하고 불안하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변수를 통제하고 조금이라도 확실한 앞날을 계획하기 위해 끝없이 고민한다. 하지만 삶은 그 자체로 불확실하다. 아무리 준비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은 터져 나온다. 그렇다면 본질이 불확실한 것을 통제하려 애쓰기보단 예기치 못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을 배우는 게 낫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05. 불확실함을 인정해 본다면」 중에서

잠시 정지했던 시간 동안 불안은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찾아왔다. 낯설고 두려웠지만 피하지 않았다. 애써 생각해 낸, 해야 할 것들로 시간을 보내며 회피하지 않았다. 익숙한 과거의 행태를 반복하지 않았다. 불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때의 나는 불안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부족한 내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다. 불안이 찾아온 순간, 울타리를 벗어난 나를 마주하고 느꼈다. 치부를 들킨 듯 자세히 보기 싫었던 내 부족한 모습을 대면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동안 얼마나 사소한 것에 붙들려 있었는지, 별것 아닌 일에 전전긍긍하며 지냈는지 깨달았다. 앞날을 향한 비정상적인 집착을 알아차렸다. 이제 무의미한 집착을 걷어 낼 때가 됐다. 나아갈 방향을 스스로 선택할 시간이다. 뒤늦게 알았다. 행복은 내가 쟁취하는 물건, 시간, 장소 따위가 아니라 있는 것에 만족하는 내 마음이라는 걸. --- 「09. 비움으로 채워지는 나의 보통날)

일시 정지는 부족한 나를 마주했기에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삶의 중요한 분기점마다 내가 향해야 할 곳을 알려 주는 나침반이었다. 이제는 남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길에 휩쓸리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다.
갈림길에서 나는 과감히 선택했다. 높은 지위, 풍족한 재산보다 자유로운 시간의 가치가 더 존중받는 길을. 나 스스로 만족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을. 타인의 인정이 없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내가 지금껏 걸어온 길에 대한 반성, 일시 정지의 경험은 나의 방향타가 되었다. 지금은 이걸로 충분하다. 나의 방향을 따라 갈림길마다 크고 작은 결정을 내리며 나는 나아갈 것이다.
--- 「에필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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