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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1부 손짓하는 얼굴 - 11 개미 - 12 붉은 막걸리 - 14 설날 먼동 트는 무렵 - 16 옥동파출소 사이렌 - 18 당황한 당나귀 - 19 상분(嘗糞) - 20 아롱다롱 - 22 낡은 심장 - 24 모래 - 25 임종 - 26 풀섶사바 - 28 제2부 경계 - 31 색(色) - 32 은혼식 - 33 달 - 34 검불재 - 35 기생충 - 36 볼륨 - 38 몽블랑 - 40 끝 - 42 이혼(離魂) - 44 미련 - 45 유정무정(有情無情) - 46 제3부 약속 - 49 이명(耳鳴) - 50 양수(羊水) - 51 반달 - 52 증오 - 54 좌선 - 55 아비뇽의 처녀들 - 56 문밖 - 57 진달래 그림자 - 58 난초 - 60 성모실버홈요양원 - 61 금슬 - 62 제4부 수신제가(修身齊家) - 65 날 봐 - 66 싹 - 67 유예 - 68 동냥젖 - 70 왕십리 - 71 호박 - 72 귀거래혜(歸去來兮) - 74 어두운 그 끝 - 76 그 과수원의 사과 - 78 이파리 - 79 팔월에 - 80 제5부 완행열차 - 85 해 질 녘 - 86 패랭이꽃 - 87 빈소 - 88 관수재(觀水齋) - 89 쇠똥 진흙창 - 90 도롱이 - 92 빗방울 - 93 산 첩첩 강 분분 - 94 빈 란 - 95 고개 - 96 첫눈 - 98 해설 맹문재 시간의 얼굴 - 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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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
태평동 여인숙 골목 요양원으로 아내 따라 그는 장인 뵈러 간다 푸른 하늘 계수나무 아래에서 돛대 없이 난발 장인은 늙어 가고 삿대 없이 단발 아내는 어려 가는데 누가 토끼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그는 알 수 없지 눈썹 사이 주름 같은 그 길로 다시 이른 자리 해병 이병처럼 각지게 머리 깎여 미용사 출신 원장 옆에서 한 번 웃다가 엎드리고 막무가내로 끼니 외면한다 그가 앉히려다 식욕 같은 힘에 물러서고 아내가 아무리 애원해도 눈 뜨지 않는다 누구에게 분노하는 건가 혹 자신에겐가 알 수 없다 그는 알 수 없지 태평동 붉은 창문 닫힌 여인숙 골목 고개 숙이고 그는 아내 따라가 눈 감고 분노하는 장인 뵈어야 한다 어제인지 내일인지 푸른 하늘 계수나무 아래에서 서쪽 나라로 갔던 장모가 절구를 찧으며 노래한다 장인은 삿대도 없이 젊어 가고 그와 아내는 돛대도 없이 늙어 간다 금슬 당뇨로 눈멀 뻔한 구순 노모의 부엌 창가 길가 풀섶에서 주워 온 선인장과 사랑초 이런 거 들이지 말라는 아들에게 합장하며 서로 이야기하라고 나란히 두었다 하네 추석 아침 두 볼이 반쯤 벌레에게 먹힌 작은 선인장 보라 이파리 사이로 가녀린 분홍 꽃이 수줍은 사랑초 홀로 이승 가에 버려진 것들 서로 의지하며 금슬이 좋다 보름 전 통화에서 느닷없이 외롭다던 노모 붉은 기운이 가시지 않은 먼 아물거리는 눈에 아들 대신 두 보살이 들어서 있다 왕십리 오늘도 탄천 천변 긴 밤을 달리네 느린 듯 빠른 듯 하염없이 달리네 수양버들 간간이 늘어서서 빈 정수리 쓸어 주지만 서럽게도 비 오지 않는 왕십리 왕십리로 그곳 골방에서 마누라는 머리 숙여 고물고물 전자카드 만들고 드디어 한 문장 써 얹고 마네 맞붙은 호수와 흰 산 위로, ‘추석 연휴도 끝나 가고 또다시 일상으로’ 이제 그는 달려가네 호수로 설핏 무너지는 그 산으로 달려가네 무너지는 그 산으로 막무가내로 막무가내 물살을 가르며 달려가네 하염없이 멀어지는 소월(素月)의 비 오는 왕십리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 우는 그 왕십리로 벌새처럼 달려가네 가도 가도 왕십리 그 왕십리로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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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친구들이여, 우리 다시 청춘을 시작한다면 그런다고 하더라도 지난 역정(歷程)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 그래서 그동안 회피하거나 외면하였을지도 모를 유감과 상처를 초대하여 존중과 사과를 시도해 보았으면 한다. 소통하고 화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혹시 우리의 독자들이 자신과의 불화와 세계와의 균열을 우리의 이야기로 유추하면서 미리 줄일 수 있다면 그럴 수 있기를 우리 내내 기원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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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문사(文士)의 정신으로 현대를 살아온 기록이다. 취했으나 비루하지 않고 “별 없는 밤”을 만났으나 “고고”한 자세를 놓지 않으려 한 한 인간의 처연한 연대기이다(「달」).
사반세기 만에 묶어 낸 시인의 시집에는 좌우가 아니라 좌우 양극단까지 밀어붙여 본 자만이 가진 탄력과 오랜 시간 천천히 그것을 다루고 다스린 유연함이 공히 부려져 있다. 탱탱한 활줄의 미숙한 떨림과 미욱한 노여움을 거둬 다시 줄을 풀어 마음의 벽에 걸어 두는 미덕은 시인의 성정만일 탓일까. 그럼에도 그는 뜨겁게 아팠으며 불의와 무도(無道)와 타협하지 않고, 화해할 수 없는 모세계(母世界)와 자신의 시 앞에서 밤새워 성찰을 거듭한다. “짓쳐 나아가는 용맹한 누런 강물”을 돌아보며(「손짓하는 얼굴」) “무엇에 지지 말라”는 유언이 수묵처럼 퍼지는 삶을 어린 당나귀로(「당황한 당나귀」), “천지유정(天地有情)”에서 “천지무정(天地無情)”으로 마음 비우며(「유정무정」) “찬란한 늪 영원한 둥지”의 ‘조’와 함께 운회(運回)한다(「끝」). 다시 주어질 수 있는 삶의 가능성에 대한 타진이 아니라 허물어지는 생(生)의 순로(順路)에서, 드물게 말하며 온몸으로 견디고 버틴 “천지현현(天地玄玄)” 견자의 강인함의 증험을 마주한다(「아롱다롱」). “자신을 짓뭉개야 읽을 수 있고 지울 수 있는 시”라는 진리의 어깨 위에서 시인이 본 것은 무엇일까?(「경계」) 그렇게 “강은 강을 따라 흐”르고, “찬비는 찬비에 젖는다”(「미련」). 필경(畢竟) 그의 필경(筆耕)은 겸선천하(兼善天下)로 나아간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 산”을 오르며(「임종」). - 전형철 (시인) |